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고통당할 때 무신론자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 목회·신학 ]

김도훈 교수
2014년 02월 07일(금) 17:44

이 시대의 기독교, 변증이 필요하다 2

변증적 관점에서 본 악의 문제와 하나님

<전문> 기독교는 이 시대를 향해 던지는 질문에 응답해야할 자리에 서 있다. 본보는 이 시대에 던져진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변증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자인 김도훈 교수(장신대)의 글을 싣는다.

무신론자들이 전보다 훨씬 더 활개 치는 세상이다. 역사적으로 무신론이 없었던 시대가 없었으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러나 요즘 무신론자들의 생각이나 행태는 안타까운 수준이다. 그들은 기독교를 증오하고 박멸하고자 온갖 짓을 다한다. 무엇보다 그들의 저술들을 보면 분노와 왜곡과 거짓과 오도로 가득 차 있다. 의도적으로 무신론은 좋은 점만, 기독교는 무조건 나쁜 것만 열거하고, 통계를 왜곡 해석한다. 루이스의 말대로 여섯 살짜리의 기독교를 만들어 놓고 증오심에 불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무차별 공격한다. 슬픈 것은 기독교나 신학에 놀랄 정도로 무지하다는 점이다. 권위 있는 신학서적 한 권 제대로 읽지 않고 비난해대는 모습이 안쓰럽다. 무신론의 책들은 장광설을 늘어놓지만 결론은 하나, 하나님이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복창한다. 하나님 선하시고 전능하신데 도대체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하고. 이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으므로 결국 모든 종교적 체험이나 하나님 개념은 뇌의 부산물이고, 진화의 산물이라고 본다. 그 뇌는 누가 창조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심지어 그들은 과학으로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필자는 여기서 악의 문제에 좀 더 집중할 것이다. 이 문제를 신학적 관점보다는 변증적 관점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첫째,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말할 수 없다면, 고통 속에서의 좌절과 절망이 아닌 희망을 획득하기 위해서 도대체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고통과 고난이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한다고 생각한다면, 도대체 인간은 무엇을 통해 그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는가? 둘째, 악이 있으므로 하나님이 없다는 논리 자체가 성립하기는 하는가? 그 논리대로 한다면, 선이 있으므로 하나님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논증도 성립하기 때문이다. 악의 존재 유무와 하나님의 존재 유무는 논리적으로 관계 없는 문제다. 악이 없다고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고, 악이 있다고 하나님이 부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은 존재할 뿐이다. 셋째, 루이스가 지적한 대로, 이 세계와 우주가 질병과 폭력과 고통이 가득한 세계라면, 어떻게 해서 사람들은 악하고 나쁜 우주를 보면서, 선하시고 자비하시고 지혜로운 신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추론할 수 있겠는가? 넷째, 어찌 악의 문제를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무엇무엇을 악이라고 판단하는가? 물론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결국 그것이 선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이 판단하는 악이 꼭 하나님에게도 악인가 하는 문제다. 인간의 이성과 인식은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상 인간은 세상의 고통과 고난을 다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다. 더구나 그 문제를 하나님과 연관시킬 때는 인간의 이해의 한계가 더욱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도대체 왜 사람은 이 세상의 고난과 악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에만 관심을 갖는가? 악과 고통에 관심을 둔 나머지 왜 선과 행복과 기쁨의 문제는 간과하는가. 여섯째, 모든 고통은 악하고 나쁜 것인가? 고통이 반드시 악하고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악이라고 여겼던 것이 뜻밖에 엄청난 유익을 가져 올 수 있으며, 우리의 잘못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고통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 왜 우리는 모든 책임을 하나님에게만 돌리는가? 무신론자들의 말대로, 정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악들이 없어지는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이 세상에는 동일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고난과 악의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지 않다. 그 모든 악들을 막지 않았다고 해서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넘겨서도 안 된다.

여덟째, 악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면, 이 거대한 악은 결국 누가 만들어낸 것인가?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 책임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없다면 결국 그 악은 우연과 진화의 산물이다. 진화론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존재해야 종교를 비난하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데 더 유리할 텐데, 그들은 왜 그렇게 주장할까? 결국 그들은 논리적 모순을 범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악 때문에 도저히 하나님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악은 전적으로 진화의 책임이므로 진화가 있어서는 안 된다든지, 혹은 진화라는 자연 메카니즘이 없다고 해도 논리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홉째, 도킨스를 회심시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물론 그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질문이지만 한 번 던져본다. 재미있지 않은가? 틀림없이 그것은 바로 그가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고난의 경험일 것이다.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고난과 죽음 앞에서 최소한 한 번쯤은 죽음과 인생과 신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을까 해서다. 고난은 역설적 성격을 가졌다.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진리를 심득하게 하는 것은 고난이다. 한 번 돌이켜보고 질문해 보라. 인생에서 무엇이 자신을 성숙하게 하고 인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했는지. 기쁨과 행복이 더 많이 깨닫게 했는지 고난이나 고통이 더 많이 깨닫게 했는지.

열 번째, 하나님이 없다면서 왜 그들은 악을 말하며, 악의 문제를 묻는가? 악이 왜 인간에게 일어나는가는 도덕적 문제이다. 그들에게는 도덕이 없다. 기껏해야 그것은 이기적 유전자의 행동일 뿐이다. 운명적인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낙태, 안락사, 동성애 찬성자들이 대부분이다. 도킨스의 책을 읽어보라 거기서 무슨 도덕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도덕적 가치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이 도덕적 질문을 던진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 아닌가? 열한 번째, 왜 하나님은 당장 악을 제거하시지 않는가? 전능하시지 않아서도 아니요, 선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오래 참으시고 그들에게도 회심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들의 논리대로 한다면 하나님이 당장 악을 제거하신다면 도킨스와 같은 무신론자들부터 제거하실 텐데... 열두 번 째,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악을 막거나 제거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때의 전능은 누구의 전능인가? 인간의 소원이나 욕망을 들어줘야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말하지 마라. 비오게 해달라고 했는데 해가 뜨거나, 축구 경기에서 지거나 복권에 당첨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은 것인가? 전능은 하나님의 속성이지, 인간의 속성을 투사시킨 것이 아니다. 인간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다 들어준다면 세상은 카오스뿐일 것이다.

본대로, 무신론이 그들의 논리를 위해 늘 악의 문제를 유신론자들에게 던진다. 그렇다면 역으로 이렇게 질문해 보자. "너희들은 악의 문제를 해결했는가" 하고 말이다. 논리에는 '바가지 논리'라는 것이 있다. 자신들의 문제를 먼저 남에게 덮어 씌어 자신의 허점이나 모순을 적게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하려는 논리다. 이 문제가 바로 악의 문제다. 악의 문제는 무신론자들에게는 더 큰 문제다. 무신론의 해결보다는 유신론의 해결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질문했듯이, 우리가 그들에게 질문해보자. 인간이 고통당하고 삶을 통째로 도륙당할 때 무신론자 너희들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너희들은 그들에게 도대체 무슨 희망이 되었는가 말이다.

무신론자들이 악의 문제를 논하면서도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의 고통을 극복할 수 없다. 프로이트는 유대인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상실감, 적대감, 거부감의 고통을 당하면서, 그것에 대한 적개심으로 분노하며 살았다. 말년에는 구강암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의욕을 상실한 채, '언제 내 차례가 될지' 하다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는 고통에 직면했을 때 끌어다 쓸 영적 자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체념을 말할 뿐이었다. "신을 믿지 않는 운명론자로서 나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체념할 수밖에 없네." 결국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하고 말았다. "냉혹하고 사랑이 없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힘들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말이다.

한 번쯤 죽음을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행동하는지. 파선되어 가는 배에 목사가 탔다고 생각해보라. 본능적으로 그에게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이처럼 죽음 앞에서 희망과 위로를 주는 종교가 기독교다. 여기서 파스칼의 논증이 떠오른다. 논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존재 유무가 반반이라면, 하나님이 있다는 쪽에 인생을 거는 것이 옳은 게임이라는 논증이다. 만일 없다는 쪽에 걸었다가 죽어서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야말로 인생 쪽박이고 망하는 것이지만, 있다는 쪽에 걸었다가 하나님이 없어도 그리 손해볼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파스칼의 게임논증이라고 한다. 죽음 앞에서라면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게임이 아닌가.

김도훈 교수/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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