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4월 28일~5월 3일

[ 가정예배 ]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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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4월 22일(화) 11:41

월-부활하신 후에
본문 : 마 28:18~20
찬송 : 162장

십자가 고난을 지나 부활의 승리와 기쁨을 맞이하게 되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학의 두 기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신앙이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건이요, 기독교만의 사건이요, 예언의 성취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드렸던 '가상7언'의 기도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완성의 기도였다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언약의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 '가상7언'의 기도처럼, 부활 이후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감동이 크다.
 
부활하신 주님의 첫 번째 말씀은, 안식 후 첫날 걱정과 근심 속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하신 말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말씀이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기쁜 소식으로 오셨듯이,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부활은 기쁜 소식 가운데 가장 기쁜 소식, 복음의 소식이다. 복음으로 오신 주님께서 부활을 통하여 복음을 확증해 보이셨다.
 
두 번째는 "무서워하지 말라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의 말씀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평강은 이 세상이 빼앗을 수 없고, 끊을 수 없는 하늘의 '샬롬'이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며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그리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나를 만져 보라"고 말씀하신다. 요한은 주님이 도마를 향하여 하셨던 말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을 한 마디 더 추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나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을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주님은 갈릴리 바다의 고기 잡는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묻고 계신다. 베드로를 향하여 물으셨던 주님의 이 질문은 오늘 나를 향하여 물으시는 질문이기도 하다.
 
마지막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지상 대 명령을 제자들에게 선포하셨다. 다시 오실 그때까지 주님과 동행하자.
 
오늘의 기도
 
날 위해 십자가 지셨던 주님,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을 믿습니다. 임마누엘 주님으로 제자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동성 목사
/경당교회


화-인생의 위기에도 기적은 계속된다
본문 : 요 2:1~11
찬송 : 488장

우리 인생의 한 날 한 날이 우리 인생의 한 호흡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기적의 삶임을 감사로 고백한다. 시인 고훈 목사님은 '그 날 같은 하루를 날마다 살고 싶다'는 시를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 같은 하루를 살고 싶다며 하나님의 기적을 소망한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의 첫 번째 기적 사건이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셔서 인생의 위기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여 기적의 역사로 바꾸신 사건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있었다. 예수님의 기적은 위기 현장 속에서 시작되었다. 기적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로, '예수 기적'이다.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인생의 위기' 속에서 예수의 어머니도 예수님도 청함을 받고 그 현장에 계셨다. 예수님께서 기적과 축복의 주인공이시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은 오직 예수님만이 예수님의 방법으로 행하실 수 있는 기적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갈보리 골고다 해골의 곳은 사망과 실패와 심판의 장소였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생명, 성공, 구원의 장소가 된다. 인생의 위기 속에 예수님을 초청하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신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서 행하시는 예수님의 때를 기다리라.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는 말씀은 거절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때를 이루시는 예수님의 기다리심이다.
 
둘째로, '말씀 기적'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말씀이 임하면 기적이 시작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기적의 도구요, 재료다. 예수님의 말씀은 창조적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치료하신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도 말씀이 임하고 생기가 들어갈 때에 뼛조각이 맞춰지고 살들이 붙고 힘줄이 생기고 가죽이 덮여져 큰 군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기 전에 말씀을 먼저 주신다.
 
셋째로, '순종 기적'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할 때 기적이 나타난다. 예수님의 말씀은 기적의 시작이 되고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은 완성된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는 말씀에 순종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 믿음으로 순종할 때 우리는 기적의 주인공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 축복의 샘을 주시고 이른 비의 복으로 채워주심을 기억하라.

오늘의 기도
 
주여, 인생의 위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노재한 목사
/대구신은교회


수-기도
본문 : 렘 33:3
찬송 : 383장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구절이다. 이 말씀을 근거로 우리는 기도의 당위성이나 기도의 응답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이 갖는 의미에 대해 미처 보지 못한 부분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산너머 산이라고 근심이 그칠 날이 없으며 한시도 마음 편한 날이 없는 삶의 연속이다. 문제를 극복하려고 나름대로 온 힘을 다 기울이며 그 문제가 빨리 쉽게 해결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누구나 갖고 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 역시 그랬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게 하려고 자신의 삶을 다 바쳤지만 현실은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를 불러서 도구로 사용하신다면 형통하게 만들어 주시고 웬만한 문제는 다 막아줘야 옳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로 쓰임받는 예레미야에게도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잘못이 없음에도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겪는다. 원망을 하자면 끝이 없는 지경이다. 그런 예레미야의 상황을 감안하면 본문의 말씀은 예레미야를 향한 하나님의 응원과 격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하는 말의 시간적인 순서를 따지면 어느 것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일일까 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는 명령과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라는 응답으로 구분되는데 이 둘의 순서를 매기자면 우리는 대개 기도, 부르짖음이 있고 후에 그에 대한 응답이 있다는 도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적어도 이 본문에서 부르짖는다는 것은 인간이 이미 선취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렇게 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 요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명령은 이미 하나님의 응답이 전제된 상태에서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부르짖으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역사하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것을 받을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것, 본문은 그것을 전제로 기도와 응답에 관하여 상관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시도록 바꾸려는 생각이 강하다. 하지만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에게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눈을 돌려보라. 땅을 바라보며 잊고 있던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라. 그리하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곤고한 상황에도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여유와 지혜를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병목 목사
/해안중앙교회


목-사람은 각자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준다
본문 : 롬 12:14-18
찬송 : 286장

역사가 많이 흘렀지만 독일 통일과정에서의 일화들은 지금도 깊은 감동을 주고 많은 것을 배우게 한다. 일화 중 하나를 소개한다.
 
베를린이 분단되어 동독은 공산치하, 서독은 자유진영이 되었을 때 일이다. 어느 날, 동독 사람들이 한 트럭의 쓰레기 더미를 서독진영으로 쏟아부었다. 화가 난 서독사람들은 쓰레기를 다시 동쪽으로 내버릴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오히려 트럭 한 대에 통조림과 식량을 채워 동독으로 건너가 산뜻하게 쌓은 후 그 옆에 "사람은 각자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준다"라는 표지판을 하나 세웠다.
 
우리 속에는 어떤 것이 들어 있어서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된 삶의 지표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의 삶은 엄중한 현실에서 쉽게 무너져버린다. 마치 주님이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하시며 그 세대를 탄식하신 것과 같다. 무엇을 보아도 무엇을 들어도 무엇을 느껴도 반응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과 같다.
 
사람이 죽어도 신기한 모습을 담듯 사진을 찍고 그 앞에서 식사를 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것처럼 웃고 잡담하고 행동한다. 생활고로 인하여 온 가족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어도 그 순간만 설왕설래하며 호들갑을 떨다가 시간이 흐르면 그만이다.
 
어린 자녀들이 부모라는 이름 아래 학대당하고 맞아 죽어도 그저 그런 일이 있는가 보다 스치듯 넘겨버린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세상이 미쳐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 앞에 엄청난 쓰레기 더미가 날마다 한 트럭씩 배달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우리가 똑같이 쓰레기를 만들며 쓰레기처럼 살 수는 없다.
 
허울 좋은 행복을 만들어내고 미사여구로 꾸며진 평화 뒤로 숨어서는 안된다. 쓰레기는 아무리 멋지게 포장해도 쓰레기일 뿐이다. 현실을 직면하고 마음을 바꿔서 주님의 말씀에 다시 귀를 기울이자. 그리고 저주 대신 축복을 채우자. 진심어린 사랑과 관심을 채우자. 용서와 관용을 품고 선한 일을 가득 채우자. 할 수 없을 때라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자. 그리고 복수 대신 평화를 선포하자. 그러면 우리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심장을 내어 주는 것이다. 우리 옆에 굳이 표지판을 세우지 않아도 세상은 우리 때문에 밝아질 것이다.
 
우리 속에 무엇을 채우고 또 무엇을 내놓을 것인가?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삶의 결단을 요구하신다.
 
오늘의 기도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된 예배의 삶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현 목사
/참사랑교회


금-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라
본문 : 시 62:5~8, 딤전 6:11-16
찬송 : 461장

바울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른 바울의 동역자 디모데는 헬라어로 티모테오스(Timotheos)이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디모데는 우리와 같이 약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바울이 그에게 첫 편지를 쓸 때 그는 비교적 어린 나이였다. 또한, 디모데는 기질적으로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육신적으로 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디모데의 연약함 안에서 온전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태산 같이 굳게 서야 할 하나님의 사람 디모데에게 바울은 세 가지 사실을 부탁하고 있다.
 
첫째, 피할 것을 피하고 따를 것을 따르라고 한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 탐욕 그리고 이런 것들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피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첫째, '의와 경건'이다. 의란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이고, 경건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다. '믿음과 사랑'을 좇으라고 한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고, 사랑이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인내와 온유'를 말한다. 인내가 어려운 상황에서 참는 것을 말한다면, 온유란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 참는 것을 가리킨다. 상황과 사람을 참는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에게 꼭 요구되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 주시길 기다려서는 안된다. 우리는 악한 것으로부터 피해서 도망가야 하고 선한 것을 위해 달려가야 한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를 붙들고 진리 아닌 것과 싸워야 한다고 가르친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한다. 잘못된 사상에서 떠나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
 
셋째로 바울은 영생을 체험하고 영성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라고 부탁한다. 영생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다. 영생은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의 삶 속에 가득 채워 사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체험적으로 예수를 만나고 성령으로 충만한 것을 의미한다.
 
디모데에게 이미 얻은 영생을 취하라고 말하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문제는 영생을 가졌으나 그것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은 중생 이후 계속되는 성령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데 성령의 기름 부으시는 이 위대한 역사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을 가져오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될 때부터 지속적으로 완전을 향해 나가도록 성화가 계속 되어야 한다.
 
이같이 함으로 참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오늘의 기도
 
성령의 기름을 부음 받아 영생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창렬 목사
/대흥교회


토-나의 삶의 자리는 어디인가?
본문 : 창 12:1~4, 엡 4:22~24
찬송 : 384장

왜 신앙은 새로운 삶을 요구하는 것일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관계를 맺고 있던 소속이 달라졌고, 또한 신분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삶의 목표도 달라져야 한다.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며 새로운 삶을 강조한다. 새로운 삶이란 어떤 삶일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첫 명령은 '떠나라'이다. 아브라함이 살던 갈대아 우르는 그 당시 최고로 번영하던 도시로, 물질적으로 혜택이 풍성한 곳이었다. 갈대아 우르는 아브라함에게 충분한 누림의 장소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왜일까?
 
단순히 장소적인 의미가 아니다. 떠남의 장소는 우리의 근본적인 죄악 덩어리요, 이기적인 삶의 뿌리, 삶의 영역을 말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 우리가 누리며 살던 모든 것을 뜻한다. 그곳을 떠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삶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삶의 자리는 어디인가? 과거를 떠난 자리인가?
 
지금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이란 곳에서 머물고 있다. 그러나 하란은 갈대아의 변방이다. 갈대아 지역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온전히 떠나지 못했다. 하란이란 지명의 의미를 주목해보자. 하란은 '바싹 마르다', '열매가 없다'는 뜻이다. 온전히 떠나지 못한 하란에서 아브라함은 평안도 누리지 못했고, 소득도 없었다. 하나님을 만나긴 했지만, 바뀐 삶의 풍성함을 누리질 못했다.
 
성도는 분명한 청산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의 감격을 맛볼 수 없다. 옛 삶을 떠나지 않은 사람은 백조가 되어도, 넓은 호수와 맑은 물을 누리지 못한 채, 좁은 연못과 시궁창을 뒤지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오직 떠나는 자만이 제대로 된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다. 하란은 세월을 허비하는 곳이다. 축복을 놓치는 곳이다. 그러므로 떠나야 한다. 가나안의 복된 삶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나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떠나는 것이 신앙의 출발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삶이다. 
 
오늘의 기도
 
주여! 나의 삶의 방향키를 잡아 주시사, 머무르지 않게, 허비하지 않게 주의 길로 인도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요한 목사
/묘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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