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당선작 / 어둠의 기억

[ 제16회 기독신춘문예 ] 제16회 기독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이선영
2015년 01월 15일(목) 11:33

제16회 기독신춘문예 / 소설 당선작


어둠의 기억

                                                                                                                          글 : 이선영

 1.
거대한 건물처럼 하늘로 솟구쳐 오른 바오바브나무의 군락지가 화면 가득 펼쳐졌다.

나무의 몸통은 장성한 성인 남자 일곱이 둘러서도 손끝을 맞잡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둘레를 뽐냈다. 건조한 아프리카에서 수천 년을 살게 하는 생명수가 몸통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흡사 악마가 뿌리째 뽑아 거꾸로 심었다는 전설이 눈앞에서 펼쳐지듯 그 모양새가 기묘했다. 웅장한 몸통 끝에 달린 듬성한 가지들은 높은 하늘 위에서 공허하게 뻗어있었다.

태초 나뭇가지였을 뿌리는 땅 속에 곤두박질 쳐져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처럼 어지러이 흩어놓으며 땅 속에 처박혀진 비애로 눈물을 삼키고 있을까. 언젠가 진희의 딸과 함께 보았던 어린왕자의 바오바브나무가 떠올랐다. 작은 별을 숙주 삼아 뿌리를 내리던 나무. 억척스럽게 생긴 뿌리가 움켜쥔 별은 금방이라도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았다.

난임 센터 대기실 풍경 속으로 애처로운 바오바브나무가 오버랩 되어 서서히 사라졌다. 이 공간으로 모여든 여자들의 표정에서도 그녀는 기묘함을 느꼈다. 잔잔한 클래식이 흐르는 대기실은 평온했고,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큰 언니처럼 제법 연륜 있어 보이는 간호사들은 과도한 친절을 잃지 않았다. 안락한 공간 안에서 보이는 여자들의 표정과 행동은 담담하고 건조했지만, 그 밑으로 처박혀진 본심은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사 년 동안 이 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와 같은 심정인 건지 무례하지 않을 정도의 시선으로 여자들을 훑어보았다.

환자가 많으면 길게는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야 하는 공간에서 옆에 있는 누군가를 의식해선 안 되는 불문율. 시선이 마주친다거나 필요 이상의 대화로 상대의 치부를 건드리는 무례를 피하기 위해서 여자들은 이따금씩 텔레비전에 시선을 두었다. 대기실에 낮게 깔린 클래식 음악과는 이질적인 벨소리가 딩동 날 때마다 여자들의 고개가 동시에 한 곳을 주시했다. 진료실과 검사실을 오가기 위해 대기 모니터를 쫓는 여자들의 시선들 사이로 묘한 긴장과 예민한 기류가 느껴졌다. 악마는 무슨 심술로 이 여자들을 뿌리째 뽑아 거꾸로 처박아야 했을까.

딩동-
이윽고 그녀의 이름이 혈액검사실 대기 모니터에 떴다.

 2.
"많이 긴장되시죠. 지난번에는 임신테스트기 결과와 달라서 많이 실망하셨을 텐데. 이번 테스트기 결과는 어떠셨어요?"
간호사가 혈액 채취를 위해 팔뚝을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

"몇 십번을 봐도 임신테스트기 앞에서는 주눅들 수밖에 없는 걸 아는지, 이번에는 놀리듯이 애매하게 두 줄 보이던데요. 하나는 찐하게, 하나는 희미하게."
담담하게 대답하는 그녀 앞에서 간호사는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놀란 표정만 짓고 있었다. 어제 화장실 안에 쭈그려 앉아 두 손에 꼭 쥔 임신테스트기를 살며시 펴보았을 때 자신의 표정이 저러했을까 싶었다.

이번 임신테스트기 결과는 애매했다. 한 줄은 뚜렷했지만 다른 한 줄은 희미한. 임신도 아니고 불임도 아닌 어느 세계에도 편입될 수 없는 회색 지대에 서 있는 그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애매한 두 줄이라도 그녀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시험관 시술 후 확인했던 임신테스트기는 뚜렷한 두 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섯 번의 인공 수정과 두 번의 시험관 시술 결과에서 이제껏 한 줄 실패만 봐왔었다. 그날 처음 보는 두 줄에 남편과 그녀는 한참을 바라보며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지난 육 년 간의 설움이 다 뽑힐 것 같지 않아 그들은 잠도 못 이루며 침대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태교는 무엇부터 시작할지, 아기 방을 만들기 위해 옷 방을 어떻게 정리하면 될지. 지난 사 년간 인공시술을 통과하는 동안 서로의 마음은 무사했었는지. 남편은 그녀의 얼굴 사방에 키스를 연신 퍼부으며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잘했어. 잘했어. 자연임신을 포기하고 난임 센터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죽어버렸던 섹스가 그날 밤 임신테스트기의 두 줄 앞에서 맹렬히 되살아났다.

   
▲ 그림 : 김지혜
그런데 다음 날 혈액검사를 통해 병원으로부터 통보된 결과는 어처구니없게도 실패였다. 전화를 붙들고 결과가 확실한 건지 몇 번을 묻는 동안, 어안이 벙벙한 채로 듣고만 있던 남편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새벽 늦게야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은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거칠게 냉장고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났고, 거실 소파 위에 냅다 몸을 던지는 육중한 소리가 이어졌다. 그녀는 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 남편의 소리에만 집중했다. 중얼거리듯 희미했던 소리가 마침내 남편의 울분과 함께 명료하게 터져 나왔다. 언제까지. 대체 언제까지. 남편의 흐느끼는 소리가 어젯밤의 섹스에서 새어나왔던 호흡과 어쩐지 닮은 듯도 해서 그녀는 숨죽여 울었다.

그녀는 그날의 울부짖음이 생생하게 들리는 것처럼 온 몸을 가볍게 떨었다. 그녀의 팔뚝에서 검붉은 피가 뽑히는 것을 바라봤다. 이 피를 쪼개고 쪼개면 그녀의 뱃속에서 아기씨가 살아남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임신테스트기의 두 줄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다. 이번만은 꼭이라는 기대 앞에 더 이상 참혹하게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섣부르지 않기를, 최대한 담담할 수 있기를 그녀는 숨을 골랐다.

"이번에는 꼭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네 시간 후에 전화로 결과 알려드리는 거 아시죠? 조금만 더 힘내세요."

간호사가 한참 동안 생각해서 꺼낸 말이었다. 어쩌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거나 어떤 말을 하더라도 진심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몰랐다. 사실 어떤 말이어도 상관없었다. 상투적인 세상에 기대는 것보다 홀로 묵묵히 감정을 처리하는 편이 훨씬 더 수월했다.

 3.
병원 엘리베이터가 5층에 멈췄다.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사십대 초반쯤 돼 보이는 남자는 문 앞에 서 있던 그녀를 보고 괜한 헛기침을 했다. 엘리베이터가 문이 닫히고 1층에 도착하는 동안 남자는 수시로 헛기침을 내뱉으며 불편한 건지 어색한 건지 모를 심기를 드러냈다. 그녀는 문 옆에 붙여진 층 안내판을 힐끗 봤다.

5층 정액 채취실.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남자는 황망히 걸음을 옮기며 마지막으로 헛기침을 내뱉었다. 5층에서보다 조금은 더 상기된 것 같은 남자의 옆모습이 그녀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남편도 그동안 이곳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여자와 마주치면 괜한 헛기침으로 민망함을 견뎠을까.

난임 센터에 함께 방문해서 처음 정액 채취를 하던 날, 남편은 그녀를 보고 멋쩍었는지 우스갯소리를 했다. 저걸 애로라고, 내 애장품이라도 기증할까봐. 피식대는 남편의 옆모습에서는 왠지 모를 후련함이 느껴졌다. 남편의 굳은 표정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혼 후 일 년이 지나도 애가 들어서지 않았고, 이 년은 넘기지 말자며 총력을 기울이면서부터 남편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져갔다. 배란일인데도 퇴근 시간이 늦어지거나 술에 취해 들어온 날은 예민해져 있는 그녀보다 더 잔뜩 굳은 표정을 지으며 방안으로 휙 들어갔다. 일찍 퇴근한 날에도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시간까지 텔레비전을 보다가 그녀가 잠든 후에야 침대로 돌아왔다.

한 번은 배란일도 아니었는데 남편이 먼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에 들어서자 남편은 팔베개를 내밀었다. 그녀가 팔을 베고 눕자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남편의 입술이 그녀의 귀와 목을 훑으며 그의 오른 손이 재빠르게 잠옷의 단추를 풀어냈다. 그녀도 호흡을 맞추며 남편의 속옷을 벗겼다. 속살을 비벼대는 순간 한번쯤은 시간에 쫓기지 않고 관계의 깊이를 확인해보고 싶었던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의 몸도 조금씩 달아오르며 하체로부터 찌릿함이 올라왔다. 남편의 허벅지를 다리로 강하게 말며 몸을 더 밀착시키자 남편의 몸부림이 더 맹렬해지려는 듯 했다. 그런데 남편은 그 순간 그녀 위로 풀썩 주저앉았다. 그의 몸에 아무런 힘이 남아 있지 않은 듯 불과 몇 초전과는 다른 맥 빠진 모양새였다. 남편의 거친 호흡이 그녀의 머리맡에서 울렸다. 속옷을 주워 입고 침대에서 나가는 남편의 굳은 표정에서 미세한 경련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침대에 남겨져 남편의 빈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알몸이었는데도 그녀의 모든 것이 까발려진 것처럼 초라함과 수치감 비슷한 것이 몰려왔다. 수치감이 한바탕 휘젓고 나간 자리에는 부부라 연결 지을 수 있는 것이 더 남아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꿈틀대고 있었다.

남편은 다음 날 저녁을 먹으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 인공 수정하자.
남편이 그날 밤 확인하고 싶었던 끝에는 무엇이 애처롭게 매달려 있었을까.
엘리베이터를 나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그녀를 누군가가 툭 쳤다.

 4.
남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뭘 그렇게 넋 놓고 있어?"
뜻하지 않게 마주친 남편의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이곳을 드나들은 지난 몇 년 동안 마치 혼자서만 중력의 힘을 다 받은 것처럼 어깨는 말할 것도 없이 눈꼬리와 입꼬리까지 늘어져 있었다. 남편이 이런 꼴로 5층을 드나들었을 생각을 하니 좀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남자를 향해 힘껏 박수라도 쳐줘야 할 것 같았다.

"어쩐 일이야? 아침에 검사 날이라고 해도 듣는 척도 안하더니."
"점심시간 빼서 일부러 온 사람한테 말본새하고는. 밥이나 먹자."
먼저 걸어 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에 대고 그녀는 소리 질렀다.
"검사 잘 했냐고 안 물어봐?"
남편이 돌아서며 건조하게 대답했다.
"요 앞 추어탕 집 괜찮지?"
한두 번 뽑는 피도 아닌데 괜스레 오늘따라 유독 더 어지러운 듯 했다.

점심시간을 조금 넘긴 병원 앞 식당은 한산했다.
텔레비전에서는 방금 들어온 뉴스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하철 환풍구 인명 사고 자막이 대서특필로 연신 노출됐다. 여의도역 지하철 환풍구가 갑자기 꺼지는 바람에 그 위를 걷던 수많은 사람들이 사상을 당했다. 하필이면 사고가 점심시간에 발생하여 거리로 몰려나온 인근 직장인들의 피해가 대다수였다. 족히 4층 높이는 될 것 같은 환풍구의 깊은 구덩이를 카메라는 오래도록 비췄다. 뉴스를 보는 테이블 여기저기서 탄식과 한숨이 터져 나왔다.
"뭐야? 저기 회사 근처잖아!"
남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뉴스를 바라봤다. 그녀도 유심히 보니 사고현장이 남편 회사와 가까운 대로변인 듯도 했다.
"야, 이거 소름 돋네. 나 여기 없었으면 저기 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었던 거야?"
"그러게, 반차 내고 아침부터 따라 왔으면 구덩이에 빠질 뻔했던 십년감수는 안 느꼈을 거 아냐."
수저를 놓으며 빈정대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남편이 물 잔을 툭 내려놓으며 말했다.
"너의 세상은 다 병원 중심이고, 아기 중심이니까. 남편이 처할 뻔했던 위기가 소름 돋지도 않아?"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을 마시며 뉴스를 응시했다. 사고현장을 둘러싼 넥타이 부대 속의 남편을 상상했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먹고 살자는 짓이니 밥이나 먹자며 거리로 몰려 나왔을 것이다.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며 '오늘은 무엇을 먹어야 할지' 정신없이 떠들다가 순식간에 땅 속 깊은 곳으로 떨어졌다. 남편이라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아무거나 먹자며 내심 오늘 나올 혈액검사 결과를 신경 쓰고 있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뜨거운 국물에 밥을 퍽퍽 말았다. 숟가락을 입에 밀어 넣고는 유독 쩝쩝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먹는 모습을 힐끗 바라봤다.

인공수정을 위해 난임 센터를 다니면서부터 남편은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남편의 정자 수에 혹시 이상이 있었던 건 아닐까 했지만 염려해야 할 것은 정자 수가 아니라 남편의 말수였다. 가슴 안의 묵직한 말들을 어떻게 꺼내 놓을지 모르는 사람처럼 남편의 몸은 여러 가지 부산한 소리들을 냈다. 소파에 앉고 일어나며 화장실 문을 여닫고, 물 컵을 내려놓고, 소파위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들이 그녀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소리 좀 내지 말고 먹어."
그녀도 국물에 밥을 말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남편은 더욱 더 요란하게 쩝쩝대며 뉴스를 보고 혼잣말을 해댔다.
"이럴 거면 왜 왔어?"
참다못한 그녀가 숟가락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안 오면? 몇 날 며칠을 예민하게 굴면서 사람 속 뒤집어 놓을 거 아냐."
"꽤나 대단한 일 해주는 것처럼 말하지 마. 이게 지금 나 혼자 살자고 애쓰는 거야? 나 혼자 애 낳는 거냐고."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국물을 후루룩 마시고 깍두기를 우걱우걱 씹으며, 젓가락과 물 컵을 들었다 놨다 하는 부산한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혼자서 애쓰고 있는 것이 맞는지도 몰랐다. 지난 시험관의 어이없는 실패 이후 남편은 눈에 띄게 무기력해졌다. 남편은 집에 혼자 사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아무 말 없이 밥을 먹고, 거실에 앉아 늦게까지 텔레비전이나 책을 봤다. 주말에는 아침 일찍 등산을 나가거나 늦게까지 잠을 자다가 약속을 만들어 밖으로 나갔다.

남편의 빈자리를 보며 그녀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내일은 눈뜨자마자 가구점으로 달려가 싱글 침대를 사서 아이 방에 놓으리라. 그게 여의치 않으면 짐을 싸서 잠시 친정집에서 쉬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날 눈을 뜨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달라질 것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이혼을 위한 수순에 서서히 적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그녀가 지난 달 남편 앞에 내밀던 것은 이혼서류가 아니라 일시가 적힌 메모였다.
정액 채취일, 날짜 예약했어.
그녀의 말에 남편은 입을 벌리며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던 남편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좀 살자!
할 말을 잃은 것은 그녀였다. 얼떨떨해 하는 그녀 앞에서 메모지를 찢어발기며 남편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애가 왜 필요하니. 아니,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게 아이가 맞긴 해?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푹 숙인 고개 위로 남편의 무시무시한 말이 떨어졌다.
난 네가 무섭다.

그녀도 되묻고 싶었다. 우리에게 아이는 왜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 남편이 방문을 꽝 닫고 나가버린 텅 빈 방에서 그녀는 무엇이었을까. 여자도 아니었고, 아내도 엄마도 아닌, 무엇이었을까.

남편은 어느새 국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그녀의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가자. 어떻게 몇 년을… 늘 절절하고 애타게 사니."
남편의 목소리는 진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 켜켜이 쌓아두다 지쳐서 툭 떨어뜨린 것처럼 그의 본심이 슬며시 내비쳐졌다.

 5.
그녀는 시동도 켜지 않은 채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꽂았다.

병원 주차장은 들고 나가는 차량으로 분주했다. 그녀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들이 남편과 함께 차에서 오르고 내렸다. 여자들의 움직임에서 그들 뱃속의 아기씨들을 상상했다. 어느 것은 악착같이 붙어살고 어느 것은 힘없이 떨어져 죽는, 죽음과 생존이 공존하는 주차장만한 세계를 오래도록 지켜봤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집에 가서 한 숨 자. 결과야 어떻게든 나오겠지.

남편이 병원주차장까지 데려다주며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어떻게든 나온다. 결과가 희망적이든 절망적이든 그것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견고하게 둘러진 것 같은 말이었다.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표현을 에둘러대는 남편에게 이번도 실패라는 말을 알려줘야 한다면 어떤 말로 전해야 할까. 당신 말대로 어떻게든 나온 결과가 이번에도 실패야. 라고 해야 할까. 마땅한 말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좀 살자고 외치는 남자를 방에 가두어 억지로 정자를 뽑아내게 한 여자의 죄목이 점점 더 가중되게 느껴졌다. 임신테스트기의 희미한 한 줄이 순간 그녀의 마음을 쩍하고 두 쪽으로 갈라놓는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결과 확인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남편 말대로 집에 들어가 낮잠을 가볍게 자고 일어날 때쯤이면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올 것이다. 아니면 이 곳 차 안에서 지난 육 년간의 시간을 찬찬히 곱씹어보는 것은 어떨까. 남편이 건넨 어려운 숙제, 우리에겐 왜 아이가 필요한 건지에 대한 답을 찾는 시간이라 해도 좋았다. 만약 실패라 하더라도 곧장 병원으로 들어가 아무 미련 없이 그녀의 모든 진료 기록을 불태워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도 아니면 그냥 깔끔하게 이 병원 주차장에서 지금, 증발해버리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그녀조차도 모르게.

그녀는 무작정 시동을 걸어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며칠 째 퍼붓던 비가 아침에서야 그쳤다. 구름 사이로 쨍한 햇살이 삐져나왔다. 축축하게 젖은 도로가 햇빛에 반짝거리며 그녀의 시야를 자극했다. 그녀는 엑셀을 지그시 밟아 속도를 높였다.

휴대 전화가 울렸다. 오랜 시간 그녀의 휴대전화에서 울리지 않았던 진희였다.
"미안해, 한동안 연락을 못 해줬어……. 잘 지냈지?"

진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이전의 통통거리던 밝은 느낌과는 달랐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난 또 연락도 끊고 둘째 갖는 준비에 열심인가 했네."
말을 내뱉는 순간 후회가 됐다. 진희를 보던 시선 이면에 숨어 있던 질투가 무방비 상태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진희에게는 다섯 살 된 딸이 있었다. 진희 남편이 진급을 하면서 형편이 나아지자 둘째를 갖는다며 집을 넓혀 일 년 전에 그녀가 살던 아파트에서 이사를 했다. 이사를 가기 전까지 그녀와 남편은 종종 진희 집에 갔었다. 진희 집에서는 곳곳에서 아이 냄새가 났다. 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며 책에서, 영어 단어가 덕지덕지 붙여진 벽에서도 베이비로션과도 같기도 하면서 희미한 분유 냄새 같기도 한 것이 세미하게 풍겼다. 진희 집에서 아이와 함께 놀고 난 후 집에 돌아오면 그녀의 몸에서도 비슷한 냄새가 애잔하게 풍겨 나왔다. 남편이 어디서 배워왔는지 관람차를 태워주면 아이는 숨이 넘어갈듯 까르르 웃어댔다. 웃는 아이를 만족스럽게 보는 남편의 표정을 괜스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예은이는 잘 지내지? 많이 컸겠다. 요즘은 동생 빨리 만들어 달라고 안 보채?"
"그러게……. 얼른 만들어줘야 하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네."
"왜, 남편 몸 만들어준다고 좋은 거 다 해다 먹였잖아. 남편이 너무 바쁘신가?"
유쾌하게 받아친 그녀의 말에 진희는 대답이 없었다. 예전 같았음 그러게 말이야, 영 시원찮아 라고 되받아쳤을 것이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 조금, 아니다, 많이 라고 해야 하나. 아팠어. 그동안……. 난소암이래."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어리둥절해진 그녀는 속도를 낮추다가 갓길에 차를 멈춰 세웠다. 그녀의 비상등이 깜박깜박 거리며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6.
진희의 전화를 끊고 그녀는 멍하니 앞만 바라봤다. 마치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린 사람처럼.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갓길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낯선 주변을 살피며 이정표를 찾았다. 이정표가 될 만 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은 채 꿈결 속으로 무작정 운전하다가 진희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난소고 맹장이고…… 떼어놓고 보니 속이 허전해서 그런지……. 이전보다 애 갖고 싶은 마음만 더 간절해지는 거 있지…….

전화기 건너편에서 진희 목소리가 못내 쓸쓸하게 느껴졌다. 올해 초 난소암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다행히 한 쪽만 들어냈는데 암 전이를 막기 위해 다른 한 쪽도 항암치료를 받았다.

난소가 건강할 때 난포를 채취해 두고 나중에 이식을 할 생각으로 항암 치료 전에 시험관 시술을 준비했다.

그녀가 어떠한 위로의 말을 했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이전까지 진희는 그녀에게 있어서 상투적인 세계에 불과했다. 이제 여섯 살 된 애교가 한창인 딸이 있었고, 남편과 둘째를 계획할 정도로 제법 관계도 다정한 진희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녀가 진희에게 상투적인 세계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어쩌면 진희는 자신도 시험관 시술을 받는다며 동병상련을 나누자는 가벼운 뜻으로 전화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가 조심스레 전하는 말들이 어쩐지 상투적으로 들릴 것만 같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도로는 그녀의 차외에 통행하는 차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한적하고 고요했다.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도로의 물웅덩이에 희미한 핏빛이 물들기 시작했다. 진희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서 웅얼거렸다. 속도를 높이자 핏빛 웅덩이를 세차게 가르는 사이로 진희의 목소리가 부서졌다. 진희의 소식을 들은 이후 내내 그녀의 것도 들어내진 것처럼 속이 허하기만 했다.

라디오를 켰다. 지하철 환풍구 사고 소식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사상자의 인원이 꽤 늘어나 있었다. 현장 목격자들과 병원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는 환자들의 격양된 목소리가 이어져 나왔다. 어처구니없는 죽음 혹은 그 공포 앞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것인 멀쩡히 라는 단어였다. 환풍구도 처음엔 멀쩡했고, 사람들은 그 위를 멀쩡히 걸어 다녔다. 그런데 그 멀쩡히 로부터 배신당한 사람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분을 토하며 책임을 추궁했다.

과연 멀쩡한 삶들을 살고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남편도 그 속에 포함돼 분노하고 있었다면 똑같이 저들처럼 외쳤을지도 몰랐지만. 죽음 앞에서야 그 모든 삶의 자리가 멀쩡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녀도 말하고 싶었다. 내 삶은 지극히 멀쩡했노라고.

그녀에게는 저들처럼 분노하며 추궁할 대상이 딱히 없었으므로 엑셀만 지그시 밟아댔다. 그 순간 도로의 고인 물에 바퀴가 미끄러지면서 차가 빠른 속도로 큰 회전을 그리기 시작했다. 차 움직임의 반동으로 그녀의 몸이 세차게 틀어지며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밑이 정말 쑥 빠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대한 중력이 위에서 그녀를 강하게 눌렀다.

  7.
정신을 차리니 머리가 핸들에 처박혀져 있었다.

귀와 눈이 멍해진 그녀는 현실감각을 되찾으려는 듯 머리를 조금씩 흔들었다. 팔 다리에도 가볍게 힘을 넣어 움직여봤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잽싸게 배에 손을 갖다 댔다. 차가 미끄러지면서 느꼈던 밑으로 쑥 꺼지는 생생함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사타구니 쪽으로 손을 넣어보았다. 축축하고 미끄러운 것이 만져졌다. 설마, 안 돼. 안 돼. 눈을 떠보았지만 사방이 어두워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어둠속에서 휴대전화를 더듬더듬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더듬거리며 핸들을 잡았다. 핸들 왼편에 라이트 바가 손에 걸렸다. 다행히 전조등이 고장 나지 않았는지 희미하게 앞을 비췄다. 어둠이 그녀의 시야에서 서서히 물러나자 거대한 벽이 그녀 앞에 드러났다.

벽 표면에 나뭇가지 같은 것이 담쟁이덩굴처럼 흙덩어리들을 움켜쥐며 위로 뻗어 있었다. 거대한 흙벽을 뚫고 튀어나온 굵고 억척스럽게 생긴 그것을 따라 위로 시선을 옮기니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 나 있었다. 어딘가로 미끄러져 들어와 거대한 벽에 냅다 박은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방이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구덩이에 빠진 것이었다. 그녀는 구멍 뚫린 하늘을 망연자실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철퍼덕. 바닥에 고인 물이 그녀의 하체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이 구덩이는 무엇이고, 그녀는 어쩌다 이곳에 빠지게 되었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꿈일 것이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꿈인 것일까. 진희 전화를 받고 나서 생각에 잠기다 잠이 든 걸까. 아니면 남편과 헤어져 병원 주차장에서 잠깐 잠에 빠져 들었을까. 아니면 아기를 가질 수 없었던 지난 육년 전부터가 전부 꿈이었을까. 아무래도 좋았다. 어디서부터건 이건 꿈이어야만 했다. 그녀는 뺨을 거세게 치며 소리쳤다.
아-악!
이번엔 몸부림을 치며 길게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악!
그녀의 울부짖음이 구덩이의 벽을 타고 울렸다. 꿈이 꿈쩍하지 않았다. 이 악몽에서 벗어날 때까지 그녀는 계속해서 악을 쓰며 몸을 꼬집고 흔들어 댔다.

온 몸에 힘이 빠진 채 그녀는 바닥에 엎드러져 있었다.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소리를 질러도 세상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대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남편도 그녀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삼십 대 중반 여성의 실종사건이 뉴스에서 보도될 것이다. 여러 추측이 난무하겠지만, 혹자는 조심스럽게 추측할 것이다. 육 년째 난임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신변을 비관한 여성. 너무도 짧게 추려지는 그녀의 삶이 새삼 억울했다.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흐느껴 우는 그녀 앞에서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표정에는 여러 감정들이 섞여 있었지만 그녀는 딱히 어떤 표정이라고 집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손엔 배란유도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매일 밤 자신에 배에 찔러 넣어야 하는 공포에 휩싸여 그녀는 꼼짝 않고 주사기만 내려다보며 울었다. 그녀가 좀 진정됐을 때 남편은 그녀의 손에서 주사기를 뺏어들었다. 주사 바늘 끝으로 뿌연 액체가 방울방울 맺혔다. 남편이 그녀의 상의를 위로 젖히자 허연 뱃살이 드러났다. 그녀가 또 울음을 터뜨리는 통에 뱃살이 요란하게 꿈틀댔다. 쳐다보지 마, 저쪽 보고 있어. 남편의 단호하면서도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남편이 그녀의 배꼽 주변을 꽉 잡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바늘이 그녀의 뱃속을 쿡 찌름과 동시에 스르르 물컹한 것이 어딘가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입 밖으로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음-메.
뱃속부터 끓어오르는 서러움을 내뱉었는데 이상하게 입 밖으로는 젖소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새끼를 낳지 못하는 부실한 젖소에게 야멸차게 주사를 놓고 돌아서는 남편이 말했다.
난 네가 무섭다.

그녀는 바닥에 엎드러져 또 다시 울음을 쏟아냈다. 음-메도 아닌 그렇다고 여자의 울음도 아닌 사람의 부르짖음에 가까운 소리가 구덩이 안에서 공허하게 울렸다.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울음을 쏟아내자 그녀의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었던 순간에 아이러니하게도 살기 위한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제야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바닥엔 발목 깊이 정도의 물이 차 있었다. 벽을 휘감고 있던 나뭇가지 같은 것이 바닥의 물에 잠겨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나무 뿌리였다. 억세게 생긴 뿌리를 더듬다 보니 병원 대기실에서 봤던 바오바브나무가 생각났다. 이 뿌리들을 타고 오르고 오르면 지상위로 거대한 바오바브나무를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지하 깊은 곳, 지구 중심에 다다른 어느 지점에 모인 생명수를 찾기 위해 이 뿌리들은 어두운 땅을 헤집고 또 헤집었을지도 몰랐다.

  8.
도로가 무너지면서 내려앉은 아스팔트와 흙이 둔덕을 이룬 곳에 그녀의 차가 찌그러져 있었다. 건물 3층 높이는 돼 보이는 깊이 아래로 훅 꺼진 것 치고는 상태가 매우 양호했다.

구덩이는 생각보다 아늑한 동굴 같은 느낌이었다. 양쪽으로 길게 조그만 동공이 이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 때 한 동공에서 희미한 빛이 살짝 비쳤다. 입구에 쌓여진 흙무더기가 동공 안쪽에서 나오는 빛을 가리는 것 같았다. 저곳으로 나가면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흙더미들을 손으로 파내기 시작했다. 의외로 부드럽고 물컹한 흙의 촉감에 그녀는 순간 멈칫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흙을 손으로 비집을 때마다 진희가 생각났다.

진희 딸과 키즈까페에서 모래성 놀이를 했다. 아이의 조막만한 손이 조그만 모래 둔덕을 단단하게 다듬고 있었다. 아이의 흥얼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아이가 그녀를 바라보며 또박 또박 말했다. 우리 엄마 배에다 대고 이렇게 노래해주면 내 동생이 나온댔어.
가슴 밑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계속해서 흙을 팠다. 흙더미의 크기가 조금씩 줄어들면서 안쪽으로 텅 비어 있는 동공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의 몸이 비집고 들어갈 만한 구멍이 생겼다. 동공의 폭은 안으로 갈수록 점차 좁아져서 몸을 조금씩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발목까지 잠겼던 물이 무릎까지 차올랐고 앞으로 걸어 갈수록 점점 몸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물에서 끈적한 점액질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동공이 점점 더 좁아지는 탓에 무릎을 가슴팍에 붙여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물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더니 온 몸이 물 안으로 잠겼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무섭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흙을 파내면서 거칠어진 호흡도 곧 안정을 되찾았다. 배꼽 주위에 묵직한 것이 걸려있는 것 같았다. 배꼽에 힘을 주었다가 느슨하게 풀어보았다. 코와 입이 물에 잠겨 있는데도 숨이 쉬어졌다. 이젠 긴 날숨을 뱉지 않아도 속안의 묵직한 것들이 토해내졌다.

물속에서 심장소리가 울렸다.
쿵.쿵.쿵

규칙적인 심박 수의 리듬이 그녀의 몸을 노곤하게 했다. 한껏 몸을 말고는 눈을 감았다. 물 벽이 그녀를 세상과 분리하듯 저 건너편에서의 모든 소음이 잠잠해졌다. 오직 그녀와 심장소리와 물이 내쉬는 호흡만이 있을 뿐이다.

진희가 보고 싶었다. 이 엄청난 얘기를 진희는 믿어줄 수 있을까. 남편은 멀쩡하게 달리던 차가 왜 구덩이에 빠지냐고 물어볼 게 뻔했다. 차 속 어딘가에서 지금쯤 그녀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병원에서 결과를 통보해 줄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확인해야하는데, 나의 아기씨는 무사한 건지……. 졸음이 쏟아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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