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도회 작은자복지재단 설립

[ 작은자가행복한세상 ]

이승재 국장
2014년 06월 30일(월) 18:31

농촌의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어린이들이 줄어들고 반면 노인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 1984년부터 독일 KNH의 지원을 받았던 영송유아원과 학생의집도 더 이상 운영 될 수 없게 됐다. 본부와 영송의 김창렬 목사는 이 문제를 논의하던 끝에 독일 KNH본부에 1994년까지 지원이 지속될 수 있도록 요청하면서 적립된 금액으로 노인시설을 준비할 수 있도록 요청을 했다. 독일로부터의 긍정적 답변을 듣고 영송교회에서는 젖소를 사서 키워 시설준비에 보태기로 했다. 독일의 후원이 종료된 다음해인 1995년 60평 1층 슬래브건물을 짓고, 노인양로원 호남작은자의집을 운영하게 됐다.

작은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두 가지의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하나는 재정적인 부담이었다. 결연사업과 연곡작은자의집(現, 요셉의집), 호남작은자의집이 운영, 행정비 증가에따라 모금되는 금액에 비하여 지출에 대한 부담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두 번째는 경제적 뒷받침이 부족해지는 원인도 있겠으나 시설에 입소한 분들에 대한 서비스의 질이 저하되는 현상이었다. 이에 이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사회복지법인을 만들어 두 시설의 운영비를 정부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1996년 연곡작은자의집(1989년 설립)을 통해 법인 설립 조건을 맞추려 하였으나 보증금처럼 따라 다니는 3억원의 예치금이 없어 1차 포기해야 했다. 당시 작은자복지선교회는 모금되는 후원금의 전액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기에 때문에 적립된 금액이 5천만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법인인가를 진행하던 계획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이듬해 4월 황화자 총무가 병세가 악화 되더니 끝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작은자운동은 잠시 멈추어지는 듯 했으나 1998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위치한 호남작은자의집을 노인양로원으로 법인설립을 다시 시작했다. 보성군에서의 회신은 서류는 가능하나 법인으로서의 시설 수용규모가 50명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본회에서는 그동안 적립된 기금과 작은자복지선교회의 모든 노력을 다하여 50명 입소가 가능한 2층 건물을 짓고, 법인기본재산 현금도 5천원원으로 하여 1999년 10월 25일 법인설립 허가를 득하였다.

당시 연곡작은자의집은 1992년 작은자복지선교회와 여전도회가 병합되면서 본 교단 총회산하 사회복지법인 자선사업재단(現, 한국장로교복지재단)에 신탁하여 운영하고, 추후 사회복지법인이 세워지면 다시 환원하기로 하여 본 재단의 법인 시설에서는 제외되어 정원 50명의 노인양로원 호남작은자의집을 통해 '사회복지법인 예장여전도회작은자재단'이 설립되었다. 이후 2005년 7월 법인의 명칭을 '예장여전도회작은자재단'에서 '여전도회작은자복지재단'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법인이 설립되면서 두 가지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으며, 작은자복지선교회의 결연사업과 각종 행사와 모금 그리고 사회복지법인을 통한 시설운영 사업은 계속 진행되었지만 법인내의 조직은 계속 변화를 거듭했다. 2006년 7월 1일부터 작은자복지선교회의 기존 사업을 법인사업으로 편입하고 여전도회전국연합회 내에 '작은자복지부'를 설립하여 작은사랑저금통, 67연합회 사업비 분담금, 법인 및 시설지원, 밑반찬, 도배 지원사업 등의 일부 사업이 진행되도록 하였으나 한 지붕 두 가족의 모습을 계속 가지고 있다.

사회복지법인 설립은 작은자운동이 선교회 차원을 넘어 정부의 복지정책에 부합하도록 하였는데, 시설을 중심으로는 정부보조를 통한 작은자 섬김이 이루어졌으며, 시설 외적으로는 작은자복지선교회의 사업을 이어받아 국내의 빈곤, 결손가정 청소년들에게 생활비 및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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