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성지로서 지역의 중심축이 되다"

[ 우리교회 ] 경북노회 대구제일교회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4년 02월 25일(화) 11:08
   
▲ 대구제일교회는 대구 지역의 모교회로 만세운동을 이끈 민족 교회로 지역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신명학교 북쪽 큰 장터에서는 긴장한 표정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었다. 그중에는 대구 시내 교회의 목사들과 장로, 교인 및 학생들이 많았다. 오후 2시 즈음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의 이만집 목사와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은 품 안에서 독립선언문을 꺼내 읽자 거동을 살피던 경찰이 이를 빼앗았다. 그러자 이만집 목사는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독립을 할 수 있는 때입니다. 각자가 독립을 성취할 수 있도록 만세를 부릅시다"라고 말한 뒤 힘껏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에 함께 모인 이들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위의 기록은 경북노회 대구제일교회(박창운 목사 시무) 110년 사에 기록된 1919년 대구지역 만세운동 당시의 모습이다.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의 뜨거운 열기가 7일만에 대구지역에 전달되어 만세 운동으로 전개되기까지 대구제일교회는 거사를 위한 실질적인 사무실 역할을 했다. 당시 담임목사였던 이만집 목사와 대구제일교회에서 분립한 남산교회의 조사 김태련이 거사의 총책이었고, 교인들도 대거 참여했던만큼 대구제일교회는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성지와도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만세운동으로 담임인 이만집 목사는 3년 형을 받고 옥에 투옥되고, 여러 성도들이 고통을 받았지만 1920년 1월 6일 안동에서 열린 제8회 경북노회에 보고된 대구지방 시찰위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소속교회에서 회집하는 교인의 수는 전보다 대단히 증가되었사오며…새벽기도하는 열심이 크게 일어남으로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항상 그치지 아니하오며"라고 기록되었을 정도로 대구제일교회는 지역주민들의 신뢰를 얻고, 교인들은 고난 받는 담임목사와 교인들을 위해 기도에 힘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건 이후로 대구제일교회는 대구지역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종교와 종파를 넘어 신뢰하는 지역의 중심축이 되었다.
 
그러나 선배들의 희생을 통해 얻은 엄청난 무형의 유산이 현재로 이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법. 다행히 피와 땀으로 얻은 무형의 유산은 지금까지도 대구제일교회가 지역주민들, 그리고 지역교회들과 관계를 맺어 가는데 '우리교회보다 지역과 지역과의 협력이 우선'이라는 통 큰 마음씀씀이로 이어지고 있었다.
 
최근 교회의 빔프로젝트와 스피커 시설을 교체한 일화에서도 이러한 '지역 우선'이라는 원칙을 확인할 수 있다. 대구제일교회는 오랫동안 화면과 소리의 질이 떨어지는 시설을 '약간의 불편은 감수하자'는 의미에서 교체하지 않고 사용해왔지만 지역행사와 교회 연합행사에 교회를 대여해주면서 "화면이 흐리다", "마이크 음향이 좋지 않다"는 소리가 나오자 그동안 교체하지 않던 시설을 새롭게 해 교회를 이용하는 이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게 했다.
 
이뿐 아니다. 대구제일교회는 지역의 교회 연합체에서 행사 참여를 요구할 때 행사의 성격이나 강사가 너무 이상하지 않으면 연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 모든 게 "1919년 사(私)를 내려놓고 대(大)를 위해 연합했던 경험이 무형의 자산으로 내려오기 때문"이라는 게 담임 박창운 목사의 설명이다.
 
   
▲ 담임 박창운 목사.

사실 대구제일교회는 자랑할 것이 너무 많은 교회다. 미국 북장로교의 파송을 받은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1893년 대구선교기지로 세워진 대구경북지역의 최초의 교회이고, 대구 지역 유수의 교회들이 대구제일교회가 세웠거나 이곳에서 파생됐다. 복음적으로도 모교회로서 그 위치가 확고하고, 지역발전의 측면에서도 YMCA 등 여러 근대시설들이 대구제일교회에서 생겨났을 정도로 근대화의 산실 역할을 해왔다. 지역민들을 위해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지역민들을 위해서라면 교회 내어주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인근의 중학교의 교육을 위해 협력하기도 하고 탈북민들을 위해서도 모임의 장소와 재정을 제공한다. 
 
그러나 대구제일교회의 가장 큰 장점은 과거의 기억에만 안주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대구제일교회는 지금 사회가 요청하는 필요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개교회주의를 넘어 지역사회를 섬기고 있다.
 
1994년 현재의 교회 터로 이전할 때도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교회 및 부지를 팔아야 했음에도 역사적으로 귀중한 옛 교회당을 팔지 말라는 지역과 교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지역주민을 위한 역사 박물관으로 남겨놓았다.
 
자신의 유익보다는 이웃과 타인들을 생각했던 선배들처럼 새생명 살림 프로젝트를 통해 재정적 도움이 없으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는 지구촌의 어려운 이들을 초청해 치유해주고 있다. 박 목사는 "시각장애인, 관내에 있는 몸 불편한 분들 등 우리 눈에 들어오는, 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이들은 최선을 다해 돕고 있다"고 말한다.
   
▲ 대구제일교회의 구예배당 모습.

 
역사가 긴 만큼 내부적으로도 성숙해지는 과정을 겪었다. 교회 이전 시 역사적인 교회당을 떠날 수 없다며 끝까지 교회 이전을 반대하며 자체적으로 구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려온 성도들을 힘이나 수적우위로 누르지 않고 재정적인 지원과 예배를 위한 목회자까지 매주 지원했다. 그 기간이 무려 20년이었다. 지난해에야 남은 교인들이 모두 새로운 교회당으로 들어와 예배를 드리게 됐다.
 
이러한 지난하고 불편한 과정을 참을성 있게 상호존중의 마음을 통해 해결하면서 교회는 내부적으로 더 단단해졌다. 내재화 된 좋은 전통이 있는 교회가 어려움에도 깨어지지 않고 더욱 단단해지는 기회로 만드는 저력을 보인 것이다.
 
박 목사는 "앞으로도 교회는 연합운동과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만족과 기쁨, 대사회적 영향 속에서 우리 일들을 놓치지 않는 교회가 되기 위해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교인들의 다짐을 재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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