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2월24일~3월1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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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2월 18일(화) 14:27

월-딱지 좀 뗍시다!
본문 : 눅 17:11~21
찬송 : 308장

붙여야 할 딱지가 있는가 하면 떼어내야 할 딱지가 있다. 붙여야 할 딱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딱지, 그래서 감격과 감사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딱지이다. 그러나 떼어내야 할 딱지도 있다. 그것을 찾아보고 과감하게 떼어내도록 하자.
 
첫째, 관찰해보자.
 
왜 하필 나병환자를 대상으로 감사의 문제를 다루시는가? 왜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을 고쳐주셔서 "많은 사람가운데서 제가 고침을 받았다"고 감격하는 방법을 취하시지 않고, 열 명을 다 고쳐주시고는 감사하는 자와 감사하지 않는 자로 구분 짓는 것일까? 왜 아홉 사람은 감사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한 사람은 왜 감사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했느냐 하는 것이다.
 
둘째,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자.

11, 12절을 보면 10명의 나병환자의 신분은 유대인, 사마리아인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13절에서는 '우리'로 부른다. 놀랍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평등하고 나병이라는 딱지가 붙게 되니 평등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딱지도 떼어내어 주시고, 나병이라는 딱지도 떼어 주신다. 예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신분도, 죽음도, 나병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두가 평등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난으로 인해 '우리'가 되었다가 그것도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감사의 일로 '우리'가 깨어지고 만다. 또한 소수와 다수의 문제이다. 감사하는 자는 소수에 그치고 감사하지 않는 자는 다수로 나타난다. 왜, 다수일까? '나'만 아니라 '저들도 다'라는 고침의 희귀성이 사라진 것이다. 또한 이방인도 고침 받았는데 유대인인 자신들이야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그 당연의식이 감사를 몰아내어 버린 것이다. 이게 문제다.
 
셋째, 감사없는 태도에서 돌이키자.
 
지금까지 은혜를 베푸신 후에 예수님은 왜 감사하지 않느냐 따진 적이 없으셨다. 그런데 오늘은 예외다. 너무 안타깝다. 예수님은 은혜받은 우리가 감사를 아는 인생이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교만했고, 하나님께 영광도 감사도 돌리지 않았다. 감사가 없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 감사가 없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된다. 부디 무감사의 딱지를 떼어내고 감사를 표현하자.
 
오늘의 기도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 우리 가운데 있는 자랑스럽지 않은 것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붙여서는 안 될 딱지를 과감하게 떼어버리게 하옵소서. 주변에 나보다 낮은 자를 낫게 여기고 주님이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한 것을 기억하며 늘 겸손하고 주변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비교하지 않고 나보다 잘된 사람에게 질투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일상에도 감사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유석균 목사
/병영교회


화-나의 마음은?
본문 : 마 13:1~8
찬송 : 424장

오늘은 우리의 마음 밭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자. 본문에 나타난 심리는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다.
 
첫째는 길바닥 심리(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딱딱한 마음, 굳은 마음으로 씨앗이 뚫고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기준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정해놓은 틀(자)을 가지고 타인의 자가 자신의 자보다 크거나 작으면 나쁜 것으로 간주했다.
 
두 번째는 바윗 덩어리 심리(마음)이다. 이 마음은 말씀이 들어와 봤자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계셔야 되는데 그 중심에 감정의 응어리가 차지하고 있는 경우 이것이 바윗덩어리 심리이다. 그러면 이 바윗덩어리는 언제 들어오는가? 어린 시절 누구에겐가 주눅이 심하게 들었을 때 들어온다. 우리 마음속에 응어리가 해결되지 않고 들어 있을 때 이것이 독기가 되어 우리를 해치고 다른 사람을 해친다. 자신의 응어리를 알고 치유해야 한다.
 
세 번째로 가시덤불 심리(마음)이다. 가시덤불이란 나의 생명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요인이다. 한 의사 가정이 외국산 자동차를 구입하자 옆집에 사는 사람들이 왜 우리는 못 사는가 라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경우이다. 나의 에너지를 누구에게, 무엇에게 쏟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자신을 정리하고 기도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쓸데없는 가시덤불에게 주지 않으면 에너지가 우리 안에 넘치기 시작해서 아량이 생기고 상대방을 끌어안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네 번째로 옥토의 심리(마음)이다.
 
옥토의 심리란 새로운 존재의 심리이며, 구원받은 심리요, 치료함 받은 심리요, 천국사람들의 심리이다. 옥토의 심리는 인간의 본 모습인데 마태복음 18장 1-3절에 나온 어린이의 모습에서 만날 수 있다. 옥토의 심리는 어린아이처럼 티 없이 놀고, 티 없이 울고, 티 없이 웃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과의 화해가 일어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은 병들어 있는 사람, 사탄과 또 다른 요인에 의하여 잠들어 있는 생명력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사람의 변화는 언제 일어나는가? 그것은 생명력이 깨어날 때 가능하다. 즉 사람은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기에 자신의 생명력 일부만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왜 생명력이 안 나타날까? 그것은 자신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도 인간일 뿐이라는 인식과 나 자신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오늘의 기도

나 자신을 바로 알아 생명력을 깨워가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상영 목사
/창대교회


수-담대한 신앙의 모습
본문 : 단 5:17~29
찬송 : 353장

본문은 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의 성전 기명모독사건으로 인한 바벨론 제국의 멸망을 통해 여호와만이 전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구속사의 진리를 말하며 죄성에 오염되어 교만한 자와 죄악된 세상을 향해 경고를 하고 있다.
 
느부가네살의 교만함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높여 교만하게 행하였던 벨사살왕에게 멸망이라는 최종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한 다니엘의 담대한 신앙을 살펴보자.
 
벨사살왕은 완악한 마음을 소유한데다가 정복자로서의 우월감에 사로잡혀 느브가네살이 경외하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경멸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마음을 낮추지 않고 교만하게 행하였다. 다니엘은 하나님만 바라본 사람이었다. 다니엘은 신비한 손가락이 왕궁벽에 쓴 글자를 하나님의 지혜로 해석하였으나 벨사살이 제공하겠다고 하는 상을 마다한 청렴결백함까지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 조건없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선지자로서의 참된 모습과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자로서의 능력을 복합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벨사살왕이 왕궁벽에 쓰여진 글을 해석하기만 하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드리워주고 나라의 셋째 치리자로 삼겠다는 약속을 정중히 사양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죽음을 무릅쓰고 전했다. 그는 자신의 선한 의도를 오해할 수도 있는 벨사살의 상품을 분별하여 취하지 않았으며, 신하로서 왕에게 봉사해야 할 자신의 직분과 하나님의 말씀을 잘 풀어내는 선지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다.
 
자신의 안락을 도모하기 보다 온전히 하나님만 드러낸 다니엘은 사람이 주는 복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더 기뻐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믿음과 사명보다는 물질을 더 사랑하는 오늘날 우리는 다니엘과 같은 담대한 믿음 안에 거해야 할 것이다. 다니엘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한 사람이었다. 벨사살왕은 다니엘 한 사람쯤은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고 다니엘이 전해야 할 사나님의 뜻은 바벨론나라의 멸망이며 왕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소명감 없이는 할 수 없으며 믿음을 요구한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전우주적인 통치를 담대하게 선포했고 벨사살왕의 죄를 낱낱이 말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담대하게 하나님의 음성만을 듣고 따라가야 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교만한 삶을 살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로 겸손한 희생의 삶을 살게 하시고 모든 문제들을 주님의 뜻과 섭리대로 순종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원선화 목사
/로뎀선교교회


목-하나님의 뜻 찾기(4)
본문 : 요 6:38~40
찬송 : 500장

 사람 관계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알고행동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이 함께 살면서 서로 마음을 헤아리면서 산다는 것이 참 힘들지만 그것이 서로에게 힘을 주고 행복을 준다. 그렇지 못할 때는 스트레스가 된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어떠한가? 하나님은 나로 인해 기뻐하실까? 아니면 스트레스를 받으실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가에 달려 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며 기뻐하신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바라보기만 해도 기쁨이 되는 것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행동한다면 아마도 우리를 향한 기쁨이 더하실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예배만 드린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에 근심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인의 제사이다. 그는 하나님이 받으시든 안 받으시든 그저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났다. 속으로는 우상을 섬기며 형식적으로 제사만 드리는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하고 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단한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행동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찾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다. 이것이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예수님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아간 사람은 없다. 그분은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삶을 드렸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보게 된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38)." 하나님의 뜻은 '한 영혼이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생은 너무도 불쌍한 존재들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게 되면 마음 속에 긍휼의 마음이 든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그 은혜를 알지 못한 세상을 바라보면 마음에 안타까운 마음, 긍휼의 마음을 품는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긍휼을 회복해야 한다.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한 애타는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전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며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일이다.
 
오늘의 기도
 
세상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하게 하소서. 그들을 향해 자신을 내어 주기까지 하신 주님을 따라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영호목사
/용산교회


금-지혜가 광대하신 하나님
본문 : 사 28:26~29
찬송 : 375장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이 어떻게 빚어져야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계신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다 알면서도 나를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너무 괴로울 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마음이 상할 때,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럽고 갈등이 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면 오해하는 일이 없게 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기 위해선 이사야 28장 23~29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농부가 향료인 소회향과 대회향을 어떻게 심고 기르는지, 어떻게 타작하는지에 대해 나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참으로 지혜로우시고 섬세하신 하나님을 보게 되는데, 지혜로운 하나님께서 농부에게 씨앗을 심고 기르고 타작하는 방법들을 직접 다 가르쳐 주셨다는 것이다.
 
또 27~28절을 보면, 갖가지 씨앗을 심었는데, 종류에 따라 타작하는 방법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볼 때는 그냥 다 풀떼기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그것들조차도 하나님은 각각 따로 관리하시고 돌보시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다스리시고 이끄시는 방법도 모두 다르다. 소회향은 도리깨가 아닌 작대기로, 대회향은 수레바퀴가 아닌 막대기로 떨어내는 것처럼, 우리의 삶 역시 하나님의 손길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내.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각각 다른 방법으로 돌보신다"는 것이다. 가끔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베푸신 은혜가 부러울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직장이 탄탄해서 일찌감치 자리를 잡아놓고 편안한 노후를 예비해 둔 것 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은 자녀가 취업도 잘 되고 결혼도 잘해서 속 썩는 일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사람은 고민도 없어 보이고 항상 싱글벙글 한 것 같아서 얼굴만 봐도 기가 죽고 배가 아플 수도 있다. 나만 사방이 막힌 것 같아 불안하고, 나만 불행한 것 같이 느껴진다.
 
그렇게 속상한 마음이 들 때, 기억할 것은, 지금 내가 부러워하는 그 사람의 그 은혜는 그 사람에게만 가장 잘 맞는 방법이다. 나에게는 나에게만 맞는 하나님의 방법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사람과 나는 길이 다르기에, 하나님의 기대가 다르고, 하나님의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빨리 깨닫고, 인정하며,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고 믿음의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분이 하시는 일은 기묘하며 그분의 지혜는 광대하신 분이시다. 그분께 나의 인생을 맡기면 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삶은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믿음,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제 안에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강위현 목사
/청주 대청교회


토-주님의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하라
본문 : 요 13:1~11
찬송 : 448장

사람들이 일평생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몇 가지 유형을 띄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각자가 자기만 이렇게 어렵게 고생스럽게 산다고들 생각한다. 과연 나만 이런 어려움을 겪으며 살고 있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지금 가장 어렵고, 고민되고, 괴롭고, 힘들고,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마음이 갈팡질팡 하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 정말 나만이 힘들까? 세상에서 나만 가장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까? 개개인의 삶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내가 겪는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우리는 확실하게 모르는 가운데서 이런 일을 겪지만 예수님은 확실하게 아시면서 이런 일을 겪으셨다.
 
생각해 보라. 자신을 죽이는 대가로 은 30을 받은 가롯유다를 데리고 함께 생활한다는 것, 나라면 할 수 있을까? '나를 죽이라고 돈 몇 푼을 받고 내어줄 놈'이라는 생각에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편안하게 잠을 잘 수도 없을 것이고 '나를 팔아먹을 놈' 생각에 피가 마르는 삶이 될 것이다.
 
본문 1절 말씀을 읽어보자.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가롯 유다의 배반으로 죽음의 자리로 팔려가시는 것을 아셨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을까? 눅 22:42, 눅 10:21, 마 7:21, 마 11:26, 마 12:50, 요 6:40, 갈 1:4절을 읽어보면 답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오직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셨기에 가능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갈 수 있고,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되며, 영생을 얻고, 아들을 보고 믿고, 부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당연히 아버지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보고, 생각하고, 행하게 된다. 삶이 아버지의 사랑에 의한 삶이 된다.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삶이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며, 사랑하는 자의 삶이다. 그러므로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도 끝까지 사랑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유경종 목사
/광주명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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