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는 현존하시는 그분께 온전히 정복되는 자리"

[ 교계 ] 영과 진리' 없는 예배, 회복하라

김운용 교수
2014년 04월 17일(목) 08:48

부활절 특집 "매너리즘에 빠진 한국교회, 진정성을 회복하라"

1. 영과 진리' 없는 예배, 회복하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큰 장애물

   
 
일전 어느 교회 주일 예배를 참석했다. 그날은 인근 대학의 수시 논술고사 때문에 길이 막혀 평소보다 늦게 예배 시작 직전에 도착하여 뒷편 좌석에 앉게 되었다. 찬양과 함께 시작된 예배는 감동 가운데 이어지고 있었고 설교가 시작되었을 때 주옥과 같은 말씀이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그런데 애써 외면하려고 해도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옆자리에 대학생 차림의 한 청년이 거의 예배가 시작할 때부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설교 시간에는 누군가와 계속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저럴 것이면 예배의 자리에는 왜 나왔을까'라는 생각부터 직업병(?)이 도지면서 '예배시간에 그러면 안 된다'고 훈계라도 하고 싶은 생각, '그런 충고를 받아들일 사람이면 저러지도 않겠지'라는 생각, '너도 지금 예배의 마음이 흐트러지고 있잖아. 너나 잘 하세요'까지 실로 여러 생각이 교차하였다.
 결국 그게 내 예배에 방해가 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그것을 떨쳐 내버리고 예배에 더 집중하려고 했던 적이 있다. 어쩌면 그 학생은 강요하는 부모와 논쟁하기 싫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으니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일탈행위는 하지 않고 다소곳이 앉아 있어도 온갖 잡념에 사로잡혀 예배 시간 내내 마음은 다른 곳을 배회할 수도 있다.

이렇듯 예배하는 자리는 실로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런데 특별하신 사랑을 입고 구원받은 감격을 가지고 예배하는 자리에서 그렇게 시간을 때우며 단지 머물다 가도 되는 것인가? 예배를  온통 쓰레기로 채워 넣고 돌아가도 되는 자리인가? 아니 천지의 대주재가 되시는 분께 드리는 예배가 과연 그렇게 드려져도 되는 것일까? 결국은 그런 일탈현상은 예배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부터 기인한 것이며, 예배자 됨의 축복을 제대로 알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도대체 기독교의 예배는 무엇이며, 어떻게 드려야 하는 것일까?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지만 이렇듯 예배의 자리에서 가장 커다란 장애물 가운데 하나는 잡념을 포함하여 다른 것에 '사로잡힘'과 '매너리즘'이다. 일단 그 늪에 빠지게 되면 예배의 능력과 신비는 결코 맛볼 수 없기에 진정한 예배자가 되려면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제프리 웨인라이트는 예배를 '집중점'(point of concentration)으로 설명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것이 집중되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예배이며, 예배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집중하는 자세라는 말이다. 그렇게 될 때 그 자리는 하늘과 땅이 연결되고 하늘의 신비와 영광, 능력이 펼쳐지는 자리가 된다. 사람은 무엇이든 익숙함에 빠져드는 순간 희열, 신비, 감격, 기대감, 생명력을 송두리째 빼앗기게 된다. 익숙함은 예배도 죽이고 예배자도 죽인다. 그러므로 익숙함과의 결별은 예배자가 순간순간 취해야 할 행동강령이다.
모든 것의 중심이며 '자기 드림'인 예배

교회는 예배를 위해 부름 받았고 예배를 위해 존재한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가장 중심 되는 목적은 구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 부활과 승천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성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최고의 찬양과 영광, 감사를 올려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의 특권이자 소명이다. 예배를 통해 그들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삶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며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교회는 지금까지 예배에 생명을 걸었고 더 좋은 예배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 왔다. 그것 때문에 교회는 이 땅에서 하늘의 부요를 누리기도 했지만 때로는 왜곡된 예배를 통해 교회의 생명력을 상실하기도 했다. 영광스러운 예배를 보존하기 위해서 교회는 생명을 걸고 싸워왔으며, 그러한 노력이 약화되는 곳에서 교회는 언제나 약화되었다. 예배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부요의 비결이기도 하지만 빈곤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교회는 예배를 공동체의 가장 중심적인 활동으로 삼아왔다. 실로 예배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이유이자 원동력이다. 교회의 모든 사역과 삶은 실제로 이 한 가지를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그러한 예배의 자리로 부르고 계신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는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되며, 모두는 늘 새롭게 부르시는 하나님의 예배에로의 부르심(call to worship) 앞에 서 있다.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어떠한 예배를 원하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예배자의 진정성이 담긴 예배이며 '나 드림'의 헌신과 섬김이 있는 예배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와 맥을 같이 한다.

기독교 예배는 최상의 것, 최고의 것을 올려드려야 하는 '나 드림'의 예배이다. 예배는 복을 받기 위해 드리는 것도 아니며 은혜를 받기 위해 드리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배자에게 주시는 하늘의 선물일 뿐이며 그것이 최종적인 목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진정한 예배는 우리가 제물이 되는 것이다(롬 12:1). 예배자 자신을 포함하여 예배 가운데 행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되어야 한다. 내가 만족을 얻고 즐겁게 되려는 나 중심의 예배관에서 벗어나 예배자는 나의 최고의 것을 드리려는 자세와 진지한 준비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 이것은 제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이 고백으로부터 시작되고 완성된다. 이 고백과 함께 예배를 준비하고 드릴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성령님께서 운행하시며, 봄 동산에서 펼치시는 그분의 거룩한 춤에 참여함이 있는 예배, 하늘과 땅이 잇대어지는 신비를 맛보게 되는 예배,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 앞에 경이감으로 몸을 떠는 예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파괴자들의 틈바구니에서 드리는 고백

이러한 예배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오늘의 환경은 예배에 대해서 공격적이고 파괴적이다. 문화 사회적 환경은 거칠어지고 황폐화되고 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한 예배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요소들로 넘쳐나고 있다. 현대 문화의 지배적인 경향은 '오락과 즐거움 추구'에 있다. 그런 문화에 몸을 잠그고 살던 사람들은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서 자기 만족과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런 경향을 고려한 예배 경향이 출현하기도 하면서 점차 기독교 예배를 일종의 공연으로 만들어 버리고 '예배자'가 아닌 '관람자'로 전락하는 현상도 발생하고 있다. 잠잠히 그분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감은 약해지고 무질서와 소란함이 지배하는 현장이 되기도 하며, 예배와 전도를 혼동하기도 하며, 예배를 교육의 자리로 혼동하기도 한다. 그래서 '예배 위기', '예배 전쟁'이라는 용어까지 들려온다.

이렇게 기독교의 예배는 외적으로 여러 가지 문화 사회적인 변화와 함께 커다란 도전을 받고 있으며, 그로 인해 위기를 경험하고 있으며, 예배가 성향과 취향의 문제가 되면서 논쟁을 벌이면서 다른 진영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음을 표현한 말이다. '전통적 예배'를 드릴 것인가, '현대적 예배'로 드릴 것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양극화 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마치 예배의 기호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의 작가인 애니 딜러드는 현대교회를 가리켜 마치 주일 아침(예배)을 일순간에 날려 보낼 수 있는 수많은 화공약품과 폭탄 꾸러미 사이에서 천진난만하게 뛰놀고 있는 아이로 비유하기도 했다.

우리는 오늘 예배를 무너뜨리려는 파괴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영광스러운 예배를 꿈꾸는 존재들이다. 엄밀히 말해 개신교회는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개혁 정신으로부터 출발했다. 개혁은 언제나 어떤 형식의 변화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본질의 회복에 있었다. 예배 순서나 형식 몇 가지를 바꾼다고 해서 예배가 개혁되고,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이것은 바른 예배드림을 위해 필수 요소이다. 바른 예배 이해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예배자의 바른 자세와 예배 정신의 회복이다. 예배는 부르심을 따라 보좌 앞으로 나아가 우리의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리는 것이며(찬양), 잘못된 삶을 참회하며 돌이키고 오늘의 세상과 이웃을 위해 주님께 탄원하는 것이고(참회와 기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이루신 일들을 말하며(설교), 또한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줌(성찬)을 통해 과거의 사건을 현재로 끌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골격은 언제나 경축의 특성을 가진다. 그분의 임재와 영광 가운데 나아가 드리는 예배는 감격과 감탄, 존경과 숭모, 경축과 환호를 바탕으로 한다. 이렇게 확장된 마음을 가지고 함께 모여 경배를 올려드리고 이제 삶 속에서 예배하도록, 그리고 세상 속에서 성삼위 하나님을 섬기도록 파송 받는다. 이렇듯 기독교의 예배는 우리가 정복하고 이뤄야 할 고지나 대상이 아니며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예배는 약속대로 현존하시는 그분께 우리가 온전히 정복당하는 자리이며, 나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도록 내어놓고 그분의 통치하심 앞에 부복하는 자리이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중세 프랑스의 니콜라 에르망라는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고 제대한 후 38세 때 수도사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로렌스라는 새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평생 해야 했던 일은 부엌에서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는 일과 신발을 고치는 허드렛일이었다. 그 일을 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는 훈련을 계속 하였고 삶의 일상에서 예배하는 삶을 살려고 했다.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겸손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그분을 예배하려고 했고, 그것이 자신의 본성이 되기까지 반복해서 자신을 훈련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까지 평생 자신을 연습하고 훈련했다. 그분을 향한 순전한 사랑이 삶의 모든 원동력이 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나올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살려고 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아주 친밀한 분으로 와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 평생 거룩한 예배자로 살려고 몸부림치던 80년의 생애가 끝나갈 때 그도 죽음 앞에 놓여 있었다. 죽음의 자리에 있는 그에게 누군가 물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때 로렌스는 마지막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지금 지난 40년 동안 내가 했던 것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이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였고, 생명 있는 동안에도, 그것이 끝나가는 자리에서도 예배는 그의 생의 최고의 목적이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으면 잘 산 삶이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 나의 최고의 것을 드려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김운용 교수 / 장신대, 예배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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