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알렌 선교사와 제중원 - '그 현재적 의미를 찾아서'

[ 목회·신학 ] 알렌 선교사 입국 130 주년 기념 '한국 교회사 특강'

정성한 소장
2014년 10월 06일(월) 19:16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와 살게 된 선교사는 미국사람 알렌이다. 미국에서 의사가 된 알렌은 선교사로 중국에 갔지만, 이미 중국에는 많은 서양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때 그는 중국보다 더 변두리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그 나라에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그는 젊은 아내와 어린 아이를 데리고 당시로서는 변두리인 중국에서 더 변두리인 조선 땅으로 왔다.

1884년 12월 4일 목요일 저녁! 알렌은 평상시처럼 외국인 환자를 진료하고 밤 9시경에 그의 아내와 함께 서울거리를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급히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데 이것이 바로 갑신정변으로 인해 정치적인 적이 보낸 자객에게 온 몸에 칼을 맞아 거의 죽게 된 민영익을 만나게 된다. 민영익을 치료한 이후에도 이 정변으로 서울에 들어와 있던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 사이의 싸움으로 번져,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온 도시와 외국인들은 불안에 떨게 된다. 그래서 서울에 있던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제물포(인천)로 피난을 갔지만 알렌은 여러 가지 인간적인 고민도 있었으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정'하고 서울에 남았다. 변두리는 내 목숨 부지하러 피난 가는 곳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지키며 그 분의 부르심에 대한 뜻을 지키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 땅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못 자리

제중원은 한 개인의 병원도 아니며 왕의 병원도 아니었다. 더구나 선교사들의 병원도 아닌 거룩한 만남의 장소였다. 설립 당시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은 우리나라 전통 의술에서는 할 수 없는 치료를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만남의 장소였다. 서양 의술과 한국 의술, 즉 서양 문명과 한국 문명이 만나는 장소였으며 우리나라 정부와 외국 선교부가 함께 운영하므로 한국 관리와 서양 선교사가 만나는 곳이었다. 선교사와 이 땅의 가난한 백성들이 만나 치료하는 장소였으며, 한국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 치외법권 지역이므로 그 안에서 금지된 예배를 드림으로 선교사와 한국인이 만날 수 있는 법적으로 보장된 유일한 장소였다.

1885년 6월 이후에는 오직 성경만을 강조하며 생겨난 순수한 한국인 중심의 '자생적 신앙공동체'와 '선교사 공동체'가 만나 제중원을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 하나 된 공동체가 '제중원 신앙공동체'이다. 그래서 제중원은 명실상부한 신앙공동체이자 교회의 모습으로 발전해 갔다. 따라서 한국교회사는 토착민 중심의 자생적 신앙공동체나 서양 외국인 중심의 선교사 공동체만으로 형성된 역사가 아닌 것이다.

다시 변두리로 간 제중원 신앙공동체

한국의 초대 교회의 원초적 뿌리는 제중원이라는 건물보다는 남문 밖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에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교회가 제중원과 함께 남문 밖으로 나아갔다는 것은 서상륜으로 대표되는 한국 그리스도인의 지도력 부각도 중요하지만 제중원 신앙공동체의 중심 터전이 서울의 사대문안 중심에서 사대문밖 변두리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넓은 공간을 이동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심장부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철저히 변두리로 가신 예수의 길을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변두리에서 남대문교회가 제중원신앙공동체 속에 꽃눈처럼 배태되어 있던 그 존재를 이제는 세상 속으로 그 자신의 독특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1904년에 구리개 제중원이 남대문 안에서 밖으로 옮겨 올 때에도 '남문밖교회가 남대문밖 세브란스병원 내에'있었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따라 오지 않았고, 홍문동교회가 해체되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남대문 안 지역에 승동교회를 세우고 그곳으로 옮겨갔을 때에도 소수의 신자들만 남대문 밖 지역에 있는 남문 밖 제중원교회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로서는 천민이 주로 살던 사대문 밖, 남대문 밖 변두리로 기꺼이 따라 나와 소수의 신자들이 '남대문 정신'으로 환자들과 이 땅의 민중들을 섬겼다는 말이다.

지금도 고급 호텔과 고층 빌딩들에 둘러 싸여 있지만 남대문교회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서울역 앞에 있다. 중앙으로 흘러 들어오는 입구이기도 하지만, 지방 변두리로 끊임없이 흘러 나가는 출구이기도 한 서울역과 함께 남대문교회는 모이고 흩어져야 하는 한국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대변해 주는 어머니교회로서 아직도 거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성한 소장 / 한국기독교공동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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