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의 이해와 대응 (3)선교와 안티

[ 특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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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8월 26일(화) 14:30

선교의 출발, 타문화에 대한 존중

이재한 목사
총회파송 터키 선교사

 
거의 20년만에 첫 안식년을 보내며 한국교회를 접하고 있다. 과거 한국 사회의 교회에 대한 인식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 서울의 산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필자는 동네에 심방대원들과 함께 목사가 들어오면 교회에 다니지 않던 아주머니들도 길을 터주며 나름대로의 존경을 표시하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존경받는 목사가 아니라 '먹사'라는 조롱거리가 되었고, 선교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의 해외선교 활동에 대해서 사회가 관심을 보이게 된 계기들이 있었다. 그 첫째가 2004년의 김선일씨 사건이고, 둘째가 배형규, 심성민 씨가 납치 살해된 2007년의 아프간 피랍사건일 것이다. 이 두 사건을 대하는 국민들의 정서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생긴 일'이라기보다는 '교회가 무리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생긴 일'이라는 쪽이었다. 반면에 '아덴만 여명 작전'이란 군사행동으로 마무리 된 2011년 소말리아 해적에 의한 피랍 사건을 대하는 국민들의 태도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비슷한 피랍 사건에 대해 국민들의 이런 이중 잣대는 충격적이긴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때의 국민 정서는 '예수 믿으면 다 잘된다고 하더니 어떻게 된거야?'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이것을 선교와 연관지어 본다면, 선교 활동에 대한 안티의 증가 원인은 첫째가 교회와 사회의 관계이고, 공격적 선교같은 선교의 방식 문제는 두 번째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사회 속에서 제 역할을 외면한 채 제 집 짓기에 몰두하면서 안티 문제를 해결 방법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기도 하지만 국내에서 온갖 형태의 모멸을 당하고 있는 교회의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방적인 안티들의 선교에 대한 공격은 더욱 거세질 것이 뻔하다. 해결책은 이것이다. 선교지와 선교가 하나가 되는 것이고, 이 일치를 통해 교회는 또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를 위한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선교로 그 영역과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소외되고 그늘진 구석을 찾아내 밝혀주고, 절망과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는 일은 선교의 수단이 아니다. 이것은 복음의 실존이고, 이 실존이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선교의 순기능이며, 한국교회가 사는 길이다. 만약에 선교조차도 자기 세력을 불리는 일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는 마지막 설 땅마저 잃어버리게 될것이다. 이제라도 교회는 낮은 곳을 고향삼아 찾아가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십자가에 입혀진 금박을 벗겨내고 세례 요한 처럼, 예수님처럼 거친 옷을 걸치고 맛없는 음식을 먹으며 대중을 위로하는 중보자가 되어야한다.

안티들의 좋은 먹잇감이 된 선교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면 단기선교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하지 않을수 없다. 필자는 선교를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생명을 전하는 일체의 행위'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선교는 타문화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그 시작이고 끝이다. 이것이 빠진다면, 아무리 사람을 많이 모으고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지었다고 해도 그것은 선교가 아니다. 선교가 아니면 예수와 상관없는 일을 위해서 예수의 이름을 팔아먹은 꼴이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의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많은 권능을 행했답니다"라며 자랑스럽게 주님을 찾아왔다가 쫓겨난 이들이 다름 아닌 우리들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단기선교는 태생적으로 대단히 큰 리스크를 안고 있다. 아무리 현지 문화에 대한 사전학습을 진행한다고 해도 그 이해는 부족하기 마련이다.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자연스럽게 문화 충돌이 일어날 것이고, 충돌이 일어날 때 누구나 자기 방어, 즉 자기 문화를 중심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단기선교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상황을 일으킬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안고 시작된다는 말이다.

또한 선교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맡겨진 사명이지만 실제로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선교는 장시간 준비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하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바늘 하나에 터져버릴 고무풍선 같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어서 3년의 공생애를 위해 30년을 준비하셨겠는가. 물론 선교는 물질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하는, 또 해야한다는 데 온 몸과 마음으로 찬성한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나이 40이 다 된 선교사 지망생들이 합숙훈련을 받고 언어를 배우고 하는 것이리라.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기에 불가능한 일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준비가 없어도 다 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자기 기만이며, 하나님과 교회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단기선교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이러한 리스크가 있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훈련하며 선별해서 소수라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보낼 때에도 장기 사역자와의 충분한 교감으로 현지인의 입장에서 그들을 좀 더 잘 섬길 수 있는 시간과 프로그램을 가지고 해야 하는 일이다. 여름방학만 되면 아시아의 공항들에는 마치 한국어가 공용어가 된 것처럼 여기저기서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을 찾는데, 선교에 자원하는 사람이 많아져 감사한 일이지만 양적 팽창이 곧 부흥이라는 생각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참으로 등골이 오싹할 뿐이다. 예수님께 "난 너를 모르겠는데…"라는 말을 들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두 번의 사건이 모두 단기선교와 연관이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이제 정리해 본다. 이 모든 상황의 뿌리는 무엇일까?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교회는 그 변화에는 둔감한 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경계가 아주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SNS, 스마트폰 등의 대대적인 확산으로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경계가 허물어진지 오래 되었지만 교회는 이런 인식조차 없으니 안티들에게 교회의 치부를 여과없이 드러내게 되었다. 전에는 교회만의 고유 영역이었던 것이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적인 영역으로 바뀐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이다. 교회의 일은 이제 더 이상 교회와 교인만의 영역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터키 갑바도기아에는 괴레메라는 지하도시가 있고, 그 안에는 교회로 쓰이던 십자가 형태의 동굴이 있다. 한국의 성지 순례단이 여기서 통성기도를 드리는 통에 여러 사람이 곤란을 겪는다고 한다. 그곳은 기독교인들을 위한 기도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기로 한 공적인 영역이다. 이런 행위는 헌신도 믿음도 아무 것도 아니라 기득권의 주장에 불과해 보인다. 교회의 이런 독선적이며 안하무인격인 태도에 세상은 질렸고,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아파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하던 한국교회는 어디로 갔을까? 이제 우리는 사회의 변화를 읽으며 그들과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속적 흐름은 거스르되 변화는 정확히 읽고 이 변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지 고민하며 다가서야 한다.

안티는 빛만 들어오면 안개같이 사라지는 어둠과 같은 것이다. 빛이 비추어져 안티가 배양될만한 환경만 사라지면 된다. 필자는 선교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 본다. 선교란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타자에 대한 존중과 이해 그리고 낮아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토양과 빛 가운데서는 그 어떤 안티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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