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번역과 저작인격권 (하)

[ 법창에비친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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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09일(화) 17:18

서헌제 교수
중앙대 대학교회

 
국내에서 성경 번역과 보급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된 대표적인 두 단체인 대한성서공회와 한국성경공회 간의 저작권 분쟁을 다룬 위 사건에서 원심과 항고심이 저작권 침해 여부에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린 것이 흥미롭다. 항고심은 저작권 기간의 만료로 성서공회는 1952년판 개역성경에 대한 저작재산권은 소멸하지만 저작인격권을 계속 보유하므로 타인이 이를 무단으로 침해(변경)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성경공회의 말씀성경이 성서공회의 1952년판 개역성경의 저작인격권을 침해했고 동시에 1961년판 개역성경의 저작재산권을 침해하였다고 판시했다.

저작인격권(moral rights)은 저작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저작물의 내용을 변경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리키는데, 저작물에 담긴 저작자의 사상이나 감정의 표현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저작자의 인격을 존중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저작재산권(economic rights)은 저작자가 자신의 저작물에 대해 갖는 재산적 권리로서 가령 남에게 저작물을 이용하도록 허락하고 로열티를 받도록 보장하는 권리이다.

말씀성경이 1952년판 개역성경의 저작인격권을 침해한 것으로 보기 위해서는 저작물의 내용과 형식 또는 제목을 무단으로 변경할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원저작물의 동일성이 손상돼야 한다. 그런데 위 판결은 "성서공회는 1952년판 성경에 관하여 저작인격권으로서 그 내용형식과 제호를 변경할 수 있는 영구존속의 권리를 가지기 때문에 성서공회 이외에는 1952년판 성경의 내용을 임의로 변경할 수 없다"고 하여, 동일성 상실 여부는 따져보지도 않고 무단변경 사유만을 가지고 바로 저작인격권 침해를 인정했다.

성경의 번역저작권자가 가지는 저작인격권이란 1952년 성경에 담겨진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신념에 맞는 번역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만일 누구든지 성서공회의 1952년 성경에서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무단으로 변경했다면 이는 성서공회의 저작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디모데전서 6장 15~16절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하늘과 땅의 창조주 되시며, 모든 것의 주권자 되시며, 홀로 한 분이시며, 전능하시며, 영원히 계신분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비해 '하느님'이라는 칭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며 가시적인 '하늘'과 연관된 개념으로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비록 일반인의 눈에는 사소한 글자의 변경 같으나 이러한 용어의 변경은 성서공회가 1952년 성경에 대해 가지는 신앙인으로서의 인격을 침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사례에서처럼 '성신'을 '성령'으로 변경한 것이 성서공회의 신앙인격을 침해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성신이나 성령이나 모두 영어의 'Holy Spirit'과 같은 의미로서 1952년 성경 자체에서도 양자를 혼용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용어상의 변경으로 성서공회의 저작인격권이 침해됐다고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아닌가 한다. 결국 말씀성경은 저작권 침해로 판정돼 간행되지 못하고, 대신 성경공회는 10년에 걸친 성경번역작업을 수행해 2008년 '하나님의 말씀 바른성경'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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