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특집/ 3.교화와 사회의 소통

[ 특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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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7일(금) 15:02

조주희 목사
성암교회

 
한 번은 지역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과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이 분은 저를 만나자 마자 "저는 안티 크리스천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묻지는 않은 질문에 답했다. "저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교회의 존재방식에 대한 불만을 스스럼없이 밝혔다.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교회에 대하여는 신뢰하지 못하거나 실망하는 것 때문에 교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가 언제나 완전한 모습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며 때로는 비판과 반대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교회가 성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비판을 받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분리되어 있다는 당혹스러운 평가는 우리에게 아주 무거운 과제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의 교회에 대한 비판에는 분명히 이러한 측면이 존재한다. 이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 중의 하나로 지역 사회의 소통의 부재에서 그 원인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번은 강의를 하러 갔다가 한 가지 웃지 못 할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교회에서 추수감사주일에 생긴 일이다. 추수감사주일에 감사헌금을 쌀로 하신 분들이 제법 많으셔서 교회에 많은 양의 쌀이 모이게 되었다. 교회가 의논을 하다가 지역 사회에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 좋겠다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쌀을 드리면서 주민과 함께 예배하고 기도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런데 얼마 후 교회 사택에 경운기 소리가 들리더니 '쿵'하고 무엇인가를 내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마당에 나가 봤더니 동네 몇 분들이 경운기에 쌀가마들을 내려놓고 있었다. 물론 교회에서 드린 쌀가마였다. 내려놓으면서 하는 말이 "우리는 이런 쌀 먹지 않습니다. 누가 달라고 했습니까?"하며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이 일은 이 교회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교회는 나름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이웃을 사랑한다는 차원에서 그 일을 했는데 왜 이런 반응이 나타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그랬을까? 그 원인을 쌀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간단한 얘기를 만들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교회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 찾아 왔다. 이 집은 늘 자신의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이 속이 상한 집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람들이 오더니만 쌀을 주면서 예배를 드리자고 한다. 가져왔는데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찾아온 사람들에게 무례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쌀을 받았으니 받은 입장에서 가져다 준 쪽에서의 요구를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예배하자니 어쩔 수 없이 드렸다.

그 분들은 생각할수록 속상하다. 쌀을 가져다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는데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도움을 주었으니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본인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래서 예배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쌀을 주고 예배하자니 어쩔 수 없이 드리긴 했는데 쌀을 예배의 대가로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교회 사람들이 나가고 나니 마음이 속상해 오기 시작한다. 그런 상황이 자신의 가난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니 매우 서러웠다. 이렇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교회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면 크게 잘못된 결정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쌀을 주어야 하는 입장에서만 생각했지 쌀을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소통의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한다. 그것은 소통을 원하고 소통이 필요하다면 소통에 대해서 적어도 '나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방식에서 너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해 왔다. 지역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라는 존재가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진 새로운 존재로 지역 사회에 등장한 셈이다. 당연히 지역 사회에는 교회에 대해서 '지켜보기 입장'의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오직 교회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일방적인 관점을 고집해 왔던 것 같다.

교회가 지역과 소통하기 위하여 맨 먼저 노력해야 할 일은 교회도 지역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다. 교회에게 지역은 선교의 대상이다. 그러나 지역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는 지역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존재들 중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그런 입장에서의 교회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구원을 위한 교회의 노력과 함께 또 하나의 노력 즉 지역 사회의 멤버십을 가진 존재로서의 역할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때 지역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중요하다. 지역 사회와 관계하고 섬기는 일에 있어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들이 있다. 시혜성(施惠的)과 대상화(對象化)의 위험이다. 섬겨도 불쌍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기에 섬겨야 하며 동시에 지역의 다른 공동체들과 함께 섬겨야 한다. 지역은 교회의 이웃이고 교회는 지역의 이웃이다. 그래서 교회는 '지역의 교회, 교회의 지역'이라는 쌍방향성의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역사회는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듯이 교회가 그들의 이웃이기를 원한다.

두 번째는 지역에 대해서 그리고 소통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교회에 대해서는 전문가이지만 지역 전문가는 아니다. 그리고 교회공동체 안에는 교회 안에서만 사용하는 독특한 소통 방식이 있다. 문제는 여기서 일어난다. 교회가 지역과 만날 때에 자칫하면 만남에 있어서 목회하는 방식과 교회 안의 소통방식을 사용하기 쉽다. 이것은 지역 사회가 교회를 낯선 집단으로, 그리고 이기적인 집단으로 바라보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 먼저 교회 안에 소통 구조를 만들어 내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전문성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교회는 전문적인 현대 사회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지역 사회와 만나고 소통하기 위한 여러 면에서의 자기역량 강화가 필요하다.

세 번째는 교회가 지역 사회와 만남에 있어서 교회 단독으로 프로그램들을 실행하기 보다는 지역 사회를 위한 프로그램이라면 지역과 함께 프로그램을 공유하고 함께 실행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시에 지역의 다른 공동체가 하는 일에 교회가 협력하여 그들을 주체적으로 세우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도 교회가 지역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아주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의 공공성 확보이다. 지역 사회는 교회를 바라볼 때 개교회적인 관점보다는 교회 전체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전문가들이나 공교회 기관들과 협력하고 나아가 때로는 그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와서 함께 사역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물론 다른 교회와의 협력과 연대는 필수적이다. 지역사회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공교회성과 전문성의 확보는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이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한 연구소에 컨설팅을 요청하기도 했다. 신학적인 점검과 교회의 계속 교육이 필요하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떠한가? 우리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물인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실까? 교회가 세상을 구원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기 보다는 함께해야 할 이웃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런 관점을 가지면 소통하는 방식과 지역사회 대한 태도와 사역이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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