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평범한 옷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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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수 목사 sscc1963@daum.net
2014년 12월 09일(화) 15:32

   
 

한나 아렌트
(감독: 마가레테 폰 트로타, 드라마, 15세, 2014)

'로자 룩셈부르크'를 제작한 폰 트로타 감독이 이번에는 유대계 독일 여성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생애를 조명하는 전기 영화를 내놓았다. 2013년에 개봉된 것이지만 이번에 여성영화제를 계기로 재개봉되었다. 영화는 히틀러 당시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의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납치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아렌트의 생애 가운데 일부를 보여주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여전히 논란이 많은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이 형성되기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중간 중간에 스승인 마르틴 하이데거에게서 생각의 의미와 생각하기를 배우면서 그와 애정관계를 가졌던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이 있지만, 영화가 집중하는 시기는 대략 1960년부터 1964년까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여성 철학자의 전기를 다루면서 얼마든지 호기심을 끌만한 하이데거와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도 폰 트로타 감독은 결코 편한 길을 가지 않았다. 세계적인 철학자였던 하이데거와의 관계는 최소한으로 다루었는데, 아렌트 철학에서 핵심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장면이다. 재판과정의 실황을 삽입한 것에서 복잡한 내용을 쉽게 설명하려는 감독의 친절함을 엿볼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전범재판 소식을 들은 아렌트는 잡지 '뉴오커' 특파원 자격으로 재판에 참관한다.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이히만이 보여준 태도와 자신을 변호하는 진술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끔찍한 죄를 지었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고 또한 아이히만의 주장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상부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기를 서약한 사람으로서 지시에 따라 행동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아렌트의 눈에 비친 아이히만은 오늘날의 관료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유형이었다. 뿐만 아니라 재판 과정에서 그녀는 당시 유대인들을 히틀러에게 넘겨주었던 유대인 지도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책임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글이 '뉴오커'에 게재되면서 이 글은 1963년에 '예루살렘 아이히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아렌트는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여론의 물매를 맞는 것은 물론이고 동족인 유대인들에게도 버림받고 심지어 오랜 친구인 한스 요나스와 쿠르트 블루멘펠트마저 잃을 정도였다. 감독은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구체화하는 과정에 집중하면서, 그녀가 신념에 충실하려는 노력 때문에 많은 것을 잃어야 했고 특히 관계마저도 희생해야만 했음을 부각시킨다.
 
아렌트의 주장에서 핵심은 악은 결코 특별하지 않고 지극히 평범한 옷을 입는다는 것이다.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삶에서 생각을 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악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아이히만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자신이 권위에 복종하도록 서약했고, 그 서약대로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보는 문제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생각은 존재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결국 존재이기를 포기하는 일이다. 이로써 아렌트는 생존을 위해 불의에 타협하거나 침묵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한국전쟁 이후의 사회와 교회에 경각심을 환기하였다. 눈앞의 이기에 사로잡혀 살지 말고 역사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갖고 살아야 할 것을 촉구하였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생각은 역사의 진실을 바로 보고 또 선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현실에 이끌리거나 타협하며 살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진실이 단지 정당의 구호나 교회의 설교에서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살아 숨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고 진실을 선택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옳은 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정신적인 행위, 그것이 생각이다.
 
한국교회는 부당하게 영적 권위를 내세우는 목회자가 많았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아이히만' 같은 성도를 많이 배출했다. 그들의 상호 협력의 결과가 현대 한국교회의 현실이라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목회자 혹은 성도만의 문제라고 볼 수 없다. 교회 문제의 중심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은 항상 그들 모두였기 때문이다.
 
최성수 목사/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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