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선교지 방문기

[ 기고 ] 독자투고

정재훈 목사
2014년 01월 09일(목) 14:00

총회 역사위원회는 지난해 5월 19일, 1884년 언더우드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한 미국 뉴욕 라파예트교회에 가서 총회 해외선교기념지 제1호로 지정했다. 그 이후 제2의 선교사적지를 찾던 중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했다.

연해주는 우리 총회가 독 노회 때인 1909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제2회 졸업생인 최관흘 목사를 제주도 이기풍 선교사에 이어 두 번째로 파송한 옛 선교지이다. 조선후기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이주하면서 고려인의 연해주 이주 역사가 시작되었다. 블라디보스톡을 기점으로 시작한 최목사의 선교사역에는 곡절이 많았다.

1911년 총회에 보고한 문건에 의하면 그간 삼일교회 등 2개 처의 교회를 설립하였고 13개처 기도처를 세우기까지 그의 선교는 성공적이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이를 시기하여 자기네 산하(傘下)에서 선교할 것을 요구 하였다. 그는 백방으로 고뇌한 끝에 동족구원이란 대의적인 본래의 사명감에서 자신을 던지게 된다. 본국 총회의 허락도 없이 1912년 12월 10일 정교회에 가입하였다. 최 목사 행위에 대하여 총회는 문제를 삼았고 함경노회는 1916년 그를 제명하였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가 정교회로 넘어간 것이 극심한 핍박 때문이었고 오직 복음을 위해서 불가피했다는 것으로 양해한 함북노회는 최목사를 면직한지 8년만에 복직시켰다.

마침내 그는 장로교 목사직을 회복하여 우지미교회에 청빙되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그 후로는 그의 행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연해주교회가 문을 닫은 것은 1937년 가을부터이다.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강제이주명령으로 고려인 17만1781명이 어느날 갑자기 기차 화물칸에 실려서 6000Km나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끌려가고 말았다. 스탈린 공산주의자들의 극악한 만행이었다. 세월이 흘러 소련이 붕괴되었다. 삶의 터전을 쫓겨 난지 56년이 지나서이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생존한 1세들과 이들의 자손 3만 여명이 귀환하여 지난날 살던 곳에 정착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 선교사들이 들어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서 난관에 부딪쳤다. 새로 시행된 종교법에 의해서 15년 이상 선교한 증명을 제출하여야 선교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에서 사역을 시작한지 불과 수년에 지나지 않은 선교사들이여서 아주 난감하였다. 갖은 방법을 찾아 고민하던 중 15년 보다 6배나 더되는 100년 전에 최관흘 목사가 이 지역에 와서 선교한 것을 알게 되었고, 고증을 찾아 당국으로부터 인증을 받게 되었다.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 전 지역에 선교가 가능하게 된 것은 오래전에 최목사가 밑거름이 되어 터전을 닦아놓은 헌신과 희생의 덕택이었다. 아쉬운 것은 한국교회와 우리 총회마저도 최목사의 연해주 선교 사적과 실적을 상기하지 않았고 잊어버린 상태이다.

3박4일 동안 최 목사의 흔적을 둘러보며 그가 건축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삼일교회 예배당 건물도 보았다. 정교회 교회당과는 전혀 다른 건물 형태인 것으로 보아 뚜렷한 물증은 없지만 최목사가 손수 지었을 것으로 믿어졌다. 현지인들도 하나같이 비슷한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 건물에는 러시아인 여러 세대가 살고 있어 어떻게 접근할 방도가 없다는 우리 선교사들의 하소연이다. 현 시가로 10억 정도라 하니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릴 뿐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교회당을 우리의 것으로 이전받아 러시아 선교역사의 산실(産室)이 되도록 총회 세계선교부에 제언하는 바이다.

필자는 최관흘 목사의 선교 기념비를 블라디보스톡 신학교에다 세우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또한 선교사적지로 총회에 청원하도록 일행들과 뜻을 모았다.

총회 역사위원장 정재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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