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속에서 총회 선교사로

[ 선교 ]

염신승 선교사
2014년 02월 14일(금) 10:45

 볼리비아는 언어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공용어인 스페인어, 내가 사역하던 꼬챠밤바를 중심으로는 께츄아어, 잉카유적지 근처인 수도 라빠스는 아이마라어를 쓴다. 물론 소수 부족어도 있다. 스페인어가 조금 익숙해지면서 선배 선교사님들의 도움으로 현지 교회를 개척하게 됐다. 이름은 '알또 꼬챠밤바교회'. 해발 2,500미터인 꼬챠밤바에서도 더 높은 달동네 교회였다. 예배에 오는 교인들의 30% 이상은 신발도 없었다. 물도 부족해 물차가 싣고 온 물로 식수를 먼저 구별한 뒤에는 세면과 설거지, 빨래를 모두 재활용해 하고 나면 결국 새까만 물만 남는 동네였다. 화장실은 다섯 집에 한 곳 정도 있었다. 비는 1년에 한 달 정도 내리고 나머지는 먼지만 날린다.
 
  볼리비아로 떠나기 전 부친 이삿짐도 깜깜 무소식이었는데 여섯달쯤 지났을까, 한국서 부친 뱃짐을 하역한 칠레에서 '공매처분 직전'이라는 연락이 왔다. 바다가 없는 볼리비아에서 배로 실어 보낸 화물이 제대로 올리 없었다. 서둘러 칠레 비자를 받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고 한달쯤 지나서 "모두 공매됐다"는 연락만 받았다. 아이들 옷이며, 목사 가운, 생필품까지 몽땅 날렸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선교헌금도 바닥 났다. 그러던 중 교단 파송 선교사의 자격을 얻기 위해 일시 귀국했다. 후원교회를 만나는 것도 무척 어려웠지만 교육전도사로 사역했던 노량진교회의 림인식 목사님이 선뜻 후원을 약정해 주셨다. 그리고 총회 파송장 202호를 받았고 아내는 203호를 받았다.
 
  총회 선교사로 파송되면서 약정서를 쓸때 우선 5년을 청원했다. 볼리비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할 의대 공부를 잘 마무리 하기 위해서였다. 예비 시험을 통과하고 정식으로 의대생이 되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역시 의학공부는 쉽지 않았다. 후원교회에서는 공부를 하는 동안 사역을 안 해도 좋다고 양해해 주셨다. 점점 학습량은 많아지고 사역과의 충돌이 발생했다. 해부학 시간엔 골반뼈를 들고 100여개에 달하는 뼈 부위를 스페인어로 외워가며 중간 시험들 치렀다. 점수는 좋았다. 그러나 가정도 돌봐야 하고 사역을 도외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과중한 학업까지 병행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두통이 시작됐다. 기도했다. 그리고 목사 선교사 한 길만 걷기로 결정했다.
 
  하나님께서는 볼리비아 선교사로 나선 저희 가정에 커다란 선물을 주셨다. 볼리비아에 도착하고 5개월 후 임신을 하고 이듬 해인 1991년 6월에 삼대독자를 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아들은 건강하게 태어났다. 볼리비아 국적을 가졌다. 모유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다. 그런데 백일이 돼 오면서 뭔가 이상했다. 먹지도 않고,  토하고  열이 났다.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보란다. "심장이 이상하다"는 의사의 진단결과였다. 소개를 받아 심장 전문의를 찾아갔다. 이제 겨우 백일된 아이를 두고 정밀 검사를 했다. 심전도 검사를 한다고 손가락, 발가락, 가슴 등에 색색의 호스인지 전깃줄을 붙였다. 검사 결과가 나왔다. '심장 심실 중격 결손'. 심장 발육이 덜 되어 심실이 막히지 않아 생기는 병으로 그냥 두면 발육장애, 기형, 지적 장애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 검사 결과를 믿고 싶지 않았다. 부인하고 싶었다. "오, 주님..."

 본교단 파송 태국 염신승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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