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으나 다 옳지 않다

[ 논단 ]

서진한 목사
2014년 10월 17일(금) 15:00

서진한 목사
대한기독교서회 사장

사람 사는 세상에는 불합리해 보이는 일들이 많다. 불의한 사람들이 부와 권력을 누리며 호의호식하는 반면에, 선한 사람들은 고난을 겪거나 고통을 당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에 반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시편을 비롯해, 구약성서 여러 곳에서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보며, 하나님께 '왜 얼굴을 돌리셨느냐'고 항의하거나 절규한다.

그런데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 있다. '욥기'이다. '의로운 사람' 욥은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모른 채 참담한 고통을 겪는다. 감내하기 힘든 고통 가운데서, 아내마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면서 욥을 떠나간다. 그 아내의 말은 하나님의 정의가 무너져 내린 현실에 대한 질타이자, 신의 공의에 대한 절망이다.

욥의 '경건한' 친구들 셋이 욥을 위로하러 왔다. 그들은 욥이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받는 벌이므로, 회개하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욥은 동의하지 않는다. 악한 사람들이 더 잘 살지 않느냐, 어떻게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느냐고 항의한다. 친구들은 더욱 강하게 욥의 '불경'을 나무란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시어,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 있기라도 하였느냐?"고 묻는다. 욥의 항의를 생각하면, 동문서답이다. 하지만 그 말에 욥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였다'며 뉘우친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에게도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분노하는 것은, 나를 두고 말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욥의 주장이 옳았던 것이다. 욥의 친구들의 말, 곧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는 그들의 말은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낼 만큼 틀린 말이었다. 우리는 흔히 이웃의 고통을 보면,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삼가야 할 생각이다.

그런데 옳은 말을 한 것으로 인정받은 욥은 도리어 잿더미 위에서 회개한다. 그것은 자신이 작고 보잘것 없고, 하나님의 경륜은 자신이 알기에는 너무나 크고 신비로운데도, 마치 그 하나님의 경륜을 판단할 수 있는 듯, 하나님과 '다투었기' 때문이다. 알지만 다 알지 못하는 것, 옳으나 다 옳지 않은 것, 그것이 인간 존재의 자리이다. 욥기는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이 깨달음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렇다. 내 판단, 우리 판단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그것이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판단이 최종적인 판단이라고 주장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경륜의 영역을 조금도 남겨놓지 않는 불경을 저지르게 되고 마는 것이다. 신앙인으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는 '전적으로 옳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자신들이 전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 이것이 한국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무수한 분열과 갈등의 배후에는 이 '옳음의 확신'이 있다. 절대로 옳기 때문에,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 우리가 절대 '선'이면, 우리를 반대하는 상대는 '악'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과 악의 결연한 투쟁만 남게 된다. 사법당국에 고소하고 법정에서 소송하는 일이 넘쳐난다.

내가 전적으로 옳은 것, 그것은 바리새주의이다. 바리새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민족을 해방하기 위해 율법을 철저하게 지킬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흔히 생각하듯이,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남들에게만 요구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도 율법에 철저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율법을 준수하지 않은 '부정한 사람'들과 식사자리에 함께 앉은 예수님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주장은 절대적인 철칙이 되고 말았다. 극단적인 형식주의이다.

내 생각이, 우리의 판단이, 우리 교단의 결정이 '전적으로' 옳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판단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경륜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를 받아들일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교회의 평화는 여기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화평하지 않으면서 세상에 평화를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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