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기독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작, 카타콤베

[ 제15회 기독신춘문예 ]

이정하
2014년 01월 06일(월) 18:46

   
▲ 그림 : 김지혜

"자살사건이네, 이 군종이 한번 와 보게."

수신기에서 흘러나온 소대장의 목소리엔 다급함이 배어 있었다. 평소 다른 근무지보다 사고가 많은 최전방이라서 그런지 이번에도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다만 소대장이 사건을 상부에 보고하기도 전에 교회 업무를 담당하는 군종사병인 내게 알린 것이 의아했다. 매주 종교행사에 꼬박 참석하던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전보다 더 긴장한 상태에서 대대교회부터 떠올린 듯싶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는 군종이라…."
"포대자루도 꼭 가져오고."
 
전화는 어느새 끊겼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나무의자에 잠시 기대어 십자가를 바라봤다. 또 한 마리의 양이 당신에게로… 아니, 자살을 했는데 당신 곁으로 갈 수 있는지… 엄한 생각을 하다가 다시 시계를 보았다. 17시 40분. 베드로가 고갯짓 하는 모습이 새겨진 색색의 교회 창문을 타고 저녁 햇살이 단상을 비췄다. 짧게 기도를 하고 서둘러 탄띠를 맸다. K-2 소총의 개머리판을 접어 등에 메고 오른손으로 낡은 성경책을 집어 들었다.
 
철책 앞의 304 초소에는 소대장과 사수 한 명만 우두망찰하게 서 있었다. 부대원이 자살한 초소 앞에서 소대장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다가가서 들으니 주기도문이었다. 몇 번이나 틀리고, 머뭇거리며 그는 겨우 기도문을 한 번 외워냈다.
 
나는 경례도 생략한 채 둘 사이를 비집고 좁은 콘크리트 초소에 들어섰다. 순간 무언가 물컹한 것이 발에 밟혔다. 내벽은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든 채 여직 피가 흘러내렸다. 마치 벽이 통째로 내려앉을 것만 같아 나는 얼른 몸을 뺐다. 하지만 죽은 자의 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니 이제 막 눈을 뜬 소대장이 떨면서 자신이 메고 있던 수류탄 통을 가리켰다. 맙소사. 포대자루를 가져오라고 한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제야 어느 부위인지도 가늠할 수 없는 살점들이 보였다. 그 육질들을 내가 다 집어삼키기라도 한 듯 속에서 무언가가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금식기도 중이라 아무 것도 먹은 게 없는데 토악질은 끊이질 않았다. 그대로 무릎이 꿇려 나도 모르게 손을 모았다.
 
"이 친구, 이름이 뭐죠?"
"이정훈."
"예?
"교, 공교롭게도 자네의 이름과 같네."
 
나는 뭐라고 기도해야할지 몰라 한참을 그대로 멎어있었다. 나와 같은 이름이라니. 내 이름… 아니 그의 이름을 부르자니 까닭 없이 소름이 돋았다.
 
"병장 이석주, 오줌 누러 잠시 초소를 나온 사이에 수류탄이 터졌습니다. 녀석은 종일 허공을 보며 계속 헛소리를 했습니다. 여자 친구가 떠난 것도 아니고, 자살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아마도 군대귀신을 본 게 아닐까요?"
 
사수의 증언을 듣던 소대장이 뜬금없이 지휘봉으로 그의 철모를 내려쳤다. 짧게 기도를 끝내고 다시 초소 안으로 들어섰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살점들을 어떻게 떼어서 포대에 담으란 말인가. 망연히 서서 소총 거치대 앞의 뚫린 구멍으로 비무장 지대를 내려다보았다. 새끼 고라니가 지나가다 흠칫 놀라 달아났다. 그런데 달아나는 속도가 거의 절뚝이는 수준이다. 가만히 그의 다리를 살폈다. 하나, 둘, 셋… 다시 하나, 둘, 셋… 아무리 세도 셋뿐이었다. 나머지 한 다리는 누구에게 먹힌 것일까. 뒤늦게 지프차와 앰뷸런스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기무대 수사관이 사건 현장을 조사하는 동안 나는 내내 뒤쪽에서 기도를 했다.

내가 군종 일을 맡게 된 것은 상병 진급을 하고부터다. 이전에는 주특기 1114, 즉 60mm 박격포병으로 근무했다. 자대 배치 전에는 박격포 하면 포트리스 게임이 떠올라 나름대로 기대도 했다.
 
하지만 막상 배치되고 난 뒤부터는 힘겨운 날들이 이어졌다. 우리는 그것을 '똥포'라고 불렀다. 행군 때면 누군가는 포신, 포판, 포다리를 한 데 묶은 그 박격포를 매야했다. 더욱이 박격포 군장의 어깨끈은 무척 짧아서 그것을 매고 한 시간쯤 걷다보면 가슴에 피가 통하지 않아 금세 숨이 턱 막혔다. 똥포를 매고 가다 실신한 사병도 여럿이었다. 또한 그것을 매고 밤새 버틴 자는 얼굴이 꼭 하얗게 질리기 마련이었다. 그 하얀 얼굴을 보고 우리는 행렬의 끝을 가늠하기도 했다.
 
백일 휴가를 다녀온 얼마 뒤 공교롭게도 혹한기 훈련에서 나는 그 짐을 지게 되었다. 대열에서 이탈하거나 뒤처지면 군 생활 내내 괴롭힘을 당해야만 했기에 나는 억척빼기처럼 걸었다. 발바닥의 살갗이 밀릴 대로 밀려 핏물과 양말이 엉긴 상태였으나 그런 고통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뼛속까지 스며들던 박격포의 무게. 무슨 죄가 있어 나는 산을 걷지 않고 매고 다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밤새 60km를 행군해 대성산 9부 능선을 넘을 즈음이었던가. 의식이 없는 중에 누군가 짐승처럼 몰아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포반에 배치 받은 동기였다. 세문의 포 가운데 하나는 그가 매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분대장의 몫이었다. 허나 분대장은 오랜 관록 때문인지 체면 때문인지 흐트러짐 없이 멀찌감치 앞에서 걷고 있었다.
 
"정훈아, 나 더 이상 안 되겠어…."
"……."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붙잡아 줄 힘도 말할 힘도 없어 차라리 그를 외면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나를 불렀다.
 
"정훈아, 옆에 있니, 안보여."
"……."
 
나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났던가. 마치 태엽을 감은 기계처럼 나는 일정한 간격으로 산을 오르고만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싶어도 돌아가지 않았다. 차라리 눈을 감고 주기도문을 외웠다.
 
"정훈아…."

그는 한 번 더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더니 체념한 듯 뒤처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를 향한 비난과 욕설이 들려왔다. 고참들이 군홧발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소리와 K-1 소총으로 그의 철모를 후려치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보는 순간 나도 따라 그 구렁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잠시 뒤에 불현듯 놀란 함성들이 들려왔다. 태엽은 어느 틈에 멈췄고, 사병들은 멍하니 서서 산 밑을 바라보았다. 참다못한 동기는 산 아래로 뛰어내렸던 것이다. 다행히 녀석은 산 중턱의 나뭇가지에 걸려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의병제대 후 일반 병실이 아닌 정신 병동에 입원해야했다.
 
그 때 인근 마을의 닭이 울었던가. 그제야 나는 그 새벽에 당신을 세 번이나 외면했음을 깨달았다. 나뭇가지에 걸려 축 늘어진 그의 등을 보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던 예수님의 지친 등이 떠올랐다.

자살사건이 난 다음날, 소대장은 이번에도 급하게 내게 무전을 쳤다. 간밤에 또 한 명의 이등병이 발작 증세를 보였는데 여태껏 헛소리를 해댄다는 것이었다. 내용인즉 어제 처참하게 죽은 이등병은 자살한 게 아니라 귀신에 놀라 반사적으로 수류탄을 땄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자신도 그 귀신을 숱하게 봤으며 여러 번 발포 충동을 느껴왔다고 했다. 소대장은 처음엔 웃으면서 흘려 넘기려 했지만 아무래도 녀석의 상태가 심각한 것 같아 내게 무전을 쳤다고 했다. 신상기록부터 살펴볼 요량으로 나는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 친구 이름이 뭡니까?"
"안진이네."
 
안진…. 나는 그의 이름이 적힌 신상기록부를 먼저 행정실에 요청했다. 행정실에서는 안진 이병을 직접 보내겠다는 답변과 함께 안진 이병에 대한 상세한 소견서를 요구했다. 그를 직접 만날 생각을 하니 긴장이 되었다. 그는 정말 귀신을 느낄까.
 
저녁 7시.

수요예배를 드리기 위해 장병들이 하나, 둘 씩 대대교회에 들어섰다. 사람들은 이 교회를 통나무집이라고 불렀다. 원래는 콘크리트 벽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어 만든, 10평 남짓한 간부식당에 불과했는데 교회로 개조하면서 외벽에 통나무를 그려 넣은 것이 한층 다른 인상을 갖게 했다. 예배라고 해도 최전방의 작은 교회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같이 찬양하고 성경을 나눠 읽는 게 고작이었다. 워낙 산 속 깊이 자리해서 연대 목사도 한 달에 한번 밖에 오지 않았다. 대개 부대 내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고문관이나 여자 친구와 헤어진 이들이 의지할 곳 없어 찾는 곳이 이곳 통나무집이었다. 그러니 예배라기 보단 차라리 집회에 가까웠다. 지친 일상을 뒤로 하고 장병들은 같이 차를 나눠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서로를 위로했다.
 
최전방 GㆍOㆍP에선 목사님이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사병들 뿐 아니라 간부들도 일개 군종병인 나를 전도사 이상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귀신을 보거나 이상한 심령현상을 겪었을 때도 나를 찾았다. 몇몇 간부들은 아예 나를 퇴마사라 불렀다. 때문에 사건사고가 일어난 곳에 나는 어김없이 일순위로 호출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도뿐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원했다. 그 때마다 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하는 대신 하나님을 원망했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어찌하여 저를, 아니 저 사람을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저 이가 자살할 때까지 내버려두셨나이까. 
 
안진 이병이 교회에 찾아온 것은 9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자신의 신상기록부를 내미는 그의 얼굴을 봤을 때 나는 뜬금없이 금강상이 떠올랐다. 언젠가 이름 모를 박물관에서 봤던가. 아니면 무당집 벽화에서 봤던가. 하늘로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 꼬리와 붉어져 나온 콧등, 검고 두툼한 입술에 짧은 머리임에도 한 눈에 띄는 고수머리. 그것은 분명 일장검을 들고 귀신을 쫓을 듯 달려들 태세를 하고 있던 금강상의 모습이었다. 하여 그가 처음 말을 꺼냈을 때 나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런 외모와 달리 목소리는 엷은 미성이었기 때문이다.
 
"통나무집에 늘 와보고 싶었어요."
"녹차 드실래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멋쩍게 웃었다. 녹차 티백을 꺼내며 나는 빠르게 신상기록부를 훑었다. 그러다가 그가 자필로 갈겨쓴 듯이 보이는 부분에서 눈이 멎었다. 거기에는 분명 '17세 때 성령체험을 하는 도중 이상한 신이 틈타 들어옴. 이후 불규칙적인 발작증세'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나는 믿기지 않아 한참이나 그 대목에서 멎어있었다. 그가 예상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방언이라는 걸 아세요?"
 
나는 신상기록부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하나님과 그것을 하는 당사자만이 소통하고 알아들을 수 있다는 그 소리. 나 역시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으나 아직 한 번도 그것을 체험한 적은 없다. 오히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왠지 무서웠다.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그가 안심하라는 듯 웃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기도에, 기도를 하다 영의 세계가 열리면 육도 살도 시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답니다. 그럴 때면 천사의 도움 없이도 몸이 하늘로 들어 올려 지지요.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성령이 친히 내 안에 들어서면 방언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영이 열렸을 때 잘못하면 다른 신이 틈타기도 하지요. 저는 그 때 너무 어렸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두 세계가 열렸고 하루아침에 천국과 지옥을 경험했지요. 그 때부터 제 눈에 그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떠도는 혼백들. 저 역시 어딜 가나 이단이 될 수밖에 없었답니다."
 
나는 언뜻 납득이 가지 않았다. 다만 그의 얘기를 들으며 규칙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부러 이해한다는 몸짓을 지었을 뿐. 그가 막사로 돌아가면 소대장에게 뭐라고 보고해야할 지 벌써부터 난감했다. 아쉬운 대로 이등병 자살 사건에 대해 알아볼 요량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정훈 이병에 대해서는…."
"정훈이는 신병교육대서 훈련받을 때부터 동기였어요."
"혹시 최근에 여자 친구와 헤어졌나요?"
"그렇긴 하지만…."
 
역시 그것 때문이었구나. 나는 속으로 확신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자살 혹은 탈영 사건의 태반은 여자 친구의 변심이 그 이유였다. 나 또한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일병이 되고 얼마 후 은서가 떠났을 때도 나는 때마침 시작된 유격행군에서 박격포를 자처해서 맸으니까. 그렇게라도 해서 육체를 혹사시키지 않으면 나 역시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고참들의 구박을 온 몸으로 감내하며 며칠 동안 정확히 백 팔십 통의 전화를 은서에게 걸었다. 왜 나를 떠나려는지 그것만이라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은서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유격훈련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은서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는데, 거기에는 그간 우리가 찍은 사진과 함께 전도책자가 달랑 한 부 들어있을 뿐이었다.
 
그 밤에 지친 몸으로 불침번을 서면서 나는 찬찬히 은서가 보내준 책자를 뒤졌다. 그 전도책자 뒤에는 차례로 기관차와 연료차, 객차가 연결된 그림이 있었고 각각 사실, 믿음, 감정을 나타낸다는 설명과 함께 짧은 문구가 덧붙어져 있었다.
 
'기관차는 객차가 있으나 없으나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객차로 기관차나 연료차를 끌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인 일입니다.'
 
객차로 기관차를 끌려했다니. 이미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내게 은서는 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어린애처럼 매달리는 내게 정신 차리라고, 어리석게 행동하지 말라고 다그치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는 별로 슬퍼하지 않았어요. 그보다, 며칠 전부터 자꾸 비무장 지대에…."
"귀신이 보인다구요?"
 
나는 나도 모르게 안진 이병의 말꼬리를 잘라버렸다. 속으론 계속 헛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참고 있던 터였다. 그 말투가 너무 단호했는지 그는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만 머쓱해져서 그의 찻잔에 뜨거운 물을 더 부어주었다. 막사에서 취침을 알리는 구호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요,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나는 먼저 일어나 빗자루를 찾았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이곤 손을 모았다. 그러고도 그는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통나무집을 나섰다. 창문 밖으로 사라져가는 그의 등짝을 보고 있자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럴 수도 있을까… 하긴 자살을 하는데 수류탄을 깔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총으로도 모자라 수류탄을 던질 수밖에 없을 만큼 거대한 적이, 아니 귀신이….
 
한 밤.
 
야전삽 대신 생강차가 담긴 보온병을 군장에 담고 위문을 나선다. 초소와 초소를 돌며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장병들에게 따뜻한 차를 건넨다. 말없이 차를 마시는 그들. 하나같이 눈빛이 검고 아득하다. 서둘러 잔을 받아들고 초소를 나온다. 고라니 소리가 들린다. 죽은 이의 혼을 빌어 우는 듯 짙푸르다. 다음 초소에 도착했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당황하여 초소를 뛰쳐나오는데 누군가 나를 겨냥한다. 바람, 암호 바람! 답하라, 바람! 얼른 답해야하는데 암호가 기억나지 않는다. 구름이었던가. 우박이었던가. 나는 그 자리에 멎는다. 그 때 대여섯의 그림자가 내게 달려들었던가. 나는 그들에게 눌려 땅바닥에 쓰러진다. 재빨리 얼굴을 확인하려는데 얼굴은 없고 철모만 떠있다. 귀신인가. 떠오르는 대로 성경구절을 외고, 목덜미에 맨 십자가를 더듬는다. 애꿎은 군번줄만 손에 잡힌다. 그들은 곧 내 양 팔과 양 다리를 비튼다. 그 중 하나가 내 가슴에 올라탄다.
 
"왜 우리를 이리 괴롭히지?"
 
놀랍게도 그는 눈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수류탄을 움킨다.
 
기상나팔 소리.
 
눈을 뜨니 나는 여전히 교회 나무의자에 누웠다. 꿈이었을까. 그대로 누워 한참이나 그 잔영을 곱씹었다. 군복무를 하면서 내가 누구를 억압한 적이 있던가. 기껏해야 코골며 자는 후임에게 베개를 던진 정도. 아, 암구호를 제대로 외지 못한 부사수를 군홧발로 후려친 적도 있다….
 
새벽부터 사단본부에 다녀왔다는 소대장은 아침 점호가 끝나자마자 직접 교회를 찾았다. 상부에서는 부대원의 죽음에 대해 분명 그에게 책임을 물었을 것이다. 구보시간 내내 그는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완전군장을 하고 연병장을 돌아야 했다.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도 그의 턱엔 수염이 덥수룩했다.
 
"나 잠깐 면도하고 가도 되나?"
"물론입니다."
 
소대장은 계속 몸을 꼬고 있었다. 그는 종종 몰래 교회에 찾아와 전기면도기로 면도를 하고 갔다. 언젠가 막무가내로 수염을 깎다 피를 쏟은 후 면도날은 무섭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때문에 전기면도기를 쓰다 사병들에게 들키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부대원을 이끌어야하는 소대장이기에 매사에 초연하고자 노력했지만 이즈음 그는 많이 지쳐보였다. 면도를 다 끝냈는데도 그는 전기면도기를 얼굴에 댄 채 무연히 거울을 보고 있었다. 거울에 반사된 그의 동공이 그 때 본 새끼 고라니처럼 굳어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어깨를 잡아 흔들자 그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도 요새 그들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예?"
"어, 아니, 그보다 자네 이것 좀 보게."
 
그는 윗주머니에서 겹겹이 접힌 쪽지를 꺼내 내게 건넸다. 거기에는 뾰족한 숯으로 급하게 갈긴 무언가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웬 아이의 모습이었다. 아이의 온몸은 까맣게 그을렸을 뿐 아니라 불길에 타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아이 자신이 불길을 내뿜는 것처럼 불길은 아이의 심장을 중심으로 솟아올랐다. 아이는 흰 눈을 치켜뜨고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 눈빛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일렁였다. 탄내가 났다. 금방이라도 그것이 밖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아 쪽지를 접었다.
 
"이게 뭐죠?"
"안진이 그린 거야."
"예?"
"요 며칠 봤다는 귀신이 꼭 그렇게 생겼다는군."
"소름이 돋는군요."
"그게 자신의 배를 찢고 들어가려고 했다는 거야."
"배가 아프다곤 안 합니까?"
"지금 의무대에 있네. 꼭 사고를 칠 거 같아서 근무명단에서 뺐네."

이제는 슬슬 그가 걱정이 되었다. 무언가 그를 옭아 메고 있는 것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림 속에 나오는 따위가 될 수는 없다. 소대 내에 가혹행위라도 있지 않을까. 나는 소대장에게 캐물었다.
 
"혹시 내무반에 체벌 같은 게 있지 않을까요?"
"그럴 리는 없네. 요새 본부에서 단속이 워낙 심해서."
"따돌림이나…."
"내가 지켜본 바로는 없어."
"그렇다면 안진 이병의 내무반라도 좀 돌아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도록. 참, 길이 얼었으니 조심하고."
 
소대장은 눈을 찡긋 하더니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안진 이병은 그렇게라도 해서 근무에서 열외하고 싶은 것일까. 귀신을 본다고 거짓말을 할 만큼 상황이 절박했던 것일까. 몸이 그렇게 허약해 뵈지도 않던데 무엇이 그토록 그를 압박하는 것일까. 나는 다시 탄띠를 꾸렸다.
 
막사 앞 취사장에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소대원들은 제각기 곡괭이와 삽을 후리며 땅을 파고 있었다. 여기저기 흙더미가 쌓인 것으로 보아 수도관이 동파되어 물꼬를 찾는 듯 했다. 굳이 내무반까지 들어갈 필요도 없이 나는 삽 하나를 들고 작업에 끼어들었다. 초록 견장을 단 분대장이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어이, 목사님 오셨네, 웬일로 이 누추한 곳에…."
"땅 판다는 소식 듣고 심으러 왔지요."
"뭘 심으러 오셨는데?"
"복음이라고나 할까."
 
너스레를 떨자 구덩이 속에서 땅을 파던 분대원 하나가 웃으며 나를 잡아끌었다. 대뜸 땅콩차가 담긴 보온병을 내밀자 그제야 내 팔을 놓았다. 분대장은 보온병 뚜껑에 일일이 차를 따라 계급이 낮은 이등병들부터 건넸다.
 
작업반들이 곁불 쬐며 잠시 쉬는 사이, 어디선가 나타난 멧돼지 세 마리가 이쪽을 힐끗거리며 취사장 뒤쪽 땅을 파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먹다버린 음식찌꺼기를 찾아온 듯 했다. 어미로 보이는 퉁퉁한 멧돼지가 보초를 서듯 이쪽을 향해 킁킁거렸다. 그 뒤로 새끼 돼지 두 마리가 잔반에 고개를 쳐 박고 꿀꿀거렸다. 꾸이꾸이. 음식더미에서 나온 시큼한 냄새가 금세 취사장 주변을 포위했다.
 
죽은 이가 쓰던 철제 관물대는 여직 그대로였다. 거기에는 그가 각을 잡아 갠 옷가지들과 차곡차곡 쌓아놓은 편지묶음이 남았다. 편지봉투를 확인하지 않아도 그게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묶음의 옆에는 막 도착한 새 편지도 있었다. 날짜 소인을 보니 불과 사흘 전에 발송된 것이었다. 여자 친구는 아직도 그의 죽음을 모르고 있는 듯 했다.
 
"마차다, 황금마차가 올라온다!"
 
그 때 밖에서 작업하던 사병들의 환호소리가 들려왔다. 연대에서는 소형 트럭에 각종 군것질거리를 실어 매달 한 번 씩 소초에 올려 보냈다. 각 부대가 소대별로 산속에 나뉘어 있으니 군대 상점인 PX가 없는 까닭이었다. 사병들은 쌈짓돈을 모아 육포며 과자, 음료수를 한가득 가슴에 안았다. 어떻게 전해 들었는지 저만치 소대장이 달려오고 있었다.
 
"잠깐! 빅 파이, 거기 내 빅 파이 남겨놔!"
 
소대장답지 않게 팔을 허우적거리며 달려오는 품이 제법 천덕구니 같았다. 그는 요 며칠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자신이 마치 고문관 같다고 했다. 그가 황금마차에 이르렀을 때 그러나 정작 빅 파이는 다 나가고 없었다. 소대장은 사병들의 품에 안긴 과자 꾸러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정색하고 말했다.
 
"겨울이라 비무장지대가 건조해져서 작은 불이 많이 난단 말이다. 항시 긴장하도록!"
 
그는 마치 이 한 마디를 내뱉기 위해 달려온 사람처럼 재깍 돌아섰다. 마침 나도 본부중대 소초로 돌아가려던 참이라 그를 따라나섰다. 땀을 어찌나 흘렸는지 그의 등때기에 소금기가 하얗게 말라붙었다.
 
"웬 빅 파이입니까?"
 
내가 묻자 그는 얼마간 뜸을 들였다.
 
"내가 어릴 때 참 좋아했던 거거든. 기말고사를 보기 전날 밤에는 꼭 그것을 쌓아놓고 먹었어. 작아서 초코파이처럼 입에 묻지도, 우물거리지 않아도 되고…. 하지만 그래서 내게는 이름처럼 큰 파이가 되어주기도 했지. 작지만 큰…."
"그럼, 뻥튀기라도 좀 드시겠습니까? 이것도 한 때 작았지만…."
"저리 치워!"

소대장은 느닷없이 귀를 막고 엎드렸다. 그러더니 그 때 사고가 난 초소 앞에서처럼 주기도문을 외었다. 몇 번이고 내가 불러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안정을 되찾았는지 그가 가만 고개를 들었다.
 
"미안하네. 어릴 때 뻥튀기 터지는 소리를 무서워해서…."
"예?"
"그런 게 있네. 석천리라고 들어봤나? 거기가 내 고향이야."
"석천리요?"
"매향리 옆이야. 미군 폭격기 사격장이 있는. 언젠가 할아버지가 우리 동네에 떠밀려온 뻥튀기 장수를 장작개비로 후려 팬 적이 있지. 단지 폭발 소리를 냈다는 이유였어. 남자는 죽고, 할아버지도 얼마 뒤 농약을 마셨어."
"그런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밤낮없이 들리는 폭격소리에 가족들은 점점 변해갔어. 점차 알 수 없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혔지. 땅도 죽어가더군. 고추밭이 말라붙은 그 해 삼촌은 저수지에 뛰어들었고,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날 도망갔어. 아버지만 멀쩡했지. 귀가 먹어버렸거든…."

곁눈질로 그를 살피자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어스름 속에서 다만 그의 말라붙은 입술과 금세 자란 구레나룻만 떠있는 것 같았다.

자살사건이 나고 이틀이 지나도록 안진 이병의 발작 증세는 멈추지 않았다. 이따금씩 비무장지대에선 자그만 불길이 일었고, 그 열기 때문에 낡은 지뢰가 터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GㆍOㆍP의 체감온도는 영하 60도를 넘나들었고, 통나무집을 찾는 사병들은 점점 늘었다.
 
차 위문을 나설 때마다 나는 내복에 깔깔이, 추리닝에 야전상의를 걸쳐야만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귀마개와 마스크, 털신에 다시 손난로까지. 추위와의 전투는 끊이질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새벽기도를 하려고 통나무집을 향해 나설 때였다. 그 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소리를 쳤다. 
 
"불이야! 301GㆍP 부근에 산불이 났다!"
 
전방에 또 작은 불이 붙었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새벽기도를 마쳤을 때 그 소리는 비상사태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로 바뀌었다. 한참 고단한 잠에 빠져 있어야할 사병들도 어느 틈에 속옷차림으로 소초 앞으로 달려 나왔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대원들을 향해 하사관이 소리쳤다. 
 
"모두들 단독군장으로 집합할 것! 비무장지대에 산불이 났다는 보고다. 소방 헬기가 불을 끄는 동안 우리는 철조망에 도열하여 경계태세를 갖춘다."
 
하사관의 지시에 막사 내의 전 인원들이 일사분란하게 탄띠를 차고 불과의 각개전투를 위해 총을 접어 둘렀다. 나도 서둘러 내무반을 향해 뛰었다. 멀찌감치 비무장지대 쪽에서 붉은 빛이 솟는 게 보였다. 이따금씩 폭음소리도 들려왔다. 금세 탄약냄새와 탄내가 철책 부근을 에워쌌다. 달아날 곳이 없는 비무장지대의 산짐승은 몸부림을 치며 철조망에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철사에 몸이 베인 듯 울음소리는 한층 처절했다.
 
"북한 수색대가 시야확보를 위해 놓은 불이 남풍을 타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고 한다. 정신 바짝 차리도록."
 
어느새 나타난 소대장이 본부중대 앞에 재집결한 사병들을 향해 산불에 대해 설명하고는 출발지시를 내렸다. 단독군장을 한 선발대가 먼저 철책으로 향했다. 남은 인원들은 창고에서 긴 고무호스를 가져와 직접 수도꼭지에 이었다. 호스를 다 풀면 100m 남짓한 길이라 철책까지는 간당간당했지만, 행여 불이 철책 안으로 넘어온다면 그렇게라도 물을 보태서 꺼야할 판이었다.
 
"만약에 불이 이쪽 철책까지 닿는다면, 어쨌든 북한군이 놓은 거니까 선제공격으로도 간주할 수 있다는 군."
 
소대장은 불안한 듯 눈을 끔벅이며 말했다.
 
"화공(火攻)인 셈이군요."
 
분대장 하나가 농담조로 받아쳤지만 누구도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모두들 눈빛이 아득했다. 나는 성경책을 낀 겨드랑이에 바짝 힘을 주었다. 지뢰 터지는 소리가 아까보다 더 크게 들려왔다. 불이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본부 중대가 막상 철책에 도달했을 때 선발대들은 모두들 무력하게 서 있었다. 불길이 너무 커서 이미 소방 헬기로 끌 수 있는 정도마저 넘어선 까닭이었다. 어느 틈에 달려온 연대장도 지휘봉을 접은 채 뒷짐만 지고 섰다. 산불은 새벽 어스름마저 집어 삼키려는 듯 스스로 산이 되어 솟구쳤다.
 
"끄에에에."
 
산양 한 무리가 나란히 철책을 따라 내달렸다. 그들은 차마 사람들이 있는 철책으로 바짝 다가서지는 못하고 사람과 불의 경계에서 다만 서쪽으로 질주했다. 하지만 그 경계는 너무 좁아보였다. 차라리 작두를 타는 게 쉽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들이 딛고 있는 땅은 좁디좁았다. 저 위태로운 산짐승들의 땅마저 불에게 잡아먹히고 나면 이제 비무장지대는 누가 지킬까. 감시자에 불과한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부대 차렷!"
 
그 때 대대장의 구호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연대장이 철책 앞의 둔덕에 올라 소리쳤다.
 
"물로 끌 수 없다면, 맞불을 놓는 수밖에 없다. 간부들 중에 누가 지뢰밭으로 들어가 불을 놓을 사람!"
 
관등성명도 대지 않고 군중 속에서 누군가 대담하게 소리쳤다.
 
"저희 쪽이 놓은 불의 세가 더 커지면 자칫 불길이 북으로 향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두 불길이 합세하여 남풍을 타고 밀려오면 그 땐 어떻게 되는 겁니까?"
 
마치 자신이 질문을 던진 듯 사병들은 일제히 시선을 연대장에게 고정했다. 그러나 연대장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다만 비무장지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촌각의 시간마저 집어삼키며, 거기 산불이 넘어오고 있었다. 사병들도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숙였다. 그 때 누군가 크게 외쳤다. 여자의 목소리 같기도, 남자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소대장님을 추천합니다!"
 
그 목소리의 출처를 확인하려고 사병들은 두리번거렸지만 알 수 없었다. 이 와중에 병정놀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자원할 거 아니면 자중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외려 소대장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대신 이 군종과 같이 가게 해주십시오."
 
연대장은 즉시로 나를 한번 힐끗 보더니 지휘봉을 뽑아 앞으로 나오라는 표시를 했다. 소대장은 나를 보며 미안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게 고마웠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내가 꼭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내가 꼭 만나야할 누군가가 있는 것일까. 나는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소대장이 맞불을 놓는다면 난 옆에서 기도를 뿌리리라. 한결 기분이 가벼웠다. 막 철책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데 누가 뒤에서 나를 부른다.
 
"정훈 형제!"
 
군중과 멀찌감치 떨어진 초소 쪽에, 거기, 안진 이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의아한 일이었다. 그는 지금 의무대에 있어야하는 게 아닐까. 많이 안정을 찾아 다시 근무를 서기 시작한 것일까.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경황이 없는 중에도 나는 한참이나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소대장은 조심스레 불이 오는 길을 따라 기름을 뿌렸다. 그리곤 다시 이편으로 돌아와 홰에 먼저 불을 붙여 한번 좌우로 크게 흔들었다. 횃불을 사이에 두고 소대장과 나의 얼굴이 붉게 빛났다.
 
"자네 얼굴이 꼭 돌덩이 같군."
 
내 표정이 긴장되어 있었는지 그가 농담을 건넸다. 나는 다만 씩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나님께서 새 도시를 만드시려고 불비를 내리시려는 모양이네요."
 
소대장도 따라 웃었다. 이윽고 그는 봉수대에 불을 붙이듯 조심스레 불길을 따라 횃불을 내려놓았다.
 
맞불은 기름이 뿌려진 길을 따라 전방의 산불을 향해 치달았다. 이내 두 불길은 서로 맞붙어 소싸움 하듯 씩씩거리며 뿔질을 했다. 잽을 뻗듯 쉭, 쉭, 하는 소리만이 불규칙하게 들려왔다. 불이 불을 잡아먹다니. 한순간 북쪽의 불과 남쪽의 불은 산처럼 솟구쳤다.
 
멀리 북한초소가 보였다. 북한군들도 당황했는지 우왕좌왕했다. 차마 불 끄러 따라 나오진 못하고, 그들도 거기 지푸라기처럼 마냥 섰다. 이윽고 두 산불은 산소가 부족한지 숨을 몰아쉬듯 휘청거렸다. 마지막 힘을 다해 서로의 발꿈치를 들어 상대의 키를 넘으려했다. 나조차도 숨 쉬기가 버거워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소대장은 마치 부둥킨 선수들을 떼어놓으려는 심판처럼 거꾸로 불길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얼른 나가야합니다!"
 
다급한 나는 소대장을 잡아끌며 소리를 질렀다. 온힘을 다해 그를 당겼는데도 그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이마에 구슬땀이 흥건했다. 소대장은 나를 한 번 돌아보더니 엷은 웃음을 지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시게."
"소대장님!"
 
산불은 이제 서로가 목덜미를 깨문 채 울부짖었다. 이무기 둘이 맞붙어 싸우듯 두 산불은 서로의 뼛속까지 송곳니를 깊숙이 박아 넣었다. 얼마쯤 그렇게 서로를 할퀴었을까. 소대장은 불길을 향해 가속도를 냈다. 더 이상 손 쓸 수 없을 지경까지 그가 불속으로 뛰어들었을 때도 나는 그가 차라리 발목지뢰라도 밟게 되기를 기도했다. 그렇게 되면 혹 끌고 나올 수라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소대장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침내 그가 불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을 때 희한하게도 산불은 용오름처럼 솟아올랐다. 부대원들은 다만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대장님! 어디 계세요! 어디요!"
 
한동안 멎어있던 나는 다시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사태를 인식한 부대원들도 철조망을 잡아 흔들며 소대장을 불렀다. 철책 너머로 늘어선 그들의 모습이 어쩐지 푸른 죄수복을 입은 수인(囚人)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를 시작했다. 밑도 끝도 없는 말들이 쏟아졌고, 눈시울에선 시린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온몸이 뜨겁고 욱신거렸다.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혀 덜덜 떨렸다.
 
그 때였다.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을 것 같던 불길은 이내 서로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굉음을 내며 고꾸라졌다.
 
"GㆍP 피해상황 확인 요(要)!"
 
무전기에서 연대장의 목소리가 흘렀다. 이미 날이 밝았음에도 불구하고 멀찌감치 AㆍOㆍP쪽에서 조명탄이 떴다. 그 아래로 반세기 동안 묻혀 있었던 비무장지대의 맨 땅이 드러났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대장이 걸어 들어간 자리에 작은 돌무덤 몇 개가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아이 크기의 돌무덤.
 
"저기가 바로 6ㆍ25 때 피난 가던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는 돌무덤 지대네…."
 
언젠가 소대장과 초소를 돌며 이곳에 대해 한 얘기가 떠올랐다. 6ㆍ25 때 추격이 워낙 심했던 땅이라, 넋이 나간 누군가는 병든 아이를 버렸고, 누군가는 죽어가는 아이를 밟고 내달렸고, 또 누군가는 하염없이 걷어찼다고. 후에 지나가던 군인들이 버려진 아이들의 시체 위에 하나씩 돌을 얹었다고. 북한군이 내려오고, 한국군이 올라가고, 휴전이 될 즈음엔 어느새 돌무덤 지대가 되었다고.
 
나는 돌아갈 길도, 시간도 잊은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쇳소리를 내며 솟구쳤던 조명탄이 꺼지자 곧 비무장 지대에 드리워진 흰 연기 때문에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멀찌감치 철조망 위로 기어오른 인동덩굴만이 눈앞에 선명했다. 녀석은 뾰족한 철책마저 모자라 크레모아까지 뚤뚤 감싼 채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다시 조명탄 하나가 자신을 불사르며 환하게 터졌다. 연기가 걷히자 그을린 돌무덤 지대에서 얼핏 커다란 얼굴 형상을 본 것도 같았다. 조명탄이 마지막 몸부림을 치자 그림자 속에서 움푹 페인 눈두덩과 수염, 가시관이 도드라졌다. 나는 그곳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산지니 한 마리가 마른 울음을 내뱉으며 내 몸을 관통하여 북한 초소를 향해 날아가는 게 보였다.

글 : 이정하

제15회 기독신춘문예 소설 당선자 이정하 씨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기독교 소설 써나갈 것"

   
대학 졸업반이던 2005년, 한국대학생 선교회(CCC) 동아리 활동을 했던 저는 시인이 되면 다윗과 같은 시편을 쓰겠다고 서원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응답을 받자 교만해져서는 졸업 후 중국으로 떠나 오랜 방황을 했습니다. 이후 수년 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지는 못할망정 국가와 민족, 그리고 분단에 대해 어쭙잖은 고민을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지인들이 하나, 둘 취직을 하자 이번엔 저 역시 다급하게 회사에 들어가 줄곧 직장생활을 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비전을 쫓기보다는 워커홀릭에 빠져 성공신화를 쫓는데 급급했고 더 많은 성과를 내는데 온 신경을 쏟았습니다.
 
급기야 2013년, 중학교 때 복막염을 앓았던 저는, 이번에는 요로결석으로 똑같이 오른쪽 아랫배를 부여잡고 쓰러졌습니다. 해산의 고통보다 더하다는 통증을 몇 배로 느끼며 하나님께 반문하였습니다. 베드로처럼 거푸 당신을 부인하였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돌은 절로 빠져나갔습니다. 땅을 치며 회개하고, 또 회심하였습니다. 뒤늦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함이 생겼습니다. 최전방서 기독교 군종병으로 근무했던 경험을 돌이켜 기도하며 이 소설을 썼습니다.
 
한없는 사랑을 주신 아버지, 어머니께, 동생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멘토이신 성식이 형, 목사님이 된 단짝 의수, 그리고 온누리교회 요셉청년부 목사님과 마이프렌드 협의체 식구들, 주보팀 사람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친히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의 기대가 헛되지 않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고 또 쓰겠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이정하
- 1979년 10월 02일 출생
- 서빙고 온누리교회 출석
- 국민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 2005년 실천문학 신인상 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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