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를 보며

[ 교계 ]

정종훈 교수
2013년 12월 30일(월) 14:46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 읽기

"나는 너로 인해 존재" 인정하는 공동체 정신
하나님의 자녀 형제ㆍ자매임을 알아야
스스로 '안녕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길
 
2013년 12월 10일, 한 대학생이 붙인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가 대한민국의 연말을 달구었다. 이 대자보는 대학생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 무지한 것이 아니라 침묵과 무관심을 강요받아 왔다고 지적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안녕치 못한 데 자신이 안녕할 수 있을까를 질문했다.
 
우리 역사에서 대자보는 언론이 진실을 보도하지 않거나 사회비판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때 등장하는 소통의 방식이었다. 특별한 자격이 없어도 자신의 생각을 공공의 장에 드러내는 기회이기도 했다. 지금 대학가는 물론이고 해외까지 전방위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안녕들 하십니까"의 대자보는 우리 사회가 상처투성이 가운데서 안녕하지 못한 사회라는 사실, 소수의 안녕한 계층이라도 실제로는 안녕치 못하다는 사실, 소통이 부족한 우리 사회가 당장에는 스스로 안녕하다고 착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오래지 않아 안녕치 못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대자보의 내용을 읽으면서, 그동안 우리 사회에 언어의 잔치가 난무했지만 그 언어가 명실상부하지 못했음을 보았다. 정의사회의 구현을 화려하게 내걸었던 군사정권에 정의가 없었고, 공정사회를 주장하던 정권에 공정이 없었으며, 국민행복시대의 도래를 약속했던 정권에 국민과 행복 모두를 찾기가 어려웠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형식은 있지만 진정성을 담지 못할 때, 그 언어는 거짓과 기만으로 돌변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진실에 침묵하거나 외면할 때,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라"(눅 19:40)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사회가 그 지경에 이르렀다는 위기의식과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한 대학생의 용기있는 대자보는 우리에게 큰 울림과 감동으로 다가왔으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사회의 문제에 더는 무관심하거나 무책임할 수 없고, 또한 무기력증에 빠질 수 없음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안녕들 하십니까"의 대자보에서 하나님의 뜻을 담아 그대로 전했던 구약 예언자들의 모습을 보았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가난한자와 나그네, 고아와 과부가 강자들에 의해 억울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마다, 종살이 하던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강자들의 불의를 드러냈고, 자기 스스로를 대변할 수 없는 약자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권리를 요구했다. 아합왕에게 포도원을 강탈당하고 억울하게 죽은 나봇을 대신해서 아합왕을 꾸짖었던 엘리야와 충직한 장군 우리야의 아내를 겁탈하고 그 죄악을 감추기 위해 우리야를 죽였던 다윗왕의 죄악을 드러냈던 나단이 그러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흔들리고 있다. 우화에서 보듯 임금과 측근은 현실을 아무리 은폐하려 해도, 임금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과 임금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이 영원히 감춰지진 않는다.
 
그렇다면 "안녕들 하십니까"를 물어야 하는 이 시대에 우리 기독교인들의 할 일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우리 모두는 인간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서로에게 형제자매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나만 잘 살고, 남이야 어찌되든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가족만 잘 살고, 우리 가족을 위해 남의 가족은 희생되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민족이나 우리 인종은 사람대접을 받아야 하지만, 다른 민족이나 다른 인종은 차별해도 좋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서로 돕고 의지하는 관계로 창조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너 없이 내가 있을 수 없고, 나 없이 네가 있을 수 없다. 나는 너로 인해 존재하고, 너는 나로 인해 존재한다. 너를 무시하면 내가 무시당하고, 너를 존중하면 내가 존중받는다. 세상은 우리에게 경쟁에 이겨서 혼자 잘 살라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서로 협력함으로 함께 잘 살라고 가르친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과의 내적인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삶의 모든 자리에서 공동체의 공공선과 특히 약자들을 위해 작동해야 하는 신앙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종훈 교수(연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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