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직 청년이라오"

[ 기고 ] 독자투고

한덕순 목사
2014년 10월 22일(수) 09:53

할머니 소리를 처음 들을땐 40대 중반이었다. 어느 해 추석,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고향집을 찾았다. 큰 오빠 딸이 결혼하여 두 아이를 데리고 왔다. 큰 애가 6살 '보라'였다. 가끔 한 번씩 보는 아이였지만 핏줄이 당기는건지 금방 정이 들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보라를 뒤뜰로 데리고 가 그 해 여름성경학교때 많이 불렀던 '바람불어도 괜찮아요'란 노래와 율동을 가르치면서 보라와 더욱 짙은 정감이 들었다.

그 날 저녁 온 식구가 한 자리에 모여 정담을 나누고 있을 때 아까 낮에 고모할머니한테 배웠던 노래를 한 번 해보라고 제 엄마가 딸을 중앙으로 밀어 넣었다. 우리는 박수로 환영하고 보라를 부추기며 칭찬하였다. 보라는 수줍은듯이 손가락을 입에 물고 나왔다.

"준비됐나요?"하니까 낮에 배운대로 허리에 손을 착 갖다 대면서 "준비됐어요"라며 이내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며 발동이 걸렸다. 노래와 율동을 귀엽게 마무리하여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그 후 세월이 20여 년이 흘렀다. 60이 넘으니 세월이 왜이렇게 빨리 가는지 마치 베틀의 북처럼 빠르다. 현재는 60대에서 80에 이르는 노인들만 모이는 농촌교회를 섬기고 있다. 지난 주일 4년 전 늦가을 교회 김장을 하던 날 이웃동네 할머니 한 분이 스스로 교회를 찾아오시어 기웃겨렸다. 우리는 '무슨 일이냐?'며 반가이 맞이하여 김장김치를 한 통 담아 집까지 모셔다 드렸다. 일전에 축호전도를 하러 그 집에 갔을 때 마당 샘가에서 '그런거 안믿는다'고 얼굴도 들지않고 쏘아붙여 말도 못붙이고 돌아온 기억이 뚜렷한 할머니였다. 그 분이 스스로 교회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 분의 연세가 올해 84세이다. 처음 교회 나올 때만 해도 건강하여 예배 시간에 차를 놓치면 곧장 걸어오시어 우리를 놀라게하고 감동을 주었던 분인데 지난 주일에는 기력이 떨어져 보였고 점심식사 때 수저를 들었다가 한 수저도 못드시고 그냥 내려놓으셨다. 맘에 걸려서 월요일 찾아가 모시고 나왔다. 무언가 입맛에 맞는 음식을 드시도록 할 참이었다. 둘 보다는 셋이 가는게 더 좋을 것 같아서 교회의 최고령자인 정 권사님도 함께 모시고 식당에 가서 오리탕을 시켜 포식을 하였다. 할머니도 입맛에 맞는지 오늘은 맛있게 잘 드셨다. 노인 혼자 계시면서 먹는 게 부실하여 건강이 더 안좋을 것 같았다.

이왕 나왔으니 병원에도 다녀오는 게 좋을 것같아 두 분 을 모시고 병원으로 갔다. 진찰실로 들어가 진찰을 받고 설명을 듣고 주사실로 모셔다 드리고 대기실에 앉아 있다가 진찰실을 들어가니 원장님이 필자를 쳐다보고는 "할머니가 두 분 할머니를 거두세요?"라며 빙긋 웃는다. '할머니라…'일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나로서는 그 할머니라는 소리가 익숙하질 않고 귀에 설기만 하다. 거울을 보니 반백이다. 마음은 청춘인데 사람들이 나를 보고 더러는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여보시오 원장선생님! 난 아직 청년이라오.'  집으로 돌아와 얼른 염색을 하니 10년은 젊어보였다. 인생의 훈장인 백발을 반가이 맞으며 기꺼이 동반하리라. 그러난 마음만큼은 난 아직 청년이라고 속으로 외치며 자부심을 갖는다.
 
한덕순 목사 / 청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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