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모든 소통의 시작

[ 기고 ] 독자투고

정성은 교수 chseun@gmail.com
2014년 04월 22일(화) 10:38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이다. "당장 다니는 학교를 그만두고 군사고등학교로 전학 가자. 너는 하버드대학에 들어갈 것이고 의사가 될 것이다. 넌 내가 꿈꾸지도 못했던 그런 기회들을 갖고 있어." 아버지의 명령에 놀란 아들이 할 말이 있다고 하자 아버지는 말해보라고 한다. 아버지의 이 말 자체만 보면 별 문제 없어 보인다. 하지만 소통은 말이 전부가 아니다. 영화를 보면 아버지는 눈에 힘을 주고 화를 내며 윽박지른다. 그 표정에는 상대방의 감정에 대한 인정이 전혀 없다. 아들은 힘없이 "없어요"라고 답한다. 소통의 실패다.
 
소통을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의 감정을 함께 느껴주어야 한다. 공감을 표현해 준 이후라야 마음문이 열려 설득의 기회가 생긴다. 아버지가 자리를 뜬 이후 어머니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아들을 쳐다본다. 갑자기 아들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버지의 논리적인 말은 아들의 말문을 닫았는데 어머니는 표정만으로 아들의 마음을 연다. 아들의 아픔을 이미 함께 느끼는 어머니의 공감능력 때문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시작하는 아들을 어머니는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 않는다.
 
공감은 상대방의 마음문을 열어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공감 다음에는 서로의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며 함께 해결책을 찾아나가야 한다. 때론 강하게 설득해야 한다. 공감 없이 설득으로 나아가지 못하지만, 설득 없는 공감 또한 진정한 소통에 이르지 못한다. 영화 속에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아들과의 소통에 실패하였다. 좌절한 아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소통의 실패가 참담한 비극을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소통을 잘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공감능력과 설득능력을 잘 갖추어 공감과 설득을 시의 적절하게 잘 수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런 소통자이셨다. 마가복음 1장 40절에 한센병자을 치유하시는 예수님 이야기가 나온다. 한센병자가 꿇어 엎드려 간구하자,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신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의 헬라어 원어는 내장이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을 뜻하는 스플랑크니조마이이다. 분명 거지꼴을 하고 있었을 한센병자를 보시고 예수님께선 더럽다고 여기지 않고 먼저 그의 아픔을 몸으로 느끼신다. 모든 소통의 시작이 공감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신다. 손을 내밀어 대는 것은 강렬한 비구어적 소통이다. 불가촉(不可觸)라는 천형을 받은 한센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대실 때, 그는 마치 번개에 데듯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지 않았을까?
 
수많은 한센인들이 마가복음 1장 41절을 읽으면서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번개에 데듯이 경험하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공감하고 소통하며 기적을 일으키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설득이 필요할 경우는 누구보다도 엄하고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설파하신다. 성전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목격하신 예수님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성경구절을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시고 '강도의 소굴'이라는 강렬하고 감성적인 은유를 사용하여 청중들을 설득하신다. 예수님은 공감능력과 설득능력을 지니시고, 시의 적절하게 공감과 설득을 사용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우리 기독인들은 어떻게 소통해야 할까? 현실에서 소통의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소통하셨을까?"라고 질문해보자. 소통에도 예수님이 답이다. 

정성은 교수/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장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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