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을 향한 손

[ 논단 ] 주간논단

박종덕 사령관
2014년 01월 03일(금) 09:57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형편이 넉넉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한 끼 식사에 의해 마음이 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오죽했으면, 오병이어의 역사 후에 예수님을 찾아 가버나움까지 갔고, 또 예수님을 우두머리로 삼으려 했겠는가? 예수님 주변에는 이렇게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들을 박절하게 거절하지 않고 힘닿는 한 거두고자 애썼다.
 
그 때도 배고프고 머리 둘 곳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이 시대에도 배고프고 잠 잘 곳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며, 또한 적지 않다. 그들이 왜 가난하게 됐고, 어쩌다 먹을 것이 없고, 무슨 일로 잠잘 곳이 없게 됐는지 자초지종을 따지기 전에, 그들에겐 우선 밥이 필요하고 잠잘 곳이 필요함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렇게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을 대하여 이유를 묻지 않았고, 조건도 달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사람이고, 하나님이 지은 인간이고, 구원 받을 가능성을 지닌 생명이기에 아가페의 사랑으로 조건 없이 돌보셨다.
 
불쌍한 사람을 볼 때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람에겐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집트로부터 나온 선민에게 처음으로 법을 세워 주실 때에도 매 삼 년마다의 십일조를 성읍에 저축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돕도록 했다.(신 15:28~29) 심지어 과일이나 밀을 수확할 때도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 듬성듬성 남겨두고 수확할 것을 권고하셨다. 이러한 성경의 전통과 가르침은 회당 안에도 살아있었다. 회당에는 구호금 접수인이 있어서 불쌍하고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왔다. 두 명의 징수원은 매 금요일이면 시장과 가정 등을 돌며 돈과 물품을 모았다. 모아진 것은 그 날 나누어 주었는데, 긴급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위급을 면할 만큼 주었고, 장기 구호대상자는 하루에 두 끼 씩, 7일 동안 쓸 수 있도록 14 끼니를 받았다. 이 구호기금을 광주리기금(Kuppah)라고 했다. 이 외에 긴급 구호를 위해 축호 방문모금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이것은 쟁반기금(Tamhui)이라고 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회당이 지녔던 구제의 전통을 이으므로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왔다. 그리고 장기적인 구호를 위해 헌납 받은 재산을 기반으로 공동기금을 운영하였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불쌍한 이웃들의 어려운 형편을 덜어주고 위로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당한 명령인 동시에, 신앙인이 보여야 할 당연한 마음이고 실천이었다. 감사하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웃을 보살피려는 복지적 차원에서 섬김을 실천하고 있다. 정부나 지자체 또한 매년 새로운 복지정책을 내놓고 있으며, 무상보육 무상급식과 같은 대규모 복지지원까지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복지정책과 이웃에 대한 교회의 돌봄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말이나 소보다도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고 돌봄이다. 우리는 이 극한의 가난 속에 사는 무리들에 대해 그들의 수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궁극적인 복지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문화적인 나눔만으론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식주가 해결되더라도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면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복지는 정신과 영혼의 문제까지를 포함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의 복지정책들은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주변엔 주께서 측은히 여겨 돌보았던 무리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제도권의 복지에서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 말이나 소보다 못한 여건 속에 사는 무리들, 그들에 대한 돌봄은 성서적 돌봄을 실천해야 할 교회의 몫임에 분명하다. 교회는 그들을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에 대해, 또한 궁극적인 복지 차원에서 그들의 영혼까지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지를 연구하고 고민해야 한다.

박종덕 사령관/교회협 회장ㆍ구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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