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기독신춘문예 동화 부문 당선작, 후드티만 입는 아이

[ 제15회 기독신춘문예 ]

민병숙
2014년 01월 08일(수) 09:58

   
▲ 그림 : 지민규

덜커덩.
 
현관문 돌리는 소리가 났다.
 
"우빈이 이눔, 문 열어!"
 
아빠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나는 벌떡 일어나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술 냄새가 집 안으로 확 들어왔다.
 
"이 녀석이, 아빠 왔는데 어디 간 거야!"
 
아빠는 비틀비틀 신발을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때다. 나는 잽싸게 밖으로 뛰쳐나왔다.
 
쿵.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금방이라도 아빠가 따라 올 것만 같았다. 후다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와 한참을 더 달렸다. 얼마쯤 달렸을까? 숨이 턱까지 차고 나서야 멈춰 섰다.
 
'어디로 가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빠가 잠들 때까진 어딘가에 가 있어야 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맨 발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졌다.
 
티셔츠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썼다. 역시 후드티는 내 소중한 친구다. 보기 싫은 것, 보이기 싫은 것을 가려줄 뿐 아니라 비로부터도 날 지켜주니 말이다.
 
나는 언제나 후드티만 입는다. 셔츠에 붙어있는 커다란 후드를 쓰고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수업 시간에도 노는 시간에도 더워서 땀이 뻘뻘 나도 나는 이 후드를 벗지 않았다. 
 
이런 나를 아이들은 우빈 후드라고 부른다. 동화책에 나오는 로빈 후드랑 닮았다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셔우드 숲에 숨어 살았던 로빈 후드나 후드티 속에 나를 꽁꽁 숨기고 스스로 왕따가 되어 사는 나나, 숨어사는 건 다를 게 없으니까.
 
가게들이 문을 닫을 시간이라 비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때 윗동네에 있는 교회가 생각났다. 문이 언제나 열려 있어서 가출 청소년들이 잠잘 곳이 없으면 찾아간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었다. 게다가 일층에는 쉼터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는 카페처럼 긴 소파도 있다고 했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교회로 갔다. 교회 문은 열려 있었다. 들어갈 용기가 안나 문 앞에서 쭈뼛거리고 있는데 어떤 부부가 옆구리에 책을 끼고 오고 있었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온 아이처럼 뒤따라 교회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그 사람들이 이층계단으로 올라갈 때 살짝 빠져선 계단 옆에 있는 화장실로 몸을 숨겼다. 잠시 뒤 나와 보니 일층은 불도 꺼지고 사람들도 없었다. 
 
나는 쉼터 제일 구석진 자리로 가서 소파에 누웠다. 팔하고 다리를 웅크리고 꼭 끌어안았더니 몸이 조금씩 따듯해져왔다. 
 
위층에선 노래 소리가 들렸다. 뭔가를 '주십시오, 주십시오'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어른들이 밤에 모여서 뭘 달라는 건지 궁금했다. 달라고 하면 다 주는지도 궁금했다.
 
'그럼, 나도 한 번 달라고 해볼까? 난 뭘 달라고 하지? 엄마 연락처를 달라고 할까? 아빠가 술 먹고 날 때리지 않게 해달라고 할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는데 이번엔 뚜우뚜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팔 소리인가? 가만히 듣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쭈르르 눈물이 흘렀다.
 
'엄마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훌쩍훌쩍 울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나보다.
 
"누쿠십니카?"
 
누군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덩치가 산만한 남자가 내 앞에 우뚝 서 있었다. 후드가 잠결에 벗겨졌는지 허전했다. 나는 더듬더듬 후드부터 썼다.
 
"난 요셉이라코 합니타."
 
덩치가 말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천천히 일어나 앉아 슬리퍼를 찾았다. 한 짝이 안 보였다. 요셉이라고 말한 덩치가 쭈그려 앉더니 소파 밑에서 슬리퍼 한 짝을 찾아 주었다. 하도 오래 신어서 발등에 있던 흰색 줄이 누리끼리하게 변한 슬리퍼다. 게다가 엄지발가락 부분은 꼭 엄지발톱 길이만큼 찢어져 있어서 신으면 자꾸 발가락이 옆으로 삐져나왔다. 나는 얼른 발을 집어넣었다. 꼬질꼬질한 슬리퍼 속에서 삐죽 나온 발가락들이 거뭇했다.
 
"왜 여키서 잤습니카?" 슬리퍼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던 덩치가 물었다. 나는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었다. 말해도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았다. 생긴 건 완전 토종인데 말하는 건 외국사람처럼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어둡던 창밖이 쪽빛으로 물들어갔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그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덩치가 날 물끄러미 보더니 내 손을 잡아당겼다.
 
"놔요, 난 잠만 잤어요. 아무 짓도 안했어요."
 
나는 경찰서로 끌고 갈까봐 눈앞이 캄캄했다.
 
"어? 말할 줄 압니카? 난 못하는 줄 알았습니타."
 
덩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손을 빼려고 손목을 힘껏 비틀었지만 소용없었다.
 
"밥 머크러 카십시오."
 
덩치가 나를 번쩍 들더니 옆구리에 끼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려 줘, 내리란 말야."
 
나는 자존심도 상하고 겁도 나서 두 손으로 덩치의 배를 마구 때렸다. 슬리퍼가 발가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떨어질 것 같았다.  덩치가 날 내려놓은 곳은 교회 식당이었다.
 
"퀀사니임, 배 코파요."
 
덩치가 어울리지 않게 애교를 부렸다.
 
"어서와요.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 한 분이 덩치를 보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늘은 투 사람 입니타."
 
할머니는 나를 쓰윽 보더니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많이 먹어라. 밥은 많이 있어."
 
한마디 건네고는 이것저것 반찬을 내왔다. 덩치가 고개를 숙이곤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식사기도를 하는 것 같았다. 급식시간이면 교회 다니는 애들도 그렇게 했다.
 
도망칠 기회였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때 덩치가 잽싸게 오른 손을 뻗어 날 잡아 앉혔다. 그러곤 내 손에 숟가락을 쥐어줬다.
 
"머큽시다."
 
덩치가 모락모락 김이 나는 하얀 밥을 한 숟가락 뚝 떠서 먹었다. 나는 숟가락을 든 채 어정쩡하게 앉아있었다. 구수한 된장국 냄새랑 금방 지은 하얀 쌀밥 냄새가 코 속으로 스며들더니 자석처럼 날 잡아당겼다. 나도 슬그머니 국을 떠서 후릅 먹었다. 따끈한 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더니 뱃속까지 따듯해 왔다.
 
"맛있어?"
 
할머니가 밥 한 그릇을 더 가져다놓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나는 들릴락 말락 "예" 대답하곤 밥 한 숟가락을 푹 떴다. 할머니가 내 밥 위에 구운 고등어 살을 뚝 떼서 올려놓았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엄마도 그랬다. 생선 가시를 발라서 놓아주고 김치도 쭉쭉 찢어서 놓아주고.
 
"저토 주세요."

덩치가 밥 한 숟가락을 산만큼 떠서 할머니 앞으로 쑥 내밀었다. 할머니가 "흐흐흐" 웃으시더니 덩치 밥 위에도 고등어 살을 올려 주었다. 덩치가 악어처럼 입을 크게 벌리더니 한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덩치 값도 못하고 애기처럼 구는 게 웃겨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잠깐 동안 할머니와 덩치와 나, 셋이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여서 눈길을 피했다. 얼굴에 열이 확 올라오는 듯 했다.
 
"자, 우리카 크릇 딱습니타."
 
덩치는 밥을 세 공기나 먹고 반찬그릇까지 싹 비우더니 주섬주섬 빈 그릇을 챙겼다. 할머니가 그러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밥 생각나면 언제든 오너라. 알았지?"
 
할머니는 덩치의 고집에 지셨는지 날 향해 빙긋 웃어주고는 밖으로 나가셨다.
 
나는 꼼짝없이 설거지를 했다. 내가 그릇에 수세미로 비누칠을 하면 덩치는 내 옆에 붙어 서서 물로 헹궜다. 그러다가 설렁설렁 닦은 게 있으면 다시 하라고 주었다. 곰 발바닥처럼 두툼한 손으로 쓱싹쓱싹 접시를 닦는 모습이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 익숙해 보였다. 행주까지 깨끗이 빨아서 착착 걸어 놓고 나서야 덩치는 날 데리고 식당에서 나왔다.
 
설거지 할 때 물이 튀었는지 발가락이 축축했다. 나는 오른 발 왼 발 번갈아가며 슬리퍼를 벗고 바지에 쓱쓱 닦았다. 그런 나를 보고 덩치가 벙싯벙싯 웃었다.
 
"에이 씨, 왜 웃어요?"
 
나한테 환하게 웃어 준 사람은 엄마 밖에 없었다. 덩치랑 있으면 이상하게 엄마생각이 났다. 엄마가 생각나면 자꾸 눈물이 나오려하고, 가슴을 무거운 돌덩이로 누르는 것처럼 먹먹했다.
 
식당에서 만난 할머니만 해도 그렇다. 할머니가 내 등을 토닥일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어색했다. 나는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얼른 교회 밖으로 나오고 싶었다.
 
그때였다.
 
"나 토와줄 일 있습니타. 이커 들코 오십시오."
 
덩치가 어느 틈에 커다란 책 꾸러미랑 까만 악기 가방을 내 앞에 놓았다. 그러더니 두 개는 자기가 양손에 하나씩 들고, 나보고 가방을 들라하고는 앞서서 걸어갔다.
 
"싫어요. 난 집에 갈 거야."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덩치는 교회 문을 나서더니 바로 앞에 있는 큰 길을 건너갔다.
 
"나 그냥 간다고."
 
소리쳐도 돌아보지도 않고 놀이터를 지나 골목길로 들어섰다.
 
"에이,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난 목구멍까지 나온 욕을 꿀꺽 삼켰다. 교회 안에서 그러면 벌 받을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짐을 들고 쫓아갔다.
 
덩치는 교회에서 가까운데 살고 있었다. 방 하나에 화장실이랑 부엌이 같이 있는 조그만 원룸이었다. 싱크대 옆으로 조그만 붙박이장이랑 빼곡히 책이 꽂혀 있는 책장이 보였고 맞은편엔 기타랑 여러 악기들이 벽에 기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엔 손바닥만한 크기의 사진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대부분 아이들 사진이었다.
 
"쿄회에서 악키 배우는 아이들 입니타. 아주 이쁩니타."
 
아이들은 악기를 하나씩 안고 싱글벙글 웃고 있었는데 내가 보기엔 하나같이 개구쟁이 같았다. 아이들 사진 옆에 액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흑인 할머니와 할아버지 가운데서 헤벌쭉 웃고 있는 덩치 사진이었다.
 
"요셉, 카족사진 입니타."
 
'가족이라니? 둘 다 흑인인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요셉 얼굴을 보았다. 덩치가 이어 말했다.
 
"나 입양아 입니타. 양아빠 나 때려서 토망 갔습니타. 그때 이분들이 토와주었습니타. 이름토 요셉이라코 새로 지어줬습니타. 힘들어토 꿈꾸코 살라 했습니타."
 
덩치가 손으로 가만가만 사진을 쓰다듬었다. 한국 부모한테 버려지고, 미국 부모한테는 매 맞고 살았구나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찌릿했다.
 
이럴 땐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아 우물쭈물하는데, 덩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싱글싱글 웃으며 내가 들고 온 가방에서 악기를 꺼냈다. 덩치는 악기를 하얀 천으로 정성스럽게 닦더니 받침대에 잘 세워 놓았다. 금빛 악기가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트럼펫 처음 봅니카?"
 
덩치가 웃었다. 나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린 채 악기를 보고 있었나보다.
 
'쳇, 이제야 말로 집에 가야지'하고 일어서는데 덩치가 하품을 길게 하더니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요셉 잡니타. 한 시칸 뒤 깨워 주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알람 해 놓고 자요."
 
나는 덩치를 노려보며 책장에 있는 조그만 시계를 검지로 가리켰다. "알람, 피콘하면 못 튿습니타. 사람이 깨워야 합니타아. 나 어제 한 시간토 못 잤습니타. 플리즈." 덩치가 간절한 눈빛으로 날 보았다. 그러더니 덩치는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곯아 떨어졌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여덟 시도 안됐다.
 
'아빤 일어났을까?'
 
아직 술이 덜 깼을 지도 모른다. 지금 집에 들어갔다가 아빠한테 걸리면 더 혼날 것 같았다.
 
나는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좀 전에 덩치가 닦아놓은 악기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곰처럼 불룩한 배로 저걸 분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덩치는 아기처럼 한쪽 얼굴을 바닥에 대고 엎드려서 쌕쌕 잠이 들었다. 아무 걱정 없는 사람 같았다. 붙박이장에서 이불을 꺼내 덩치를 잘 덮어주고 나도 슬그머니 누웠다. 방이 따듯하니 잠이 솔솔 왔다.
 
"일어나. 빠바바바밤. 일어나. 빠바바바밤."
 
요란한 알람 소리에 깜짝 놀랐다. 잠깐 누웠는데 잠이 들었던 걸까? 나무토막 같은 덩치의 굵은 팔이 내 배위에 올려져 있었다.
 
"일어나요. 일어나."
 
아무리 흔들어도 덩치는 꼼짝도 안 했다.
 
나는 방에 있던 악기를 들고 훅 불었다. 푸우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몇 번을 불어도 푸푸거리기만 했다. 에라, 모르겠다 배에 힘을 꽉 주었다가 푸 불었다.
 
"뿌우우."
 
엄청 큰 소리가 났다.
 
"오, 노우!"
 
덩치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그 모습이 습격당하고 허둥대는 곰 같아서 쿡 웃음이 나왔다.
 
"으으으으."
 
덩치가 어금니를 꽉 물고는 귀를 막 비벼댔다.
 
"어떻게 해서든 깨우라면서요."
 
내가 혀를 날름거리자 덩치가 쩝 입을 다셨다.
 
"굿 잡, 잘했습니타."
 
덩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 엄지를 세워 흔들어댔다. 그러고는 욕실로 가더니 어프어프 요란하게 세수를 하고 까만색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하얀색 셔츠에 빨간색 넥타이도 맸다.
 
"멋있습니카?"

덩치가 모델처럼 팔짱을 딱 끼고 날 보았다. 나는 픽 웃었다. 내 눈엔 영락없이 양복 입은 곰으로 보였다. 덩치가 악기를 챙기려다 말고 나에게 물었다.
 
"트럼펫 배웠습니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배우기는커녕 실물을 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와우, 놀랍습니타. 재능있습니타."
 
덩치가 눈을 찡긋거렸다. 나는 그 정도야 뭐 하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덩치는 날 보라는 듯 한껏 폼을 잡더니 트럼펫을 불었다.
 
"삐이익."
 
자동차 급정거 하는 소리가 났다.
 
"킬킬킬."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오, 웃는 커 귀엽습니타."
 
덩치가 싱글거렸다. 덩치는 다시 자세를 잡더니 트럼펫을 불었다. 이번엔 삑 소리 대신 아주 멋진 소리가 울렸다. 어제 밤에 들었던 그 곡이었다. 마음에 잔잔한 파도가 일렁였다. 연주가 끝나자 덩치가 어떠냐는 듯 두 손을 허리에 척 같다대고는 으스댔다. 나는 정신 놓고 빠져있던 게 쑥스러워 입을 삐쭉 내밀었다. 
 
"여자애들한테 인기있습니타. 배우십시오."
 
덩치가 또 눈을 찡끗했다.
 
'강습비는 어디서 나고 악기는 어떻게 사라고?'
 
하마터면 이 말이 툭 튀어나올 뻔 했다.
 
"꿈, 있습니카? 꿈, 있어야합니타."
 
덩치가 뜬금없이 꿈 이야길 했다. 난 콧방귀만 나왔다.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에게 그건 진짜 꿈같은 소리다. 집 나간 엄마는 두 해가 다되도록 연락도 없고, 아빠는 술만 취하면 짐승으로 변해서 숨어 다녀야 하는 처지에 무슨 꿈이 있겠는가.
 
얼른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수 없이 해보았다. 꿈이 있다면 그게 내 꿈이다.
 
"아빠가 싫어할 거예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노우, 자키 생칵 중요합니타."
 
덩치가 말했다.
 
"나, 꿈 없었으면 한쿡 못 왔을 겁니타. 연주자 안됐을 겁니타. 선생님 안됐을 겁니타. 깡패 됐을 겁니타. 지큼 부모님 손 내밀었을 때, 나 용키냈습니타. 꿈꾸키 시작했습니타.”
 
덩치는 갑자기 연사가 된 것처럼 떠들었다. 너무 열심히 떠들어서 그런지 밥을 너무 많이 먹어 그런지 '뽀옹' 방귀를 뀌었다. 냄새가 지독했다.
 
"아, 형."
 
내가 코를 잡고 벌떡 일어나자 덩치가 멋쩍게 웃었다.
 
나는 냄새 흩어지라고 허공에 대고 손을 막 흔들었다.
 
"와우, 형아, 듣키 좋은 말입니타."
 
덩치가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마구 흩어놓았다. 자는 동안 후드가 벗겨졌었나 보다. 어쩐지 아까부터 뭔가 허전했었다. 나는 얼른 후드를 썼다. 
 
"아이쿠, 나 약속 늦습니타. 세 시 쿄회로 오십시오. 악키 연습합니타. 나 안 쓰는 악키 있습니타. 걱정 말코 오깁니타. 꼭."
 
덩치가 서둘렀다. "약속했습니타. 요세비 형, 기다립니타. 안 오면 형 화냅니타."
 
덩치는 횡설수설 얼렁뚱땅 혼자서 약속을 하고 교회로 갔다.
 
나도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기를 바라면서 조심조심 현관문을 열었다. 우리 집인데도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집에 들어서자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빠는 그때까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청소부터 했다.
 
'끄으응.'
 
아빠가 몸을 뒤척였다. 부석부석한 머리는 이리저리 눌려 납작해지고 허옇게 뜬 얼굴엔 수염이 거뭇거뭇했다. 양말을 벗으려다 못 벗었는지 양쪽 다 발등에 돌돌말린 채 걸려 있었다. 조심조심 다가가 양말을 벗겼다. 발뒤꿈치가 오래된 아스팔트 갈라진 것처럼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하얀 각질도 부스스 떨어졌다. 물걸레를 가지고 와서 떨어진 각질을 닦으려다 아빠 발을 닦았다. 그리고 몇 번을 망설이다 크림도 발라주었다.
 
"무울."
 
아빠가 눈도 뜨지 않고 물을 찾았다. 나는 얼른 차가운 물을 국그릇에 한가득 담아서 손에 쥐어주었다. 아빠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또 잠이 들었다. 청소를 다하고 나서도 아빠는 일어나지 않았다.
 
"째깍째깍."
 
오늘따라 시계 초침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간다고 약속한 건 아니잖아. 자기 혼자 한 약속인데 뭘.'
 
하면서도 마음이 교회로 달려갔다.
 
"꼭 와. 꼭 와야 합니타."
 
벙글벙글 웃는 덩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트럼펫을 배우고 싶은 건지 덩치를 또 만나고 싶은 건지 헷갈렸다. 그러고 보니 내 이름도 안 가르쳐줬다.
 
'이름은 말해줄걸.'
 
이름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공책을 한 장 북 찢었다. 그리고 연필로 꾹꾹 눌러 쪽지를 썼다.
 
'아빠,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나가요. 나쁜 일은 아니에요.'
 
마음에 안 들었다.
 
'교회에서 공짜로 악기를 가르쳐준대요. 돈은 하나도 안 든대.'
 
이것도 이상했다. 아빠한테 쪽지 하나 쓰는 게 반성문 열 장 쓰는 거보다 어려웠다.

아빠, 밥통에 밥해 놨어.
                    -아들

겨우 한 마디 썼다. 쪽지를 아빠 머리맡에 잘 보이게 두고 조용히 집을 나왔다. 아빠가 화를 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셉이 형이 양부모님이 내민 손을 잡은 것처럼 나도 요셉이 형이 내민 두툼한 손을 잡고 싶었다. 나는 교회로 막 뛰어갔다. 하얀 눈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겨울바람에 후드가 벗겨졌지만 그냥 뛰었다. 오랜만에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기분도 괜찮았다.

글 : 민병숙

제15회 기독신춘문예 동화 당선자 민병숙 씨

"나를 꿈꾸게 하는 동화, 힘들지만 즐거운 길 가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동화를 쓰겠다고 처음 마음 먹었을 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순간이 행복했습니다. 동화를 통해 어린 시절의 나와 만나고 동무들과도 만났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잘 하고 있는 걸까?' 걸음을 멈추고 잠깐씩 생각을 했습니다.
 
동화공부 한다고 놓치는 것들에 미안했습니다. 주저하고 멈칫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동화는 나를 꿈꾸게 하고 웃게 하고 움직이게 합니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힘들지만 즐거운 길입니다. 이 길을 지치지 않고 갈 수 있게 손 잡아주신 심사위원님 감사합니다.
 
늘 자신 없어하는 저에게 받은 은혜대로 살라고 격려해주신 목사님 감사합니다. 기도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장로님, 권사님 늘 감사합니다.
 
동화의 즐거움을 가르쳐주신 신현수 선생님, 정해왕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어작교 선후배님들과 글동무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2년 전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한 약속 이제야 지켰어요. 기쁘시죠? 그리고 매일매일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엄마, 공부하다 늦으면 꼭 데리러 와주는 내 짝꿍 고맙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보물 예주, 예린아, 엄마의 꿈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줘서 고맙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을 계획하신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 민병숙
- 1964년 부산 출생
- 서울여자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 연세대 미래교육원 동화창작교실 수료
- '어린이 책 작가교실'에서 동화 공부
- 고촌감리교회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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