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촉하여 주십시오!

[ 목양칼럼 ]

김종익 목사
2014년 04월 07일(월) 17:16

3월에 벚꽃이 피었다. 서울에선 전례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례를 따지는 건 인간이지 자연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자연은 인간사회보다 훨씬 더 창조적이다. 자연(自然)은 그냥 자연스러울 뿐이다. 공연히 전례나 전통에 매인 부자연스러운 인간들이 '이상(異常)'을 들먹이면서 스스로 정상(正常) 근처에 있다는 자기 암시를 계속하고 있는 건 아닐까.

수요일마다 교역자 회의를 하면서 지나간 사역을 돌아보고, 앞으로 해야 할 사역들을 점검한다. 담임목회자로서 동역자들에게 주문하는 게 있다. 왜 이걸 해야 하는지를 자문하라는 것이다. 이걸 물어야만 비전이 명확해지고, 처한 상황의 명암을 이해하게 되고, 창조적으로 사역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역자들은 전례(前例/典例)부터 따져보는 경우가 비일비재다. 내세우는 명분은 효율성부터 전통존중까지 여러 가지지만, 내가 생각하는 진실은, '틀렸다'는 비판이나 '그렇게밖에 못했냐'는 소리를 피해가려는 안전판이다. 아마도 창조적이고 초라한 결과보다는 전통적이고 안전한 결과에 안도하는 '장로교회'의 분위기에서 훈련받았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사실 당회를 하다보면 비전과 필요를 따라 고민하기보다, 전례와 대세를 따라 저울질 할 때가 많다. 종종 '전례가 없사옵니다. 통촉하옵소서!'라는 말로 정책가들의 창조성을 묵살하던 조선시대 어전회의가 떠오르는 건 드라마를 많이 본 탓만은 아닐 것이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도 비슷한 비판과 조롱을 자주 겪으셨다. -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마5:12) - 이렇게 비전과 필요를 묻지 않고 전통과 전례만 따지면, 예수님까지도 다 '이상한 것'으로 만들고 만다.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은 깨닫지도 못한 채 말이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15:3)

이런 공동체는 선지자의 카리스마를 죽이고 비전도 없는 폭군의 전례만 고집하게 된다. 마르크 블로흐는 '봉건 사회'(한정숙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 부자연스러운 전례만 남게 된, 비창조적인 사회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9세기 왕실 포도주 저장실에 포도주가 부족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생드니수도원 수도사들은 200통을 제공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후로 왕실에서 이 기부를 당연한 것으로 매년 권리처럼 요구하게 되었다. 그 기부를 끝내기 위해서는 왕의 선언까지 필요했다"… "앙드레에는 그 지방 영주의 소유였던 곰이 한 마리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곳 주민들은 그 곰이 개들과 싸우는 장면을 즐겼던 까닭에 곰 먹이는 일을 떠맡았다. 그 곰이 죽은 뒤에도 영주는 곰을 먹이던 빵을 계속 요구했다."

우리 주님도 전례만 따랐다면 성육신과 십자가라는 창조적인 구원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사도들이 전통에만 매여 있었다면 선교도 교회도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전통이나 전례는 과거와 관습을 답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성령을 따라 그것들이 지닌 비전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때만 의미가 있다. 이제 150년도 안 된 한국교회의 역사나 교회들의 경험은 복음선교를 위해 창조적으로 간증되어야지, 굳게 보수할 전례나 전통은 아닐 것이다. 교회와 교회의 일꾼들이 구해야 할 것은 전통의 보수가 아니라 십자가 비전의 창조적 계승이지 않을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4:7)

김종익 목사 / 염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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