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이야기】④ 정교회와 WCC (1)

[ 연재 ] WCC 창립 이전에 이미 교회연맹 구상한 정교회, WCC에서 가장 큰 비중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2014년 02월 24일(월) 16:11

정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라는 국제 에큐메니칼 기구가 생기기 전부터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관심을 가졌었다. WCC 초대 총무를 지낸 비셔트 후프트 박사의 저서 '세계교회협의회 기원과 형성'에는 1919년 1월 10일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성회에서 당시 윌슨 대통령이 제안했던 '국제연맹'을 모델로 '교회연맹'을 설립하자는 내용을 담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명의의 회람문서를 전 세계 정교회 공동체에 발송한 바 있다. 교회연맹에 대한 정교회의 이같은 독자적인 관심과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19년 4월, 스웨덴 교회 대주교인 죄더블룸이 '에큐메니칼 교회 연합회' 구성을 제안했다. 이 두가지 사건을 시간순으로만 봐도 교회들의 국제 연맹체에 대한 관심의 시발점은 사실상 정교회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죄더블룸 대주교는 '교회연맹'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힘을 모은다. 1919년 9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교회를 통한 국제 우호 증진 세계연맹'에서 죄더블룸은 '에큐메니칼 세계선교협의회'를 창설하고자 하는 계획을 언급했고, 1920년 발표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회람문서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담기면서 '교회들의 국제연맹'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다. 이 회람문서에서 총대주교는 '교회들의 친교'를 강조했으며, "어떤 교리적 차이점에 의해서도 교회들 간의 친교와 협력을 위한 노력이 저해될 수 없다"고 밝혀 이후 WCC 운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교회의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은 서방 교회와의 신학적인 대화보다는 '삶과 봉사'(Life and Work)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결과적으로 현대 교회일치 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정교회는 1948년 WCC 1차 총회 때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와 사이프러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대표단을 파송했으며, 1961년에서 열린 WCC 3차 총회 때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대규모의 러시아 교회 대표들을 이끌고 참여하면서 WCC 내에서 정교회의 비중이 확대되기 시작한다. 1961년을 기점으로 1965년까지 모든 정교회가 WCC의 회원이 됐고 현재는 WCC 안에서 단일교파 교회로는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해 열렸던 WCC 10차 부산총회 때 선출된 150명의 중앙위원 가운데 정교회에는 가장 많은 수인 38명(전체 25%)이 배정됐다. 그만큼 WCC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정교회가 WCC를 중심으로한 국제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뉴델리 총회 전까지는 정교회 안에서도 WCC에 대해 적지않은 비판이 있었고 WCC가 발표한 일부 문서들에 정교회가 서명을 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2차 총회 때는 정교회 대표들이 따로 모여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정교회는 "우리들은 단일하고 나뉠 수 없는 옛 교회와 7개 공의회의 신앙, 즉 순수하고 변화되지 않은 공동의 유산으로 복귀하는 것만이 모든 분열된 기독교인들이 염원하는 재통합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모든 정교회가 WCC에 가입하기 시작한 1961년 이후에는 이같은 선언문을 발표하는 일을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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