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생활비

[ 성서마당 ]

김병모 교수
2014년 06월 03일(화) 13:22

김병모 교수
호남신학대학교ㆍ신약학

오늘은 목회자의 '생활비'(보통 '사례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 글에서는 논의의 특성상 '생활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적게 받는 목회자는 부끄러워 하고, 많이 받는 목회자는 자랑스러워 한다. 목회자에게 생활비를 적게 지급하는 교회는 미안해 하고, 많이 지급하는 교회는 뿌듯해 한다. 반면에 일각에서는 자비량으로 사역하는 목회자도 있고, 그것을 선호하는 교회도 있다. 목회자의 생활비에 대해 목회자와 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이와 관련된 문제를 다룬다.

첫째로, 교회는 목회자에게 생활비를 지급할 책임이 있고, 목회자는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을 권리가 있다. 일반적인 삶의 이치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즉 당연히 군인은 의식주를 지급받고, 포도를 심은 농부는 그 열매를 먹고, 양을 기르는 목자는 그 젖을 마신다(고전 9:7). 율법도 그렇게 말한다. 즉 곡식을 떠는 소는 그 곡식을 먹고(9절),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은 성전의 것을 먹고, 제단에서 일하는 사람은 제단의 것을 먹는다(13절). 주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즉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그 일로 먹고 산다(14절). 이렇게 일반적인 삶의 이치도, 율법도, 예수님도 교회의 책임과 목회자의 권리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둘째로, 어느 정도의 생활비를 지급하는 것이 적절할까? 목회자의 생활비만 지급하면 될까? 부부의 생활비를 지급해야 할까? 어린 자녀들의 생활비도 지급해야 할까? 9장 3절을 보면, 사역자는 교회가 지급하는 생활비를 갖고 아내와 함께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교회는 목회자 부부와 어린 자녀의 생활비를 교인들의 중간 정도의 생활수준에서 지급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셋째로, 목회자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내 권리이니까, 가능한 많이 받으려고 해야 할까? 바울은 이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복음 전파와 확산에 지장이 생길까 염려하여 그랬다!(12절) 얼핏 생각하면, 사람들은 그렇게 희생하는 그를 더 많이 존경하고 더 잘 따랐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적잖은 사람들이 그가 참된 사역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를 무시했다(3~6절). 그런데도 바울은 앞으로도 이 권리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15절). 그는 자신도 복음에 참여하고자 그랬다(23절). 복음은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다. 삶으로도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교회가 지급하는 적절한 생활비에 감사하고, 가능하다면, 바울처럼 복음의 전파와 확산을 위해 그것마저도 포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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