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을 악덕으로 생각하는 가치관

[ 4인4색칼럼 ] 4인4색칼럼

이창연 장로
2014년 12월 08일(월) 19:02

필자는 요즈음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로 멘탈이 붕괴됐다. 서울강남노회 사태로 전국의 수많은 목사, 장로들이 격려하고 위로하는 전화들이 빗발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지금 한국사회는 되는 일이 없다. 하나의 견해가 제시되면 무작정 반대가 길을 막고 또 다른 정책이 등장하면 자존심 장벽이 에워싼다. 거의 공식적이다. 어떤 사려를 검토하기도 전에 반대부터 들고 나온다. 현안에 대한 중대한 결정은 반대세력에 막혀 한발도 못나간다. 중요한 정책이 시의(時宜)를 놓쳐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치판의 철지난 이념싸움과 다를 게 없다. 노회나 총회가 두 서너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좌우지하는 패거리정치판이 돼서는 안 된다. 진정한 예수님의 본질을 따라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어느 마을에 공동 소유하는 목초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에 적당한 수의 양떼를 풀어 기르면서 큰 문제 없이 먹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욕심을 냈다. 양을 더 많이 들여와 방목했다. 그의 수입이 늘자 다른 사람들도 앞 다퉈 양을 더 방목했다. 목초지는 곧 황폐해졌고 주민들도 망했다. 1968년 생태학자 개럿하딘이 주창한 '공유지의 비극'이란 이론이다.

전국 63개 노회가 장로 노회장을 세우고 있으니 고려할 것으로 기대했다. 단순히 누가 노회장이 되고 안 되고 하는 차원이 아니다. 사고가 문제다. 소명의식이 먼저다. 희생, 양보, 인내, 배려, 관용, 타협 등 인간다운 삶의 본질로 감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은 사람이 순진하고 미련한 데가 있다. 미래는 회색이다. '장미의 이름'의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신작 에세이가 프랑스에서 출간됐다. 그 내용이 상당히 도발적이다. 개인이나 국가란 적(敵)없이 존재할 수 없기에 평화 상태는 기만이나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외부의 적이 없을 때도 내부에서는 수많은 적이 존재한다.

특이한 점은 제목 '적을 만들어라'에서 드러나듯이 적이 없다면 일부러라도 적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가짜 친구다. 친구처럼 위장하여 협조하는 척하다가 상대편에 정보를 제공하고 사태를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민족은 타협하는 것을 굉장히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타협을 죄악시하면 교회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는 심각한 가치관의 혼돈에 빠졌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어느 쪽이 바른길인지의 판단문제는 고사하고 상호 모순되는, 때로는 정반대의 가치관이 한 몸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견을 개별적으로 물어보면 '배가 바다로 가는 것'이 맞다고 하면서 이상하게 총의에 부쳐지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이 요즈음 대한민국 식 총의요, 민주주의다. 정당이나 시민단체나 총의는 항상 이렇게 구성원의 견해와 상관없이 강경하게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노회나 총회는 세금만 축내는 일부 정치인들 하고는 달라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목사, 장로, 서로의 가치관이 문제다. 바울은 교인 간 분쟁 사건을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너희들 중에 문제를 해결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하나도 없느냐. 없으면 차라리 불의를 당하거나 속아주는 것이 낫다"고 권면하고 있다. 새겨들을 일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은 언제쯤 우리 마음에 와 닿을까?

이창연 장로 / 총회 재정부장ㆍ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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