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과 섬김

[ 논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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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8월 26일(화) 14:59

육근해 관장
한국점자도서관ㆍ왕십리중앙교회 권사

신구약 성경 전체의 핵심은 주님을 사랑하듯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독생자 아들까지도 내어주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고 그런 사랑을 우리는 이웃에게 베풀라는 것이다. 사랑! 그것은 실천적 의미로는 나눔과 섬김을 뜻한다. 그러하기에 기독교인이라면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렇지 못할 때 지탄을 받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장애인을 대상으로 이런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세가지 관점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첫째, 나눔은 동정이 아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어느 사보에서 '자원봉사를 하러 온 단체가 기관 건물이 자신들의 집보다 더 근사하다며 기분이 언짢아서 봉사하러 왔다가 그냥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봉사를 한다는 것을 나보다 꼭 못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장애인을 대함에 있어서도 동정심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있다. 그저 불쌍해서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정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 사람의 인격은 무시하게 된다. 같은 동격에서 내게 있는 것을 나눈다는 것과 내가 가진 것을 준다는 것의 의미는 차원이 다르다. 어떤 시각장애인이 이런 말을 했다. "봉사라는 말을 했을 때는 이미 그 본질적인 의미는 퇴색되고 맙니다. 내가 너에게 무언가를 해주겠다는 것은 위와 아래의 관계인 수직구조가 돼버리는 것이지요"라고. 동정에서 시작한 봉사나 후원은 받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둘째, 진정한 섬김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장애인기관을 찾아 봉사하러 간다. 그런데 그런 장애인기관이 자신이 사는 집 옆에 건축한다고 하면 반대를 한다. 내가 봉사를 하러 가지만 우리 집 옆에 장애인기관이 들어오면 내 집 가치가 떨어지고, 우리 자녀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까 해서라 한다. 봉사하러 가는 마음과 내 집 가치에 대한 마음은 하나가 아닌 것이다.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 문제만큼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사회복귀를 위해서는 지역복지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지역에 복지관이나 그룹 홈을 많이 설치하게 되는데 항상 대두되는 문제가 지역주민들의 "여기는 안 된다!"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 시각장애인 가정이어서 전세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어머니가 하시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 장애인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주인들이 방을 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진정한 섬김이란 자신에게 손해가 있을지라도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것이다.

셋째, 가식이 없는 섬김을 해야 한다.

7, 8월이면 한국점자도서관에는 자원봉사를 하겠다는 학생이 줄을 선다. 자원봉사가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들어가게 됐을 때 좀 의미 있는 자원봉사를 시켜보겠다는 차원에서 시작한 학생들의 자원봉사는 점차 변질돼 가고 있다. 성의 없이 시간 때우기 식의 봉사, 부모가 대신하는 봉사, 후원금 몇 푼으로 봉사 확인증을 받으려고 하는 등 참다운 봉사는 어디가고 그저 종이 한 장 받기에 급급한 봉사가 늘고 있는 듯하다. 그보다 더 마음 아픈 것은 기독교 지도자들도 이런 일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봉사하고 헌신하고자 하면서 정작 사회가 원하는 봉사는 실제 봉사와 관계없이 종이 한 장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가끔 나는 청탁을 받는다. 정치인이나 친척은 그렇다 치고 아는 목사님이나 신앙인들이 확인증을 좀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정중히 거절한다.

이제부터 기독교인들의 나눔과 섬김이 바뀌기를 소망한다. 진정 장애인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한 일에 앞장서 세상 사람들을 향해 소리쳐 주기를 바란다. 내게 있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고 나누는 것이며, 형식적이 아닌 진심을 담아 섬기고 사랑하라고 말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이런 모습에 나눔과 섬김의 의미가 바뀌어 지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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