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과 혁신

[ 4인4색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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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09일(화) 16:47

이창연 장로
총회 재정부장ㆍ소망교회

필자가 어렸을 때 장자(큰아들)들은 다 말끔한 새 옷을 입었다. 그런데 밑으로 줄줄이 딸린 동생들은 헌 옷을 입었다. 형제가 많아 대물림으로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사지 쓰봉(모직바지)'으로 된 검정 교복은 둘째까지는 그런대로 입을 수가 있었지만 셋째부터는 색깔이 퇴색돼 검은색이 누르스름하게 빛이 발해 입을 수가 없었다. 그런 옷을 입고 다니면 남이 쳐다보는 거 같아 다들 싫어했다. 염색을 다시하거나 '우라까이(천의 안과 겉을 뒤집어서 다시 지음을 의미하는 일본어)'를 해서 입었다. 그러면 빛바랜 쪽이 안으로 들어가고 빛바래지 않은 쪽이 바깥쪽으로 나와 새 옷처럼 입을 수가 있었다.

한국의 정치도 뒤집어야 한다. 개혁과 혁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한일(韓日)전문가 사이에서 최소한 정치 생산력은 한국이 앞선다는 평가가 많았다. 일본 정치가 무엇하나 결정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반면 한국은 엄청난 갈등 속에서도 어쨌거나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경제 침체도 문제지만 정치의 침체와 무능력은 여야를 막론하고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강인함, 도덕성, 능력, 아무것도 없는 3무(無)정치가 되어 가고 있다.

정치판만이 아니고 종교계, 체육계, 문화계 법조계 모두 개혁과 혁신의 대상이다. 총체적으로 썩었다.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모를 일이다. 국회의원들의 비리, 군인들의 폭행과 괴롭힘, 검찰청 지검장의 이해 못할 행위 등 모두 부끄럽기 짝이 없다. 4대 종단의 지도급 성직자들이 갑자기 '이석기 탄원서'를 들이민 것도 그 간의 이런 격 낮은 멘토링 풍조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더욱 고조시킨 계기가 됐다. 무슨 '양심수'쯤 으로 간주하는 것인가.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종교계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 하고 싶다면 그들에게 면죄를 주려 할 것이 아니고 종교 지도자들이 감싸야 할 진짜 정치범들은 수원구치소에 있지 않고, 북한 요덕수용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종교지도자라고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목소리 큰 그들보다는 목소리 없는 요덕수용소의 무고한 동포들의 목소리가 돼 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개혁과 혁신은 오늘날 많이 사용되면서도 명확한 개념을 구분하기 어려운 용어로 꼽힌다. 개혁과 혁신은 변화를 뜻하지만 내용을 따져보면 큰 차이가 있다. 개혁은 구조의 변화이고 혁신은 담고 있는 질의 변화를 뜻한다. 개혁과 혁신의 다름은 계란의 변화에다 비유해 보자. 계란은 맛있는 프라이가 되거나 예쁜 병아리로 변하기도 한다. 프라이와 병아리는 계란의 변화란 점은 같지만 결과의 질은 전혀 다르다. 프라이는 무생물인 반면 병아리는 생명체다. 프라이의 가치는 시간과 더불어 소멸되는 반면 병아리의 가치는 시간과 더불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프라이와 병아리는 계란이 깨져서 생긴 결과물이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깨지는 방식은 정반대다. 계란이 밖에 힘에 의해 깨지면 프라이가 되고, 안의 힘에 의해 깨지면 병아리가 된다. 즉 밖에서 기존의 틀을 깨뜨리는 프라이는 개혁에 비유되고 안에서 창조적 파괴를 하는 병아리는 혁신에 비유할 수 있다. 혁신은 경제학자 슘패터의 '창조적 파괴'로부터 비롯된 경제개념어다. 혁신은 오늘날 여러 갈래로 새끼를 쳤고 여기서 파생된 혁신은 그야말로 으뜸전략으로 떠오르고 있다. 개혁과 혁신을 해야 한다. 나라 혁신은 정권에 따라 가치가 소멸되고 용도 폐기 되는 싸구려 논리가 아니다. 정부는 나라 혁신을 정치논리로 보려는 시각을 거두고 살기 좋은 나라를 건설하는 데 유용한 논리라는 시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유럽처럼 박물관적 교회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한국기독교도 개혁하고 혁신해야 한다. 바깥에서의 개혁보다 안에서의 혁신이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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