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없는 믿음 "신뢰 어렵다"

[ 특집 ] 특집

이장형 교수
2014년 03월 06일(목) 15:39

사회가 바라보는 교회 (3)윤리분야

1. 윤리에 대한 긍정적 이해 필요

얼마전 발표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한국교회 신뢰도 결과에서 유의미한 변화가 있기를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빗나가고 말았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교회를 신뢰하지 않고 있으며, 보다 더 윤리적인 공동체가 되길 요구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됐다. 사회봉사보다도 높은 윤리성 확보를 기대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됐고, 이는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 마련에 중요한 참고가 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인런 윤리적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가장 첫걸음은, 윤리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야한다는 점이다. 아직까지도 윤리를 강조하면 구약적인 율법주의, 형식주의, 공로주의 등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교리를 마치 선을 향한 도덕적 행위가 무의미한 것처럼 왜곡하는 경우가 많았고, 윤리를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도 게을렀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윤리는 교인들의 생활을 성숙하고 복되게 하는 매우 유용하고 절실한 본질적인 가르침이라는 확신과 긍정적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목회자들부터 이 문제에 대한 재정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위 '값싼 은혜'에 기인한 미성숙한 모습들이 계속될 것이다. 생활 속의 에티켓에서부터 사회정의와 공공선에 대한 논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윤리적 스펙트럼은 매우 넓지만, 모두가 외면할 수 없는 신앙인의 지향점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즉 윤리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버리고, 성숙하고 품위 있는 신앙인의 삶을 위한 가르침으로 강조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에서부터 한국교회의 윤리적 성숙이 시작되며, 기독교에 대한 윤리적 인정이 시작될 때 한국교회의 회복과 성장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2. 성속의 이분법 극복

영적이라는 말처럼 귀하면서도 위험한 말도 없을 것이다. 상당히 남용되고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소위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별은 이원론적인 중세기적 태도에 기인한다. 물론 이런 구별은 삶의 태도나 지향이라는 총체적인 면에서 꼭 이루어가야 하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구분은 구체적인 어떤 일이나 직업 그 자체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구분되는 시대는 지나갔다. 그런데 아직도 기독교인들의 삶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이런 이분법적인 태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마틴 루터는 성속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원형을 제시하고 있다. "교황, 사제, 수도사들을 영적 계층이라고 부르고, 영주들, 직공들, 농부들을 세속적 계층이라고 부르는 것은 날조된 것"이라고 했다. 모든 진실된 삶을 사는 기독교인들은 진실로 영적 계층에 속하며 어떤 차이도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이다. 생각해보면, 1517년 마르틴 루터의 개혁운동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사실 '개혁(Reformation)'운동 이었다. 즉 개혁은 종교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를 향해 퍼져 나갔다는 점이다. 종교는 종교 자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항상 상기해야 한다.

3. 직업 소명에 대한 재이해

성속의 이분법을 극복하는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직업에 대한 이해와 연관된다. 한국의 기독교를 약화시킨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직업'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데 있다. 즉 신앙과 삶이 분리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직업에 대한 소극적인 이해라는 점이다. 사실 직업은 중세기까지는 그 의미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 즉 소수의 성직자들만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며 대부분 사람들은 가치 없는 일에 매달리는 죄악 된 형태의 삶을 살아간다는 이원론적 구도가 팽배해 있었다. 이런 면에서, 종교개혁가 루터의 삶은 직업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새롭게 하고 직접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는 가정, 국가, 직업,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의 질서를 이루는 주요 기관이라고 보았다. 성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사용되는 모든 일들이 성직이라는 '만인제사장직'을 주장했던 것이다.

신앙인들은 모두 세례를 통하여 사제의 서품을 받았음을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통해 재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신학적인 면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직무에 관한 차이이지 결코 신분적인 것이 아님을 지속적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다.

4. 목회자의 전문성, 윤리성 확보

만인제사장직을 주장한다고 목사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그 직종 자체가 영적 권위를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동기와 태도로 그 일을 담당하는가가 중요하다. 특히 마르틴 루터는 개혁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혁 대상은 종교적인 책임자임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 목사들이 윤리적으로 갱신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거듭남은 기대할 수 없다.

목회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한다. 그래서 수업 연한도 길고 선진국에서는 종교와 상관없이 목회자에 대한 기본적인 존경도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학교가 80년대 이후 목회자 양성 코스의 수업 연한을 늘였다. 그러나 과연 잘 훈련된 목사후보생들을 배출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우리의 신학이 교회 현장에서 목회자로서 바르게 설교하며 목회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과 소양을 훈련하여 내보내는 충실한 과정이 되고 있는가? 성경의 교육, 교회의 역사와 교리 이해, 적용과 실천을 위한 다양한 훈련과목 등을 통전적으로 개발하고 적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아직도 공부와 훈련에 전념하지 못하는 교육 환경에 처한 신학생들이 많다. 큰 꿈을 갖고 입학했지만 학비 마련과 사역(교회 봉사)이라는 미명 하에 교육전도사 혹은 유급 봉사자에 치중해서 마땅히 우선해야 할 공부와 훈련의 기회를 놓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목회 실습부분은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체계적인 계획 아래서 선배 목사, 그야말로 '목회 트레이너'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의과대학생-인턴-레지던트 등으로 이어지는 의료인력 양성 체계와 비교가 된다. 혹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과도하게 많은 학위과정과 목회 관련 세미나에 눈을 팔게 되는 것은 아닐까?

5. 품위 있는 목사와 기독교인 되기

기독교인의 윤리를 강조하면서 경계할 점은 기독교가 이 사회에 제대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고해서 대안 없는 윤리적 판단과 자조로 일관한다면 더 큰 '상처'와 '분열'을 가져오기 쉽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가 윤리적으로 허약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윤리가 율법적 완성 혹은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인상을 주었기에 복음이나 은혜와 배치되는 것으로 오해된 경향도 있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그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교회는 교회 만이 갖는 특별한 종교적 권위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즉 사회적 변화를 위해서도 영적 변혁, 종교적 변혁이 우선적으로필요하며, 이는 리처드 마우가 지적한 소위 '비일상적인 정중함'을 통해 무례함을 극복할 때 가능한 것이다.

목사들은 막연한 영적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철저한 전문인으로서의 윤리 의식이 수반될 때 교회 내외에서 인정을 받게 된다. 교인들은 자신의 고유한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고 귀한 결실을 거두게 될 때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 윤리적 각성과 품위 회복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귀한 '착하고 충성된 종'이 돼야 교회에 대한 신뢰는 회복될 것이다.

이장형
백석대 교수ㆍ기독교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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