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 ①

[ 목회·신학 ] 현대신학산책

박만 교수
2014년 04월 02일(수) 17:29

20세기 전반기의 독일교회에는 칼 바르트와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대 신학자가 있었다. 바르트와 같은 해인 1886년에 태어난 폴 틸리히는 여러 면에서 바르트와 대조되는 신학자이다.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그 온전한 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였다면 틸리히는 이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구체적인 상황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탐구했다. 이를 위해 그는 바르트처럼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신학을 시작하지 않고 그 시대의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에 귀를 기울인 다음 거기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신학을 펼쳐나갔다. 즉 바르트가 하나님 중심, 계시 중심적인 신학을 추구했다면 틸리히는 인간 상황으로부터 출발하는 인간 중심 혹은 경험 중심적인 신학을 전개 하였다.

바르트 같은 신학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과 궁극성을 잘 표현할 수 있으나 자칫 인간 현실에 부적합해질 약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틸리히와 같은 변증신학은 기독교 복음의 상황적 연관성을 가질 수 있으나 복음을 왜곡시킬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틸리히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언어로서는 현대인들에게 의미 있게 복음을 전달할 길이 없다고 보았기에 부적합의 위험 보다는 왜곡의 위험을 무릅쓰는 길을 택했고 그 가운데 교회사를 통틀어 가장 탁월하고 창조적인 신학의 하나를 남기게 되었다.

틸리히는 1886년 8월 20일에 엄격하고 보수적인 루터파 목사인 요한 오스카 틸리히와 자유롭고 명랑한 어머니 빌헬미나 마틸드 사이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5년 할레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여기에서 백발의 노교수인 마르틴 캘러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철학자인 셀링에 대한 연구로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11년에는 대학에서 가르칠 자격을 얻었다. 1차 세계 대전 중 틸리히는 만 4년 동안 군목으로 일했으며 이 기간 동안 엄청난 사상적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전쟁에 참전하기 전의 틸리히는 하나님이 세계를 가장 좋고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소박한 소시민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군목으로서 부상자들의 피를 닦아주고 전사자들의 장례를 집례하는 가운데 그를 떠받치고 있던 이런 낙관주의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즉 그는 전쟁터에서 그의 세대가 결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인간 실존의 어두운 심연을 본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틸리히는 역사의 진보를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역사의 깊은 어둠을 경험한 사람이 되었고 이 경험으로 그 시대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기 시작하였다. 1924년 봄에 그는 결혼을 했고 마르부르크의 필립대학의 부교수로 가서 세 학기를 가르쳤다. 1925년 그를 널리 유명하게 만든 책인 '종교적 정황'이 출판되었고 43세 되던 1929년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철학과 사회학 정교수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1933년까지 사회윤리학 분야와 역사적 행위의 문제, 정치적 방향과 이념 문제를 가르쳤고 칸트, 헤겔, 쉘링,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과 종교철학 및 철학사를 가르쳤으며 특히 마지막 학기에는 조직신학의 문제들을 가르쳤다. 대학 교수단 중 유일한 신학자였던 그는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의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이때부터 그의 사상과 인간성에 매료된 많은 후학들을 이끌게 되었다.

박만 교수 / 부산장신대ㆍ조직신학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