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실종자 수색활동 펼친 잠수사, 정경완 목사

[ 포토뉴스 ] "수색활동 전념하는 것, 사고 가족 위로하는 사역이었다."

임성국 기자 limsk@pckworld.com
2014년 11월 13일(목) 17:14
   
 

"애들아, 추워진다. 빨리 집에 가자. 엄마 아빠 기다리신다…. 수색활동을 위해 들어선 '세월호' 선내에서 매번 기도했다. 실종된 아이들과 유가족들을 위해서(정경완 목사ㆍ41세)"

지난 4월 16일 그 누구도 원치 않던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탑승객 476명을 싣고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관매도 앞 맹골수도에서 침몰했다. 이날 대한민국은 울었다. 아니 멈췄다. 한국교회도 아픔에 울며 애도 분위기를 이어왔다. 그리고 기도했다.

정부는 지난 11일, 200여 일 동안 지속하던 세월호 실종자 수색작업 종료를 공식 선언했다. 참사 발생 209일 만이다. 실종자 발견 가능성이 희박하고, 잠수사들의 안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실종자 유가족도 동의했다. 사망자는 295명, 학생 4명과 교사 2명, 일반승객 등 9명은 끝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1일부로 수색활동을 펼쳤던 40여 명의 잠수사도 진도 앞바다에서 마지막 잠수복을 벗었다. 그리고 울었다. 수색활동에 참여한 정경완 잠수사도 그날로 짐을 쌌다. 산업잠수기능사 자격증을 소유한 정경완 잠수사, 그는 목사다. 본교단 군산노회 양무리교회(홍기표 목사 시무)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는 목사이다.

정 목사는 세월호 사고 발생 9일 후인 4월 25일부터 11월 11일까지 세월호 사고 현장을 지켰다. 온몸과 마음을 세월호 실종자들을 찾는데 쏟아 부었다. 잠수병으로 인해 팔꿈치 통증도 이어졌다. 지칠만했건만 실종된 학생과 유가족의 아픔이 먼저였다. 자신의 아픔보다 유가족의 아픔에 눈물 흘린 날이 더 많았던 이유다.

그는 "지난 5월까지 대단히 많은 실종자를 발견했다. 배 한쪽 구석에 구명조끼를 입고 숨져 있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대부분의 시신이 주먹을 쥐고 있었는데 아마 고통을 참기 위한 마지막 손짓으로 보여 정말 힘들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학생들을 두고 떠나서 미안함 뿐이다"고 했다.

   
 

2007년 호남신대를 졸업하고, 2009년 목사 안수를 받은 정경완 목사네 가족은 잠수사 가족이다. 정 목사는 전북 군산에서 아버지, 작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연스럽게 잠수를 접했다. 넉넉하지 않은 생활형편에 잠수는 용돈 벌이가 됐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 신학교 입학 후에는 본격적으로 기술을 배웠다.

그의 능력을 알았던 것일까. 해경으로부터 순환구호법에 따라 '종사명령'을 받았다.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이었다. 실종된 학생들을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급박한 상황 속에 외면할 수 없었지만 섬기는 교회와 청년들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담임목사는 흔쾌히 허락했다. 청년들은 격려해줬다. 정 목사는 사고현장을 향해 달렸다. 현장에 모인 500여 명의 잠수사 중 실제 투입이 가능한 인원은 소수였다. 정 목사도 그 중 한 명 이었다.

현장에선 잠수사 40여 명이 활동했다. 사고 초기에는 2명의 잠수사가 한 조가 돼 '후카다이빙(표면공급)'으로 수색을 펼쳤다. 수심은 25M 정도다. 물살은 거셌다. 가까스로 선내에 진입하면 수심은 45M로 내려간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지만, 여객선 방, 화장실, 로비 등을 수색했다.

정 목사는 "바다속에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기도했다. 특히 바지선 위에 있는 실종자 가족을 볼 때마다 위로해 드릴 수 없어서 가슴이 찢어졌다"며 "최선을 다해 수색활동에 전념하는 것이 현장에서 가족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역이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정 목사는 세월호가 잠긴 바다속에서, 그리고 복귀 후 숙소에서 기도의 무릎을 꿇었다. 실제로 수색 중 죽음을 맞이한 동료 잠수사들의 현실 앞에 불안해하는 잠수사들의 안전과 건강, 세월호 실종자와 가족을 위해 매일 기도했다. 하지만 정 목사는 자신의 신분을 알리지 않았다. 협력이 중요한 현장에서 수색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편견이 예상됐다. 외형적 신분은 잠시 내려뒀다. 결국, 잠수조와 한 팀을 이뤄 수색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정 목사는 "수색 중반에 접어들면서 교회 청년들이 걱정됐다. 잠수를 그만 접고, 교회로 복귀할까 고민도 했다"며 "하지만 잠수병으로 고생하는 동료를 두고 나올 수 없었고, 9명의 실종자가 있기에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고 했다.

   
 

세월호 실종자 수색은 종료됐지만, 정 목사의 마음은 무겁다.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구부러진 선미 쪽은 수색이 진행되지 못했다. 그곳에 남은 실종자가 있길 기도했다.

한편 정 목사는 수색활동을 위해 마지막까지 헌신한 한국교회, 특히 진도군기독교연합회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정 목사는 "마지막까지 물품과 간식을 공급해 주신 한국교회에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했다. 하지만 아쉬움도 전했다. 자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이 이러한 교회의 노력과 역할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교회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다.

끝으로 사고 현장의 최 일선에서 헌신했던 정 목사는 "한국교회가 세월호를 잊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가 세월호의 아픔에 동참하고, 눈물로 기도하셔서 현장에서도 큰 힘이 됐다. 앞으로도 한국교회는 아픈 자들을 위로하고, 상처를 보듬길 바란다. 신학적으로도 잘 준비해야 한다. 이 일에 함께하겠다."

임성국 limsk@pck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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