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 비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눈물

[ 논설위원 칼럼 ] 논설위원칼럼

박은호 목사
2014년 05월 12일(월) 17:53

루이스(C.S. Lewis)가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는 소리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시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다"라며 고난의 역설을 깨우쳐 준 바 있다.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우리 사회는 온통 명복(冥福)을 비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온 국민이 비는 명복', 어처구니없는 큰 슬픔을 당한 유가족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인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일이지만, 동 시대를 살아가는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세월호 참사사건 못지않은 또 다른 더 큰 비통함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을 어찌하면 좋은가.

논어에 이런 글귀가 있다. "비기귀이제지첨야(非其鬼而祭之諂也) 견의불위무용야(見義不爲無勇也), 그 귀신이 아닌데도 제사한다면 이는 아첨이요, 의를 보고도 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다"는 뜻이다. 만일 우리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번 사건의 희생자들을 위해 우리 국민들이 빌고 있는 그 '명복'을 빌고 있다면, 이는 세월호 참사보다 더 가슴 아픈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알고 믿고 있는 것인가 하는 강한 의혹을 품을 수밖에 없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은 윤회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불교에서 쓰는 용어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명부(冥府)' 곧 '저승'에 간다고 한다. 그 명부는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는 곳이기 때문에, 명부에서 '복된 심판 받기를 바란다'며 '명복을 빈다'고 한다. 그러나 어디 우리 기독교의 복음이 진정 명복을 빌어야 하는 그런 복음이라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에케이, 현재형; 지금 현재 영생을 가지고 있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결코 심판에 풍덩 빠지는 일이 없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사망에서부터 이미 완전히 떠났고 생명으로 풍덩 뛰어든 자)"고 하셨다(요5:24).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 어디 받을 심판이 있으며, 사망의 그늘과 권세가 그 어디에 남아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은, 이미 현재형으로 주어진 생명(영생, 질적인 생명)이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명복을 빌고 있다면, 논어의 '그 귀신이 아닌데도 제사하는 것은 아첨이라' 한 것을 넘어서 그것은 정녕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불신앙이 아닌가? 이미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질적인 생명) 있음을 보고도, 우리조차도 '명복을 비는 자'라면 이는 우리의 영적무지를 넘어 논어의 '용기 없음'의 차원이 아닌 우리의 '믿음 없음'이 아닌가?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말(용어)은 '삶의 신학화'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쓰는 세속 용어나 이교도들의 용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믿는 자라면, 죽음 앞에서, 마땅히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그 평강(에이레네)을 비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우리도 명복을 비는 자이어야 하는가? "부활하신 주님의 평강을 빕니다"고 인사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울부짖는 이웃들의 참담한 '고통'이, 이 나라 이 백성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며 외치시는 '하나님의 메가폰'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마피아들은, '내노라'하는 우리 어른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 되어야 하는 우리 한국교회는, 진실로 생때같은 우리 사랑하는 자식들을 저 진도바다에 내던져 희생물로 삼은 후에야, 우리의 잘못과 죄악에서 돌이킬 수 있단 말인가?

박은호 목사 / 정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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