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모녀 자살, 우리의 책임

[ 연재 ]

이승열 목사
2014년 03월 19일(수) 08:51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웃들에 대한 의무 잊지 말아야"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는 '비인간화의 시대'라는 것이다. '자본과 기술이 우리들에게 장밋빛과 같은 유토피아를 가능하게 한다'는 환상에 빠져 비인간화 현상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도 별다른 느낌이나 책임의식 없이 뭐 이런 일이 또 일어났나보다 정도로 가볍게 여기지는 않는가?

지난 2월 26일에 발생한 세모녀의 자살 사건이 조용한 충격파로 우리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60대 초의 어머니가 30대의 미혼인 두 딸과 함께 작은 단칸방에서 월세로 살고 있었다. 암으로 가장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 12년 동안 식당 일을 하면서 가정을 지켜왔다. 당뇨와 고혈압을 앓으면서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다쳐서 식당일도 못하게 되면서 그 정도의 삶도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한 부모 가정으로서의 복지혜택도 누리지 못했고, 빈곤가정으로서 의료복지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토익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취직을 위해 노력해온 두 딸들도 신용불량자가 됐다. 세상과 사회는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고 '약육강식 적자생존'같은 밀림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무서운 곳이었다. 이들은 번개탄을 피워놓고 동반 자살을 감행하면서도 집세와 공과금을 챙겨서 봉투에 넣고 "주인 아주머니,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정부와 이웃과 사회에 대한 원망 한 마디 없이 밀린 집세와 공과금을 걱정하면서, 의무만 다하고 권리는 못찾아 먹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이 세상을 떠났다. 기초생활수급권자로 혹은 차상위계층이라도 신청만 했더라면, 한부모 가정에 주는 최소한의 복지혜택이라도 이용할 수 있었더라면 조금은 도움이 됐을텐데, 그것도 신청주의라는 원칙 때문에, 월 150만원이 넘는 소득이 있으면 혜택을 못받는 제도 때문에 복지사각지대에 있었던 그들이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이웃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 하나님의 책임 추궁과 같은 말씀이 먼저 생각나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책임을 느끼게 하셨던 말씀도 생각난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서 긴급한 구호를 함으로써 그의 생명을 살린 선한 사마리아 사람도 생각난다. 우리가 일차적으로 그 세 모녀에게 이웃이 돼주지 못한 책임과 죄가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 사회적 안전망의 허술함을 살펴보고 메꾸고자 하는 교회의 섬김과 봉사의 구조 속에도 구멍이 크게 나있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하고 민간 사회복지단체의 책임으로서 디아코니아적이든 인도주의적이든 결코 책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세 모녀의 자살은 곧 사회적 타살이라는 해석이 있다. 사회적 책임이 크다는 것이다. 사회적 책임은 국가만의 책임은 아니다. 우리 모든 사회 구성원의 책임이다. 거기에 공공의 유익과 봉사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교회 공동체의 책임 또한 피할 수 없는 큰 책임이다. 우리 주변에 신음소리를 내고 아파하고 죽어가는 사회적 약자들이 얼마나 있는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살펴야 할 책임이 교회에 있는 것이다. 찾아오는 성도들만의 교회가 아니라 지역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유심히 살펴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찾아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주어야 하는 것이다. "너도 가서 이와같이 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디아코니아 섬김은 영생을 얻는 길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며, 종말론적인 신앙인 것이다.

이승열 목사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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