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9월 15~20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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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9월 11일(목) 13:38

월-하늘 문을 바라보자
본문 : 행 12:1~12
찬송 : 261장

앞뒤를 봐도 좌우를 살펴도 도망갈 길이 막혔다면 하늘로 통하는 문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경우 하늘에서 자신을 보여 주신다. 성경에 하늘 문이 열린 기록이 몇몇 있다. 창세기 28장 10-22절에 보면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할 때 빈들에서 잠을 청하며 무섭고 고독한 밤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광경을 보았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28:7)"라며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렸다. 이때 지치고 힘든 야곱을 하나님은 위로하셨다. 하란으로 가는 여정이 힘들듯 우리의 인생길도 결코 쉽지 않다. 지치고 힘들다면 기도하라. 하늘 문을 열고 피할 길을 보여 주실 것이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순교 장면이 기록하고 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했다. 신실한 종 스데반이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적들을 원망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늘 문을 열어 보여 주신 것이다. 주님을 위해 순교하기로 결심한 종들에게 하늘 문을 열고 위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여러분도 동일하게 느끼시길 바란다.
 
스데반이 순교한 후 사울이 회심한 사건이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목격한 사울은 심한 심적 동요를 느끼고 있었다. 돌에 맞아 죽으며 해같이 빛난 얼굴로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였고 자기를 돌로 죽이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모습이 사울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스데반의 행동과 말은 바울을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내가 하는 일이 틀리고 스데반이 맞다면?' 이렇게 생각하니 앞이 깜깜했다. 하나님께서 사울이 심한 심적 갈등을 느끼고 있을 때 하늘 문을 여시어 빛으로 사울을 굴복시켰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를 존중하신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든 우리의 동의를 얻어 자기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피할 길이 막혔다고 걱정하지 말자. 간절한 마음으로 진실하게 기도할 때 하늘 문이 열리며 순교하기로 결심한 신실한 종들에게 하늘 문이 열리다. 잘못된 길에서 회개하며 돌아오고자 하는 영혼에게도 하늘 문은 열린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고난이 닥쳐도 모든 것이 깜깜해도 하늘의 문을 바라보며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현우 목사
/꿈의교회


화-보시기에 좋은 삶이란?
본문 : 창 1:1~5, 31
찬송 : 442장

신자의 삶은 자신과의 관계와 사회적인 관계에서 타인을 의식하는 것 이외에 또 한 가지,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삶은 어떤 것일까?
 
첫째,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닫는 삶이다. 창조가 시작될 때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고 했다. '혼돈'은 히브리어로 '토후'라고 하는데 '아직은 틀이 없다, 형태가 없다'라는 뜻이다. '공허'는 '보후'인데 '비어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은 틀, 형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채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런 상태를 하나님께서 틀, 형태를 세우시고 내용을 채우셨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다스릴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는 우발적이며 즉흥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에 따른 창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창조의 일부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우리의 인생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달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이 되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다. 창세기 1장에 제일 많이 나오는 구절은 "하나님이 이르시되…"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성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장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은 온 우주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었고 지금도 우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은 인간의 창조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우리는 혼돈이 있는 곳은 질서로, 공허가 있는 곳에는 의미와 가치로, 흑암은 빛으로 채워나가는 삶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달아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선태 목사
/대현교회


수-바른 '자기' 발견
본문 : 창 30:25~36, 창 31:1~13
찬송 : 430장

야곱은 누구보다도 자기 중심적으로 산 사람이다. 자기가 삶의 중심이 되다 보니, 자기가 가질 수 없는 장자의 명분을 갖기 위해 아버지를 속이는 일도, 형을 속이는 일도 큰 문제가 되질 않았다. 야곱은 자기를 세우고, 존중 받고, 존재감이 드러나는 길이 내가 나를 잘 가꾸고 주장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결과는 도망자 신세였다. 이때 하나님은 찾아 오셔서 야곱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오늘의 본문에선 예전과 달라진 야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야곱은 라헬에게서 요셉을 낳은 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외삼촌 라반에게 말한다. 요셉을 낳았다는 것은 라반의 집에 거한지 꽤 오래되었다는 말이고 이제 삶이 안정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기를 생각하면 지금이 더 좋지만, 자신의 삶의 호불호를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삶이 된 것이다. 예전엔 다른 무엇을 붙잡아야 자신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야곱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안에서 사는 야곱이 달라진 분명한 삶의 모습은 소유에 대한 태도다. 야곱이 자기 고향으로 간다고 하자, 외삼촌 라반은 더 같이 있기를 바라며 "네 품삯을 정하라"고 한다. 외삼촌 라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이 부자가 된 이유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야곱은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너무도 달라진 모습이다. 야곱은 속이는 자요, 붙잡는 자였는데 이젠 소유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또 하나 달라진 것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다. 사람을 속이던 야곱이 외삼촌에게 엄청난 속임을 당한다. 속임을 당하면서도 그때마다 야곱의 고백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였다. 야곱은 자기를 속이는 외삼촌을 원망하거나, 속임을 당한 것처럼 외삼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울하게 당하는 일'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본다.
 
자기가 자신을 세우려고 할 때, 야곱은 속이는 자였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 안에서 야곱은 속임을 당하는 자이다. 그러나 자신을 속이는 삶의 여정 속에서도 자기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알게 된다. 오직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참된 자신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속임을 당하고 손해를 보는 인생의 곤고함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유현 목사
/태릉교회


목-항상 기뻐하라
본문 : 살전 5:16
찬송 : 421장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사도바울이 가장 먼저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 성경은 왜 이렇게 기뻐하는 삶을 강조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우리의 삶과 인생이 언제나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 항상 기쁘고 평안하다면 굳이 항상 기뻐하라고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 가운데는 여러 가지 질병으로 육체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을 떠나고 싶은 마음도 생길 수 있다. 또한 사업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문제들이 늘 우리를 괴롭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쁨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성경이 항상 기뻐하라고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삶의 환경을 보면 인생은 분명히 기뻐할 일보다는 슬프고, 고통스럽고, 분노할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우울하게 하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우리에게는 그런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만한 힘도 능력도 없다. 많은 한계를 느낀다.
 
그렇다면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기쁨은 쾌락을 추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에 참여해서 참 기쁨을 찾으라는 말이다. 인간이 구할 수 있는 기쁨은 순간의 기쁨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인간의 내면적인 기쁨이요, 영혼의 기쁨이요, 속사람의 기쁨이다. 이것은 일시적인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이다. 육체가 요구하는 기쁨은 계속 갈증을 느끼게 만들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기쁨이다. 그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오는 기쁨이다.
 
"주안에서 기뻐하라(빌 4:4)"고 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주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기쁨이다. 영적인 기쁨은 나의 어떤 일이 잘 풀리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때 느끼는 기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환경이 좋아졌기 때문에 느끼는 기쁨도 아니다. 여기서 기뻐하라는 말은 삶의 환경과 조건과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기쁨을 말한다. 어떠한 환란과 역경 속에도 잃어버리지 않고 빼앗기지 않는 영원한 기쁨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된 구원의 기쁨이다. 그런 기쁨이 아니라면 항상 기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영원한 기쁨이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기쁨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이 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구원으로 인한 영원한 기쁨을 주셔서 항상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동성 목사
/명락교회


금-주님의 마음을 품자!
본문 : 빌 2:5~8
찬송 : 455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초대가 있다. 그것은 십자가로의 초대이다.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로 나오는 것이다. 근데 이 십자가로 누구나 나올 수 있지만 이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특별한 주님의 부르심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이 주님의 부르심(초대)에 응답하여 십자가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다. 이 길은 오직 먼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그 주님의 마음을 내 안에 품을 때 걸어갈 수 있는 길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주님처럼 용서하며 사랑할 수 있고, 주님처럼 십자가로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삶이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로,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로마 1차 투옥 후반 중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본래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종의 형체로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종의 형체와 모양을 잠시 빌린 것이 아니라 종(둘로스)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 우리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처럼 용서하며 사랑할 수 있고, 예수님처럼 십자가로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될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뜻을 품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만 바라볼 뿐 아니라 그 뜻을 품어야 한다. 예수님의 생각과 뜻으로 충만해져야 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몸을 내어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품은 하나님에게 철저한 순종이며 복종이었다. 우리의 삶도 구원의 감격 속에 예수님을 본받아 그 뜻만을 품고 나갈 때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은혜로 승리할 수 있다.
 
셋째,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의 뜻을 품은 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초대를 받은 자들로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선포하는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그 뜻을 품고 주님의 심장으로 섬길 때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며 격려하고, 인정해 주시고, 높여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무엇보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도바울처럼, 우리도 역시 누군가의 좋은 모델이 되게 하실 것이다. 예수님만 바라보며 예수님의 뜻을 품고 그 뜻에 순종하며 나가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높여주셔서 결국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하신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계획,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마음, 주님의 뜻을 품고 살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경숙 목사
/보석교회


토-연약한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
본문 : 롬 14:10~12
찬송 : 453장

멋진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일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함으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악한 세력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이웃과 단절된 관계가 되길 원한다.
 
선교사들이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를 방문했다. 선교사가 간디에게 질문했다. "기독교가 활동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간디는 대답했다. "그리스도인들이지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인해 관계가 깨어지고 필요없는 감정싸움에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지체가 될 수 있을까?
 
첫째,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자. 비판하는 자는 반드시 비판을 받게 되어 있다. 로마서 14장 1절에 '믿음이 연약한 자'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유대계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의 방식대로 고기와 포도주를 여전히 먹지 않고 신앙생활을 했다. 사도바울은 이들이 믿음이 연약해서 그런 것이니 업신여기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자신과 같지 않으면 평가하고 비판한다. 비판하고 업신여기는 기준이 '나'이기 때문에 문제다. 예수님이 기준이라면 나의 눈에 못마땅하다고 해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둘째, 자백함으로 회복되라고 하신다.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고 했다. 잘못된 것을 자백하면 관계가 좋아진다. 매일 같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잘못된 것을 자백하지 않아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을 자백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 직고하라고 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다. 어릴 때부터 서로 비교하며 자신이 조금 나아 보이면 교만하고 조금 못해 보이면 주눅 들고 괴로워한다. 여기서 '직고'라는 말씀은 계산한다는 의미이다. 말씀에 따라 계산해 볼 때 바르게 살아가는가를 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속의 기업이 되어 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함께하는 행복한 삶이다. 연약한 형제들을 세워주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자백함이 기쁨이 되게 하시고, 날마다 하나님께 직고함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장봉림 목사
/신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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