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은사

[ 성서마당 ]

김병모 교수
2014년 06월 30일(월) 18:48

누가 성령의 은사자인가?

김병모 교수
호남신학대학교ㆍ신약학

우리 사회는 '영적 현상'이라면 무조건 인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어느 종교든지 소위 '용하다'는 사람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어떤 때는 그곳이 내 종교에 속한 곳이냐 아니냐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불교인도 그런 교회나 기도원을 찾고, 기독교인도 그런 사찰이나 점집을 찾는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영적 은사' 문제를 다룬다. 그는 먼저 어떤 영적 현상이 하나님의 영인 성령과 관련이 있는지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예수는 저주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거룩한 영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이 주님이시다'고 말할 수 없다."(12:3) 모든 영적 현상이 다 하나님의 영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영적 현상만이 성령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 은사인 'pneumatikon'을 추구하되(12:1), 오직 성령과 관련이 있는 'pneumatikon'만을 추구해야 한다. 이 pneumatikon은 남성복수일 수도 있고 중성복수일 수도 있다. 남성이라면'영적 은사자들'을 가리키고, 중성이라면 '영적 은사들'을 가리킨다. 즉 단지 영적 은사자나 영적 은사라고 해서 그 사람이나 그 현상을 무조건 인정해서는 안 되고, 그 사람이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에만 그 사람과 그 현상을 성령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왜 이런 영적 은사들을 주실까? 한 마디로, '유익'을 위해서이다(12:7).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유익은 은사자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 즉 교회공동체의 유익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은사자와 은사는 당사자를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14:12)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정적이라고 해서 더 큰 은사자이거나 다른 은사들보다 더 화려하다고 해서 더 큰 은사가 아니라, 오직 교회를 세우는 은사자만이 성령의 은사자이고 오직 교회를 세우는 은사만이 성령의 은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13:1~3에서 아무리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이적을 행하더라도, 만약 교회공동체의 형제 자매를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 은사 사역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적잖은 '은사자들'이 교회 안팎에서 활동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다 인정해야 할까? 아니면 그 은사를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오직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만을 인정해야 할까? 자신을 세우는 사람은 성령의 은사자가 아니다. 오직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사람만이 성령의 은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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