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말이 통하는 교회를 위하여 (1)왜 소통해야 하는가

[ 특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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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9월 29일(월) 18:11

이의용 장로
국민대 교수ㆍ본보 논설위원

 
극장 매표소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이들은 과연 조직인가, 아닌가? 두 가지 기준으로 조직 여부를 구분해볼 수 있다.

첫째, 이들에게 공동의 목적이 있는가? 이들에게는 영화를 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건 개인의 목적일 뿐 공동의 목적은 아니다. 공동의 목적, 공동의 가치가 없다면 무리에 불과하다.

둘째, 이들이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소통하며 협력하는가? 이들은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소통할 필요가 없다. 유기적인 소통과 협력이 없으면 군중일 뿐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포도나무에, 우리를 가지에 비유하셨다. 이 비유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 즉 유기체임을 뜻한다. 예수님과 우리는 부품 조립체가 아니라 생명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이 공동체에는 신앙고백을 기초로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공동의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구성원, 구성원과 구성원이 서로 소통하고 협력한다. 이러한 소통을 하지 못한다면 이미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교회 중에는 내부 갈등으로 아픔을 겪는 수가 많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교회 구성원들이 공동의 목적을 잊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목적은 있는데 공동의 목적이 없고, '목표'는 있는데 '목적'이 없는 수가 많다. '목적'은 방향이고 '목표'는 지점이다. 몇 백억 원, 몇 천억 원을 들여 예배당을 짓는 '목표'는 있는데 왜 그것을 해야 하는가 하는 '목적'을 잊고 있다. 지금도 구성원간에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교회들이 있다. 그런 교회들의 공통점은 매우 낮은 수준의 개인 목표를 놓고 싸운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정작 사랑하고 소통하고 협력해야 할 대상을 적대시한다. 더 큰 목적과 가치를 꺠깨닫지 못해서다. 교회가 무엇이고,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아무나 공동체 구성원으로 마구 가입시키다보니 이 지경이 되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해야 소통이 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둘째는 교회 지도자들이 소통능력이 부족해서다. 브라질 월드컵대회 상위 입상팀들에게는 세계적인 스타 선수들이 있었다. 콜롬비아에는 하이메 로드리게스, 네델란드에는 로빈 판페르시, 브라질에는 네이마르, 아르헨티나에는 메시, 그러나 독일에는 그러한 스타 대신 '팀'이 있었다. 독일팀의 구성원은 다양했고 스타는 적었지만 그들의 팀웍은 최고 수준이었다. 팀웍의 핵심은 패스이다. 결승전에서 독일의 볼 점유율은 70%, 패스 성공률은 86%였다. 미드필더 슈바인슈타이거의 패스 성공률은 90%였다. 그들은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교회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교회의 머리로 착각한 채 혼자 결정하고 개인 플레이를 하다가 교회를 멍들게 하는 사역자들이 적지 않다. 구성원들과 패스를 잘 해야 교회 공동체가 강해지고 공동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건강한 교회를 이루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감독으로 모셔야 한다. 감독 자리에 앉은 이들이 다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목적을 확실히 이해하고 목적 달성을 위해 소통하고 협력해야 한다. 얼마 전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여든, 야든 소수의 강경파가 나라를 망친다!"며 불통 정치권을 강하게 비판했다. 필자는 "소통 능력이 부족한 지도자들이 교회를 망친다!"고 말하고 싶다. 모든 갈등하는 교회에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 몇 명이 바위처럼 한결같이 버티고 있다.

사역은 소통 활동이다. 소통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사역을 잘 하려면 먼저 하나님과 소통하고, 구성원들과 소통하고,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소위 '3통(通)'기술을 익혀야 한다. 특히 목사, 장로 등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사역을 하기 전에 이러한 역량을 충분히 구비해야 한다. 소통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사역자로 세우는 것은 공동체에 매우 위험한 일이다.

구체적인 소통의 방법과 기술을 세 개의 키워드로 설명해본다. 첫째는 신(信)이다. 폭우가 몇 일째 내리는 어느 밤. 교도소에서 죄수들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밤길에 도로에서 차를 세워달라 해도 세우지 말라!"고 방송했다. 한 가족이 밤길을 달리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승용차 앞에서 차를 막아 세웠다. 운전자는 차를 세우지 않고 가려고 했지만, 끝내 비켜주지 않자 고민 끝에 창문을 내렸다. 그가 말했다. "저 앞 다리가 끊어졌어요. 위험합니다." 남을 믿지 못하는 사람, 남들로부터 믿음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혼자 운영하려다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믿는 만큼만 소통이 이뤄진다. "모든 것은 돌멩이를 뒤집어보면 알게 된다"는 외국 속담처럼 진정성은 상대방에게 예측 가능성을 제공하고 결과적으로 신뢰를 만든다. 그리고 신뢰는 소통을 낳고, 소통은 신뢰를 낳는다. 공동체로부터 신뢰를 잃었다면 사역의 자리에서 미련없이 물러나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가 산다.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는 데도 자리에 연연해 하는 이들의 심각한 문제점은 공동체의 목적을 잊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심(心)이다. 즉 공감능력이다. 칡 넝쿨과 등나무 넝쿨은 다른 나무를 타고 오른다. 근데 도는 방향이 달라 계속 부딪친다. 그래서 갈등(葛藤)이란 말이 나왔다. 우리나라 사회가 갈등으로 허비하는 사회비용이 연간 300조 원에 이른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 갈등 정도가 OECD 30개 국 중 3위인데, 해결능력은 27위라고 한다. 특히 갈등 원인이 일보다 인간관계에 기인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를 하나의 인격체로 소중히 여기며 받아주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 없이 그 마음을 수용해주는 공감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웃 사랑이다. 다른 사람과의 진정한 소통은 그의 감정 상태와 필요를 읽는 데서 출발한다. 사역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다. 사람에게는 감정이 있다. 감정은 사람의 마음을 지키는 수문장이다. 그 문을 열어야 소통을 시작할 수 있다.

셋째는 명(明)이다. 사역자는 매사에 투명하고 명확해야 한다. 해야 할 말을 분명히 하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교회 사역자들은 재정과 회계 상황을 투명하고 정직하게 공개해야 한다. 사역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권한이나 정보를 독점하지 말고 나누고 위임해야 한다. 제직회, 공동의회를 활성화하여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이뤄내야 한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우리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은 커뮤니케이션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주님을 섬기는 마음이 소통의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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