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방법

[ 성서마당 ]

김병모 교수
2014년 07월 25일(금) 11:37

김병모 교수
호남신학대학교ㆍ신약학


유대인은 능력을 추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추구했다. '능력'은 유대 사회에서 최고의 것으로 인정받는 것을 가리키고 '지혜'는 헬라 사회에서 최고의 것으로 인정받는 것을 가리킨다. 즉 모두 자기 사회에서 최고의 것으로 인정받는 것을 추구했다는 말이다. 세상의 것이 전부인 줄로 아는 세상 사람들이야, 이렇게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하늘의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을 추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랬다. 그들은 그 사회의 기준으로 능력 있고 지혜로운 목회자(설교자)를 선택하고 그와 더불어 자신들도 능력 있고 지혜로운, 즉 그 사회에서 인정받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했다. 그들은 강하고 담대하고 확신에 찬 목회자의 모습, 수준 있는 어휘와 현란한 어투와 설득력 있는 논리로 구성되는 설교 방식, 그 사회에서의 성공을 중시하는 설교 내용을 높이 평가했다. 우리도 이런 설교자, 이런 설교 방식, 이런 설교 내용을 높이 평가하는 점에서 고린도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5절에서 설교자의 모습, 설교 방식, 설교 내용과 관련하여 아주 특이한, 아니 아주 의아한 말을 한다. 그의 설교 내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초점을 맞췄다(2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맞추었다. 이런 내용을 전하기 위해 그가 취한 방식은 말과 지혜같은 온갖 전달 기술이 아니었다(1절). 그저 성령의 역사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내용을 있는 그대로, 평범하게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런 내용을 이런 방식으로 전달하는 그 자신의 모습도 '약하고 두려워하고 떠는' 모습이었다(3절). 이 세 요소의 관련성 내지 공통성은 무엇인가? 바로 '약함'과 '어리석음'이다. 그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셋 다 능력도 지혜도 없다. "하나님은 약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복음이 약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평범한 설교자에 의해, 약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평범한 전달방식으로 선포되고 있다.

바울은 왜 이런 복음을 전할 때에 이런 모습, 이런 방식을 취하는 걸까? 그것은 교인들의 믿음을 '사람(설교자)의 지혜' 위에 세우지 않고 오직 '성령(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우기 위해서다(4~5절). 소위 강한 모습의 설교자가 소위 탁월한 전달 방식으로 소위 "당신도 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외치는 말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의 믿음의 토대는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사람의 지혜에 놓이게 된다. 이와 반대로, 약한 모습의 설교자가 평범한 전달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당신도 이 사회에서 그 분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고 말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의 믿음의 토대는 성령의 능력에 놓이게 된다. 과연 어떤 모습의 설교자가, 어떤 내용의 설교가, 어떤 방식의 전달이 사람들에게 성령의 구원하는 역사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일까?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고후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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