성장의 기쁨과 경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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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1월 27일(화) 15:49

차정식 교수
한일장신대학교

겨자씨가 작다는 말은 사실이다. 씨앗 중에 가장 작다는 표현이 사실과 다를지라도 비유 장르 특유의 과장법을 감안하면 넘어갈 수 있다. 그 씨 한 톨이 땅에 심겨 싹을 틔우고 가지를 내며 자란다. 자라봐야 당시 재래종 야생겨자 키가 2미터 남짓 될 뿐인데 비유의 화자는 이 겨자덩굴의 성장을 가리켜 '모든 풀보다 커졌다'고 말한다. 마태복음의 버전에서는 그 성장의 극점에서 이 푸성귀가 '나무가 되었다'고 언급한다. 놀라운 변신 아닌가. 푸성귀인 겨자는 식물학적 질서 속에서 감히 '나무'와 견줄 수 없다. 물관과 체관의 구조가 서로 다르다는 걸 상식을 갖춘 자라면 다들 안다. 그런데 이런 선언이 신학적 상상력의 맥락에서 가능하다. 자그만 씨앗 한 톨이 땅에서 싹을 틔워 이렇게 듬직하게 자라나 그 양적 팽창의 정점에서 질적 변환을 가져온다는 이 비유는 얼핏 헤겔의 변증법 원리 중 하나를 연상시켜준다. 그렇게 넉넉하게 자라 성숙한 그 겨자의 품에 공중의 새들이 깃든다고 한다. 한 생명이 성장할 만큼 자라나 성숙해질 때 그곳에 풀보다 더 고등생물인 새까지 품어 더불어 어울리며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생명의 조화에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명패를 붙이셨다.

누룩의 이야기도 비유의 소품은 다를망정 성장의 경이로움이란 면에서는 일관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가루 서 말 속에 넣은 누룩은 적은 분량이다. 그런데 그 적은 누룩이 가루반죽 전체를 부풀려준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주부들이라면 한 주에도 몇 차례씩 경험했을 빵 만들기 공정의 일부가 바로 이것이다. 적은 누룩이 가루반죽과 합체하여 어떻게 그 가죽을 부풀리는지 그 팽창 과정에 얽힌 모든 비밀을 우리가 모두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 결과 어쨌든 빵이 먹음직하게 만들어지고 그걸 먹는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다 자란 겨자덤불이 새들을 품고 쉬고 놀게 하는 이로움을 선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예수께서는 이 두 비유를 통해 일상의 소박한 경험과 관찰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성장의 기쁨과 잇닿아 있음을 설파하셨다. 자라지 않는 생명을 보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모든 건강한 유기체 생명은 자라게 되어 있다. 그 속에 성장 잠재력의 코드를 창조주께서 심어두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자랄지, 최대치로 자라 어떻게 변신하여 성숙해가는지는 신비한 미래의 희망에 속한다. 그 신비는 우리의 믿음과 '눈물로 씨를 뿌리는' 노동의 공정 속에, 놀라워라, 기적과 같은 결과로 실현된다. 오늘날 교회의 양적 팽창에 집중한 물리적 성장에만 목을 매는 시대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생명의 성장 전체와 그 극점에서 이루어지는 성숙, 나아가 그 결실의 나눔과 즐거움을 두루 문제시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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