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슬지 않고 닳아 없어진' 거목 방지일 목사의 한 평생

[ 피플 ] 고 방지일 목사의 일대기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4년 10월 10일(금) 10:47

   
 
한국교회의 큰 어른 고(故) 방지일 목사는 1911년 5월 21일 평북 선천읍에서 방효원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선천신성학교와 평양숭실대학을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방 목사는 1929년 숭실대에 입학했다. 당시 밤에는 일하고, 야학 봉사까지 감당하면서도 정오리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1933년 숭실대 영문과를 졸업한 방 목사는 그해 평양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시작했으며, 1933~1937년까지 평양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시무했다. 평양대부흥의 주역 길선주 목사는 당시 원로목사였으며, 방 목사는 앞을 잘 보지 못하는 길 목사의 손을 잡고 집회를 다니기도 했다.
 
방 목사는 1937년 평양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평양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곧바로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본교단의 파송을 받아 21년간 선교활동을 펼쳤다. 당시 방 목사는 미국 유학 수속까지 마친 상태였으나 총회의 명을 받고 아버지 방효원 목사의 대를 이어 중국선교를 시작하게 된 것.
 
방 목사는 중국에서 사역하며, 다섯 번의 정변으로 인해 숱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중국난민뿐 아니라 한인 교포의 난민까지 돌보면서 수천 명이나 되는 난민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결국 공산당이 정권을 차지하게 되자 총회에서도 철수 지시를 내리고, 미국영사관에서도 마지막 철수하는 배에 탑승할 것을 간곡히 권유했으나 방 목사는 중국 현지에 남았다. 마지막까지 선교지를 지킨 유일한 외국인 선교사였던 그도 결국 1957년 9월 23일 중국 공산당의 추방으로 홍콩을 경유해 귀국했다.
 
귀국한 방 목사는 1958년 6월 영등포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했다. 이후 그는 총회 전도부장, 제4대 한남노회장(현 영등포노회), 제10대 경기노회장, 대한성서공회 이사, 학교법인 기독교재단 이사, 신일학교 재단이사, 유지재단 이사장, 기독공보 사장 및 이사장, 대한성서공회 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본교단과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특히 1971년 9월 인천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총회에서는 제56대 총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총회장 재임시 그는 한국선교 1백주년을 향한 장기계획을 수립하고 준비위원을 선임하는 등 선교 1백년을 향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목사 70세 정년이 이때 가결되기도 했다.
 
1979년 6월 10일 영등포교회의 원로목사로 추대되면서 일선에서 물러난 방 목사는 은퇴 후에도 일년의 반 이상의 기간 동안 전세계 선교지를 다니며 선교에 앞장서는 동시에 후배 선교사들에게 선배로서의 지혜를 전했다. 또한, 1958년부터는 월요 목회자 성경연구모임을 시작해 50년 기간동안 수천 명의 후배 목회자들에게 성경 강해 및 목회에 필요한 여러 요소들을 전수했다.
 
백수를 넘긴 후인 2013년 102세의 나이로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 설교자로 한국교회의 화합과 도약을 강조했으며, 지난해 WCC 제10차 부산총회에서도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설교를 했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100권이 넘는 서적을 출간한 방 목사는 집필가로서도 그 면모가 돋보였다. 특히 그가 펴낸 저서 '피의 복음'은 중국어로 번역돼 중국 가정교회의 교재로도 사용되고 있으며, 1992년에는 성경 66권 강해서를 완간해내기도 했다.
 
'닳아 없어질지언정 녹슬지 않는다'는 좌우명으로 평생을 교회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방 목사는 연세대 제3회 언더우드선교상을 수상하고, 국민훈장 모란장에 서훈되는 등 교계를 넘어 사회에서도 그 업적과 공로를 인정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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