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특집/ 4.중보적 기도ㆍ치유적 기도

[ 특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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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9월 23일(화) 14:02

이경용 목사
광교소망교회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도를 제대로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기도하려 할 때마다 얼마나 주위가 산만해지고 피곤에 지치는지, 기도를 해본 사람은 안다. 하지만 우리의 현재와 미래가 얼마나 복될지는 기도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그렇다. 기도가 호흡처럼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을 알면서도 막상 기도하려면 기도를 방해하는 핑계 거리가 매우 많다. 바빠서, 피곤해서, 밀린 일부터, 설교 준비부터,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이나 긴급한 전화 때문에 모처럼 기도하려던 일이 종종 무산된다. 그럴수록 더 기도해야 됨을 알지만, 현실에서는 이런저런 핑계만 늘어간다. 하늘 높아가는 가을은 김현승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겸허한 모국어로 기도할 때이다.

몇주 전 정신여고를 정년 은퇴한 한 권사님을 만났다. 대화 중 자연스럽게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분의 중보기도 간증은 퍽 감동적이었다. 40여년 전 여고시절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며 예수님과 교회가 너무 좋아 매 주말과 주일을 교회에서 살았다. 보다못한 아버지가 대학 입학이라는 강력한 카드로 제동을 걸었다. 아버지의 제동을 피하는 길은 새벽에 일찍나가 교회에서 기도하고 그길로 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새벽기도의 주된 기도는 불신가족의 구원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교사가 되어 정년퇴임하는 40년이 지나는 동안 놀랍게도 완고하던 아버지와 형제들이 다 구원을 받았다. 그분은 40년간 계속된 중보기도가 응답된 것을 너무 감사하며 기뻐했다.

가장 대표적인 중보기도는 창세기 18장의 아브라함의 기도다. 소돔의 심판을 하나님이 알려주시자 아브라함의 고민이 시작됐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의인 오십 명에서 열 명까지의 기도'가 시작된다.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기도는 창세기 19장에서 드라마틱하게 응답된다. 성경은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실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 내보내셨다(창19:29)"고 하신다. 롯이 사지(死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살려주셨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마치 인공호흡 같다. 본디 호흡은 자기가 스스로 해야 되지만 응급상황에서는 누군가 인공호흡을 해서 일단 살려놔야 한다.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가 그러했다.

골로새서에서 사도바울은 두 가지 내용으로 중보기도를 한다. 첫째는 골로새교회의 소식을 '듣던 날부터' 골로새교회를 위해 기도했다(골1:9). 가장 좋은 중보기도는 보고 들은 그 시간에 바로 기도하는 것이다. 내일 해야지, 새벽에 해야지 생각하지만, 어느새 기억에서 사라지곤 한다. 중보기도는 미루지 말고 즉시 해야한다. 둘째는 바울이 골로새교회에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한다. 보통 기도는 믿음 좋은 사람이 약한 자를 위해한다. 그런데 그 위대한 사도바울이 작은 교회 골로새 교인들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다(골4:2~3). 이것을 보면 사도바울은 중보기도가 무엇인지 안 사람임에 틀림없다.

필립 얀시는 중보기도를 '넓어지는 동심원'으로 비유한다. 마치 고요한 연못에 돌을 던지면 파도가 점점 넓게 퍼져나가는 것처럼, 하나님 사랑을 중심으로 나에게서 가족으로, 친구로, 이웃으로, 나아가 원수에게 까지 기도가 넓어져가는 것이다. 따라서 중보기도를 통하여 나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기도의 지경이 넓어진다. 우리 중보기도의 대상은 가족, 교인, 한국교회, 나아가 북한 지하교회까지 품어야 할 것이다.

기도의 방향성은 크게 세 방향이다. 위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다. 옆으로 타인을 중보하며 드리는 기도다. 안으로 자기 내면을 성찰하는 기도다. 중보기도에서 다른 사람의 현실적 필요 즉, 병 낫기, 사업, 믿음, 가정 구원 등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 그 사람의 내면을 위한 기도이다. 4세기 교부인 존 크리소스톰은 "네 마음의 문을 찾아라. 그것이 곧 하나님 왕국의 문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감정이다. 감정은 마치 맹장과 같다. 평상시는 있는 둥 없는 둥 별일이 없다. 그러나 맹장이 덧나고 맹장염에 걸리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 조그만 맹장 때문에 사람이 죽어나듯 온몸이 고통을 당한다. 감정도 비슷하다. 감정은 평상시 있으나 없으나 별 문제가 없어 보이나 한번 감정이 상처받고 문제가 생기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다. 사람이 지성이나 의지대로 사는 것 같지만 실제는 감정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다. 따라서 감정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사람의 감정은 좋을 때는 무지개 하늘을 날지만, 감정이 상하면 섞은 생선보다도 더 역겨운 냄새를 낸다. 감정엔 양면성이 늘 있다. 우리 기도의 고민은 늘 감정이 좋은 상태에서 기도할 수 없다는 점이다. 때로는 감정이 상하여 기도할 기분도 아니고 설교할 기분도 아닐 때가 있다. 의무감으로 기도하고 설교하지만 감정이 편한 것은 아니다. 여느 사람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감정의 영향을 매일매일 받는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감정이 상하면 회복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아니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혹시 주변에서 감정이 깨진 그리스도인들이 이전처럼 온전히 회복된 일을 본적이 있는가? 이는 매우 희귀한 일이다. 감정이 치유되지 않기에 겉으론 웃으며 만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낀다.

기도생활과 영성생활의 가장 마지막에 넘어야할 고개가 있다면 무엇일까? 바로 감정문제라 본다. 그렇게 오래 믿고 사귀었던 사람들이 단 한번 감정의 상함 때문에 관계가 깨지곤 한다. 어떻게 하면 상한 감정이 치유될 수 있을까?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감정에 치여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있다. 가인, 사울, 삼손 같은 이들이다. 반면 상한 감정을 이겨내고 더 성숙해진 이들도 있다. 한나, 야베스, 다윗 같은 이들이다. 후자의 특징은 상한 감정을 하나님께 다 토하며 감정기도를 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의 터치로 감정(emotion)이 정감(affection)으로 변하는 경험을 하였다. 마치 땡감 같은 떫은 감정이 홍시 같이 부드러운 정감으로 변화된 것이다. 바로 감정치유기도가 일어난 것이다.

기도의 신비는 기도 중에 정화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죄와 상한 감정으로 얼룩진 영혼이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의 만져주심과 긍휼로 정화된다. 회개를 통한 정화도 있으며,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로 인간의 영혼이 정화되기도 한다. 그 과정은 신비이다. 기도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그 때는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가 역사하는 시간이다. 감정치유기도와 중보기도는 내연(內燃)과 외연(外延)의 관계를 갖는다. 안에서 엔진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힘으로 자동차가 달리듯, 심령 안에서 정화된 영혼이 맑은 기도를 드릴 때, 그 연장선상에서 중보기도가 더 깊게 넓게 퍼져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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