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신 것은?

[ 기독교교육이야기 ] 기독교교육이야기<7>

장순애 교수
2014년 09월 23일(화) 14:12

대학 1학년 때, 첫 농촌봉사활동을 갔다. 선선한 새벽과 해거름 저녁에는 집중호우로 무너진 농로를 고치고, 무더운 한낮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여름성경학교를 했다. 성경이야기 시간, 불신자가 많은 그 마을을 위해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해서 고른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구연동화의 은사가 있는 한 선배가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하는데, 갑자기 강도가 나타났어요. 강도는 그 사람을 죽도록 때리고, 가진 걸 다 빼앗고, 옷까지 홀라당 벗겨 가지고 가버렸어요. 피를 철철 흘리면서 거의 죽게 된 그 사람이 길가에 버려져 있어요. 마침 그때,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왔어요. 아~ 제사장이에요. 바로 오늘날의 목…." 갑자기 그 선배가 말을 뚝 멈췄다. 그러더니 리허설 때는 분명히 있었던 "목사님이에요"라는 말을 빼고는, 스윽 말을 돌려 이야기를 계속했다.

후에 들으니 그 순간, 그 교회 사모님의 눈이 딱 마주쳤단다. 당황한 사모님이 황망히 손을 젓더란다. 그 순간, 선배는 '아차!' 싶었단다. 만약 그 선배가 원래 준비한 원고대로 제사장과 레위인, 즉 오늘날의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가 버렸다고 했더라면…, 우리 대학부원들이야, '우리가 바로 사마리아 사람처럼 너희들에게 사랑을 베풀러 왔다'고 하고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그 후로도 계속 그 교회를 지켜야 할 그 교회 목사님은 '강도 만난 사람을 못 본 척한' 대표적 인물로 매도될 뻔한 것이었다.

가끔씩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왜 하셨을까?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당한 자를 보고도 못 본 척했다'고 비난하려는 의도였을까? 설사 그렇더라도 그것이 예수님의 제1의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율법교사가 알고 있던 지식 자체는 '맞다'고 하시면서도, "이를 행하라(do this) 그러면 살리라"(28절)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야기를 마치신 후 또, "이같이 행하라(do likewise)"(37절)고 말씀하신 걸 보니 말이다. 이야기를 시작하시기 전과 마치신 후에 거듭 강조하신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1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예수님의 그 제1의도를 알면서도, 가르침의 현장에서 교사인 우리들은 습관적으로 동사(動詞)들을 대충 흘려버린다. 습관적으로 이 이야기를 명사 중심으로만 가르친다. 예루살렘, 여리고, 강도,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 주막주인, 두 데나리온까지. 하지만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가르치시지 않고, 오히려 그가 행한 행동들을 구체적이고 다양한 동사들(보았다, 불쌍히 여겼다, 가까이 갔다, 부었다, 싸맸다, 태웠다, 데리고 갔다, 돌보아 주었다, 내어주었다, 갚을 것이다)로 표현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혹시 교회학교 교사인 우리들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동사(動詞)로 살고,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살아있는 동사(動詞)로 가르치기를 원하셨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장순애 교수 /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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