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직한 삶 살다간 한국교회 큰 일꾼"

[ 교계 ] 본보 이사회 조직 후 초대 사장 지낸 故 김현정 목사

김혜미 기자 khm@pckworld.com
2014년 04월 07일(월) 17:32
   
▲ 4남 1녀와 함께 한 김현정 목사. 아버지가 오직 교회, 교인만 알았던 까닭에 거의 유일한 가족사진이다. 현재는 월남참전 고엽제 상해로 순직한 3남 김윤배 목사를 제외한 3남 1녀가 생존해 부모님의 신앙유산을 계승해가고 있다. 맨 왼쪽이 4남인 김명배 전 브라질 대사.

"명석한 두뇌와 정확한 판단력, 과단성 있는 강직한 태도로써 교계 수습 특히 밀물처럼 들어오는 신(新)신학사조에 방파제를 쌓는데 남다른 공로가 컸던 것이다…(중략)."

본보 343호(1955년 11월 7일자)에 실린 고 김현정(金顯晶) 목사의 장례식 기사 일부다.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인 김창국 목사(평양신학교 3회)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현정 목사는 1955년 10월 29일 46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쳤다. 1954년 제39회 총회가 본보를 총회 기관지로 인수한 이후 이듬해인 1955년 자립을 위해 이사회를 조직한 이후, 초대사장으로 취임한 것이 그해 8월이었다(본보 331호 1955년 8월 15일자).

평양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8회)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한(32회) 김현정 목사는 당시 평양 서문교회 성가대 반주자였던 이경선 권사와 결혼해 슬하에 4남 1녀를 뒀다.

본보는 기독공보주일을 맞아 김현정 목사의 후손 중 4남 김명배 전 브라질 대사(예수소망교회)를 만나 고인이 남긴 신앙의 유산을 재조명해보기로 했다.

"아버지는 강직한 분이셨어요. 걸음걸이도 또박 또박, 글씨도 또박 또박, 말씀도 분명히 하셨고 한 번도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계신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지난 2일 기독공보 편집국에 찾아온 김명배 전 대사가 말했다.

고 김현정 목사의 강직한 성품은 여러 일화에서 잘 나타난다. 그가 군산 개복동교회에 시무할 때(1946∼1954)의 일이다. 김 목사는 군산해양대학 학장이 마련해준 배로 피난갈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83명의 교인을 풍선(風船, 바람으로 움직이는 배)에 태워 부산으로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고 한다. 무려 23일간의 사선을 넘어서는 여정이었다.
 

   
▲ 아버지 김현정 목사의 삶을 회고하는 김명배 전 브라질 대사. 김 전 대사는 인터뷰 다음날 기자에게 "60여 년 가슴에 묻혀 있던 일들을 회상하다 보니 조금은 흥분이 된 것 같다. 깊이 해량해 주시길 바란다"고 메일을 보내왔다.

당시 9살이었던 김명배 전 대사도 그 배안에 있었다. "83명의 목숨이 달려 있었고 부산으로 가도 하나님 밖에는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었으니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하셨을거에요. 아버님 팔뚝이 갈라지고 또 갈라져서 핏자국이 흥건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뿐만이 아니다. 매월 부흥회 사례금은 봉투째 회계 장로에게 전달하고 전쟁 직후 교회 재정이 어려운 때에는 주일 설교 도중 6개월간 사례비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고인의 생전 좌우명이었다는 '생각은 높게, 생활은 검소하게' 그대로다. 특히 존 칼빈의 청교도적 신앙을 귀감으로 삼았다고 한다.

김현정 목사는 일제 치하에서 심한 옥살이를 했고 북한 공산당 정권하에서도 모진 박해를 당했다. "고문이 딴거 아니에요. '하나님 부인하는 서약을 해라'였는데 아버님은 일제 때 총회 신사참배 결의에 따른 것이 일생 후회가 되는데 두번 부인은 못한다고 저항하셨어요."

본보 옛 기사에서도 "고인의 숙환의 원인은 일제의 고문과 해방 후 공산당원에게 극형을 당해 장의 출혈과 수개월간 옥고를 겪은데 있었던 것으로 그동안 정양할 여력이 없었던 까닭이었다고 한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 고 김현정 목사의 자필 설교노트. 짧은 생을 마감한 까닭에 설교집으로 출판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교계에서 훌륭한 지도자였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헌신적으로 목회에 전념하실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한 분이 어머니셨어요. 우리 집안에는 세 기둥이 있는데 한 기둥이 어머니, 나머지 두 기둥이 큰 형님(김원배 소망교회 은퇴장로)과 형수님이에요. 동생으로서 가슴 깊이 존경해요."

김현정 목사의 부인 이경선 권사(1983년 1월 별세) 역시 강인한 성품의 여인이었다. 남편을 일찍이 떠나보낸 뒤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김 목사의 생전에도 오직 교회, 교인 밖에 모르던 남편을 대신해 채소를 가꾸고 닭과 돼지를 키우며 가계를 꾸려 나가는 것이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고 한다. 김명배 전 대사는 "그래도 어머니는 불평 한마디 없으셨고 자식들에게 힘들다는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셨다. 온갖 어려움을 홀로 헤쳐 나가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김현정 목사와 동창생인 증경총회장 방지일 목사(104세)에게 이메일로 고인에 대한 기억을 물었다. 수시로 이메일을 체크한다는 방 목사에게서 4시간 만에 반가운 답장이 도착했다.

"김현정 목사는 숭실전문학교 동창일 뿐 아니라 신학교도 동창으로 그 부친이 광주 양림교회 목사였지요. 김창국 목사님 동생도 목사로 완전히 주님께 바쳐진 집안입니다. 또 다른 동생 김현승교수는 숭실대 교수와 시인이었죠. 신학교 졸업 앨범도 전적으로 맡아서 만들었는데 그 당시 그만한 앨범이 없을 정도였어요. 친구들이 포드 자동차 헤드라이트 같은 눈을 가졌다고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어요. 우리 동창 가운데 우뚝 뛰어난 리더였고 한국교회의 큰 일꾼이었는데 아쉽게 일찍 가셨지요."


故 김현정 목사 약력

1909년 3월 군산 출생
평양신학교 졸업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
군산노회장 역임
군산기독교연합회장 역임
총회 신학교 이사
총회 정치부 서기
미국 에반스톤 WCC 대회 한국교회 대표로 참석(1954년)
미 남장로교 유니온신학대 연구과 수학 중 귀국
한국기독공보 사장 취임(1955년 8월)
1955년 10월 위장암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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