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론(神正論)의 진정성

[ 논단 ]

금주섭 목사
2014년 07월 25일(금) 11:29

금주섭 목사
WCC 선교국 총무

최근 낙마하신 총리 후보자인 어느 장로님의 간증이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다. 한쪽에서는 그의 왜곡된 역사의식을 질타했고 또 한쪽에서는 기독교적 역사인식의 특수성을 간과한 언론의 마녀 사냥의 희생양으로 보았다. 세월호 사태에서도 언론은 목회자들의 일부 발언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러나 민족적 고난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로 이해하는 신명기적 역사관은 기독교 신앙전통에서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신앙적 언어의 특수성이 어떻게 공적인 공간에서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냐는 것이다. 물론 설교와 간증은 기독교 신앙인들을 청중으로 하기 때문에 특수한 기독교적 용어와 개념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고 이를 일반 시민들이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사회는 우리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특수성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설교는 기독교 종말론적 언어로 가득 차 있는데 왜 오늘날까지 살아서 영향을 미치는가? 이해인 수녀의 시는 그 주제가 온통 신앙인데 왜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애송하는가? 교황 프란시스의 언어에 왜 교회로부터 등을 돌렸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가? 어쩌면 지금 사회로부터 오는 교회에 대한 세찬 비판들은 우리들의 언어를 왜곡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오히려 우리가 말하는 신앙의 특수성을 제대로 갖추라는 도전일지 모른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에 대해 똑바로 증거하라는 비판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을 직접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 성육신 하신 분이다. 우리가 만날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셨다. 따라서 우리가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도 교회 안에서만 살아 있는 우리들만의 언어가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육신을 입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유치원 어린이들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누구나 쉽게 읽고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가 전하는 기독교적 역사이해가 이렇게 많은 비판을 몰고 오고 교회를 위축시킨다면 어딘가를 반드시 고쳐야 한다.

신명기적 역사서에 나타난 변증적 신정론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역사적 심판이 그 종국적 관심이 아니라 파국적 현실에 대한 해답을 야훼 신앙에서 찾고자하는 몸부림이며 그 종국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재발견이 있다. 그래서 일제 식민지배도, 세월호 사건도 우리들의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심판 뒤에는 더 큰 은혜가 기다리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신명기적 역사서를 발전시킨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기 전에 자신들의 불신앙을 먼저 고백하였다. 그리고 요시아의 철저한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신명기적 역사관의 진정성이 확보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으며, 우리의 기득권은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며, 눈앞에 닥친 민족적 불행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자학적 조롱으로 들리는 것이다.

주님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세상으로부터 문을 굳게 잠구었다. 그때 주님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문을 열고 나가라고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파송하셨다. 그 주님께서 오늘도 한국 교회를 향해 "두려워 하지 말라.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 지어다" 축복하시며 당신의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신다(요20:21~22). 우리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신다.

선교는 교회가 세상을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오늘날 교회에 대한 세상의 비판이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숨결(성령)의 능력으로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 설수 없는 생명들을 어딘선가 손잡아 일으키고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신앙적 언어의 특수성이 사회와 역사 속에서 보편성과 진정성을 획득하는 길은 우리의 고백이 주님께서 생명을 다하기까지 보여주신 그 희생적 사랑을 담아낼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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