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2월23~28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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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9일(목) 14:08

월-하나님이 영화롭게 한 사람
본문 : 창 41:37~45
찬송가 : 433장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이 우주의 실권자이시다. 모든 것이 그분의 손에 달려 있다(대상 29:1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낙하산 인사'를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리에 사람을 앉히실 때에는,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을 연단시키셔서 앉히신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랑하시고 그를 선택하셨지만, 일거에 애굽의 국무총리 자리에 '낙하산 인사'로 앉히지 않으셨다. 요셉의 일생을 보면 앞이 캄캄한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고, 치욕적인 모함을 받기도 했으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인신매매 되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대가로 감옥에 갇혔다. 깊은 마음의 상처(트라우마)와 치욕을 당했다. 요셉은 그 아버지 야곱과 달리, 그 자신의 잘못으로 고난당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요셉에게서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을 보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에게도 고난이 있다. 자신의 잘못으로 당하는 고난은 우리를 성화에 이르게 한다. 이런 성화의 모델이 야곱이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당하는 고난이 있다. 이 고난은 우리를 영화롭게 한다.

요셉은 '영화'의 모델이다. 요셉은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 곳에서 맡은 일을 잘 감당했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창 39:4)'라고 했다. 여기서 '섬기다'는 최대의 봉사, 충성으로 섬기는데 사용된 말이다. 이 말은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그 가정을 섬기기를 꼭 하나님을 섬기듯,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충성을 다해 섬겼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렇게 해야 한다(골 3:22~25). 요셉은 감옥에서조차 그렇게 했다. 그런 요셉을 하나님은 형통케 하셨다. 그리고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맡긴 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나에게 그 일을 맡겼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직업의식, 소명의식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임을 믿는다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어떤 일을 당하든지, 하늘과 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낌없이 우리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유익하게 되도록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장차 우리를 영화롭게 하심을 믿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오늘의 고난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아버지의 섭리인 줄 믿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명형 목사/속초만천교회

 


 

화-가족은 예배공동체
본문 : 딤후 1:3~5
찬송가 : 559장
 
신앙공동체의 최소 단위는 가정이다. 가정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된 장소이다. 무엇 때문에 최고의 축복된 장소일까? 하나님을 모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신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가족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를 드릴 때 부모와 자녀가 따로 드리는가? 그것은 재앙이다. 어떤 부정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이 오늘날 가정과 직결된 교회공동체의 현실이기도 하다. 낮 예배 시 우리 자녀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10년 후 한국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바울이 칭찬한 디모데의 신앙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는가? 3절에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디모데는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부모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를 배웠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보다 직접 부모의 삶을 눈으로 보고 배우는 것이 더 크다.
 
바울은 디모데를 칭찬하면서 5절에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했다. 삼대가 함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이었다. 삼대, 삼대가 계속이어지면 믿음의 대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세대차를 만드는 문화다. 교회마저 세분화된 교육이라는 명분하에 부모와 자녀, 어른과 아이를 분리하여 예배하게함으로 세대차를 만든 지 오래다.
 
진리는 하나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대차 없이 전수되어야 하고 예배는 가족공동체가 함께 하는 예배여야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민족이 산다. 예배에 있어서 어른과 아이를 분리시키는 것은 곧 믿음 전수를 포기한 것이고, 결국 가정과 교회의 영적인 몰락을 가져오게 한다. 신앙의 전통을 누가 전수할 것인가? 목회자나 교사는 조력자일 뿐이다. 결국 부모에게 그 책임이 있다. 예배란 하나님께 진지하게 나아가는 것임을 배우지 못할 때 예배를 가볍게 소홀히 여기게 된다. 특히 아이들만 모인 예배와 어른과 함께한 예배는 다를 수밖에 없다.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고 했다. 어릴 때부터 디모데는 조부모로부터 바른 예배의 자세를 배웠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를 청결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의 소유자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예배공동체여야 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바쁜 것을 핑계로 자녀들과 함께 예배드리지 못하고, 함께 있으면서도 잘못된 관용으로 자녀들을 예배에서 제외시켰다면 우리를 용서하여 주소서! 가족이 예배로 하나 되게 하시고 믿음의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우리 가정을 축복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무일 목사/삼천포제일교회

 


 

수-번제할 양은 어디 있나이까?
본문 : 창 22 : 1~7
찬송가 : 104장
 
만테냐가 그린 '성모자(The Virgin and child)'에는 아기 예수가 마치 염을 한 모습으로 있다. 아기는 두 눈을 감고 입술을 반쯤 벌리고 있는데, 그것은 살아 있는 아기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죽은 아기의 얼굴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하면, 이 아기는 희생제물이 될 아이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그림은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보여 준다. 성탄절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오시는 날로써 한 없이 기쁜 날이기도 하지만, 또한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아들이 희생 제물로 바쳐져야 하는 한 없이 슬픈 날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릴 것을 말씀한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이에 순종한다. 모리아산 가까이 왔을 때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질문한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어떤 사람이 이삭의 번제를 요구하는 하나님을 보면서 "기독교의 신이 진정한 신인가?"라며, 기독교를 비난하는 글을 쓴 것을 본 적이 있다. 상식적으로 이 명령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신약을 보아야 한다.
 
이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은 누구인가?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다. 이 어린양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흥분한다. 하나님을 향해 "너무 잔인하십니다. 무지비하십니다"라고 말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독자 예수님을 희생시키신 것이다. 우리는 왜 이 일에 흥분하지 않는가?
 
18세기의 위대한 영국의 신학자 메튜헨리는 이 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모형을 보여주는데, 그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 생명을 내어놓는 독생자이시다. 이삭과 그리스도는 둘 다 약속된 아들들이며, 둘 다 기적적으로 태어났고, 둘 다 아버지의 마음에 기쁨을 주었으며, 둘 다 정해진 때에 출생하였다. 또한 둘 다 그의 형제들에게 박해를 받았으며, 둘 다 죽음에 임하여 순종적이었다. 두 젊은이가 이삭과 동행하였으며 그리스도는 두 도둑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삭은 나무를 지고 갔고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 이삭은 아버지에게 질문을 했고, 예수께서도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물었다.
 
성탄절이 구원의 날인 이유가 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님께서 오신 날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성탄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며 묵상하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인창 목사/분당남부교회

 


 

목-끼리끼리의 법칙
본문 : 엡 3:20
찬송가 : 546장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법칙 가운데는 '끼리끼리의 법칙'이 숨어 있다. '동질성의 법칙'이라고 해도 좋고 '유유상종의 법칙'이라고 해도 좋다. 짐승들을 보자. 코끼리는 코끼리들끼리, 호랑이는 호랑이끼리 모여서 산다. 물고기도 마찬가지다. 결국 사람도 끼리끼리다. 종교와 사상과 이념과 가치관이 맞는 사람끼리 모인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성령은 거룩한 곳에 임하시고 악령은 죄악 가운데 임한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만물은 끼리끼리 모이고, 어우러진다.
 
우주 공간에는 두 가지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 하나는 성령이 이끄시는 긍정적인 에너지다. 이 에너지는 사랑과 행복을 가져다 에너지이다. 다른 하나는 사단이 이끄는 부정적인 에너지다. 이 에너지는 불행과 슬픔을 가져다주는 저주의 에너지이다. 이 두 에너지 역시 끼리끼리 법칙에 이해서 움직인다. 하나님은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게 하신다고 했다. 긍정적인 생각과 믿음을 가지면 긍정적인 에너지가 끌려오고, 부정적인 생각과 믿음을 가지면 부정인 에너지가 끌려온다. 끝없이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좋은 쪽으로 기울게 된다. 그러나 쉬지 않고 안 좋은 생각을 하면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안 되는 쪽으로 기운다. 근심하면 근심꺼리가 동서남북 사방팔방에서 밀물처럼 밀려오고. 좋은 생각, 밝은 생각, 복 받을 생각을 계속하면 온 천하에 가득 찬 좋은 요소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러므로 행복한 인생을 살기 원하면 행복을 지속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믿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과거의 실패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실패를 경험하고 보면 그 실패에 길들여진 나머지 자기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고정시킨다. 그리고 자기 미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봐, 나는 해도 안 되는 사람인가 봐.' 사실은 그 생각과 믿음 때문에 지속적으로 실패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실패를 생각하지 말고 미래의 성공을 생각하라. 인간의 한계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가능성을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의 미래는 그렇게 될 것이다. 가방끈이 짧아도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얼마든지 넉넉해 질 수 있다. 과거는 실패 했어도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당신의 미래는 성공할 수 있다. 과거에 실패한 당신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생각, 행복한 생각, 좋은 생각들로 당신의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우라. 그러면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당신의 미래는 행복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내 속에 들어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몰아내 주시고 긍정적인 생각과 믿음으로 가득 채워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두만 목사/대명교회

 


 

금-자아를 파쇄한 자의 대강절
본문 : 삼상 16:3~4
찬송가 : 104장

자아를 파쇄한 자는 첫째, 알지 못하는 길을 말씀에 응답하여 나아가는 자이다. 믿음의 선진들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앞으로 나아갈 때, 모든 것을 다 알고 나아간 것이 아니다. 사무엘도 하나님께서 누구를 왕으로 예선하셨는지 지시를 받지 못한 채 말씀대로 행하여 갔다.
 
믿음의 거장 노아를 보자. 10년이 지나고 120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낌새도 없는 약속의 말씀을 변함없이 붙잡고 방주 짓는 일을 계속했다. 믿음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설득하기 어렵고 믿기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므로 반드시 이루실줄 믿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사울이 맨 처음 받은 명령이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는 일이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첫 충돌은 모세가 출애굽 할 때 아말렉이 아라비아와 애굽을 잇는 대상로를 빼앗길까봐 지름길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거절한 것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백성들은 먼 길을 돌아서 광야길을 행보하게 되는데, 이때 아말렉 족속은 뒤쳐져 있는 연약한 자들을 뒤에서 공격해서 죽이는 야비한 짓을 한다. 또한 르비딤에 도착해서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어 모세를 원망하고 있을 때 아말렉 군대가 쳐들어온다. 이 싸움이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떠 받쳐서 승리한 전쟁이다. 이후에도 그들은 미디안 족속과 연합하여 농작물을 약탈하고, 괴롭혔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일을 책에 기록하여 대대로 기억하고 맹세하여 싸우리라 하시며 '여호와 닛시'깃발을 세우신 일이 아말렉과의 골 깊은 관계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울왕은 육에 속한 행실로 값지고 좋은 탈취물을 챙기며 진멸하라신 말씀을 거역함으로써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일에도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두 번째, 자아를 파쇄한 사람은 작은 것으로도 크게 쓰임 받게 된다. 다윗은 어디를 가던지 두 가지 물건(돌팔매와 작은 악기)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여호와 이름으로 말씀을 의지하여 나아갔더니 보잘 것 없는 돌팔매가 위력있는 무기가 되어 골리앗을 무찔렀다. 고독감에 못이겨 켜던 작은 악기가 왕의 심령을 치유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하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도 자신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를 크게 사용하셨다.
 
세 번째, 하나님은 우리가 날마다 자아를 파쇄하여 겸손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완벽하고 똑똑한 사람 보다는, 대게 약점이 있고, 부족한 사람을 골라서 사용하시고 당신이 영광 받으시기를 좋아하신다. 날마다 우리의 자아를 쳐서 겸손히 준비된 자가 될 때, 대망의 주님께서 찾아 주신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캄캄한 터널 속에 갇힌 것 같이 답답한 일상 속에서, 구세주를 대망하는 희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류정숙 목사/수계교회

 


 

토-말씀으로 돌아가자
본문 : 잠 22:6, 딤후 3:7
찬송가 : 199장
 
'가르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로'라고 한다. '야로'라는 말의 본래 뜻은 '인도한다. 앞서가면서 뒷사람을 따라 오게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작년까지 7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역대 60여명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중에 약 25% 정도를 배출한 대학이 바로 시카고 대학이다.
 
시카고 대학은 어떻게 훌륭한 인재들을 배출할 수 있었을까? 세계경제공황이 시작되는 1929년 로봇 허치슨이라는 30대 젊은 총장이 부임하였다. 자괴감에 빠져 있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희망과 꿈을 키워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The Great Book Program'(위대한 책 100권 읽기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학생들에게 고전 100권을 소개해 주고 졸업할 때까지 읽은 후에는 3개의 과제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첫째, 읽은 책 중에서 닮고 싶은 인물, 롤모델(role model)을 하나 정하라. 둘째, 그 인물을 통해 영원불변의 가치를 발견하라. 셋째, 발견한 가치관을 실현시킬 꿈과 비전을 설계하라.
 
그 후 학생들이 책을 통해 자신의 이상적인 인물을 만나고, 그들의 삶속에서 고귀한 가치를 발견하고, 또 그 가치를 추구하며 살기 위한 큰 꿈을 품으면서 학교가 바뀌기 시작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부자는 온갖 보석이 들어 있는 큰 가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가 가진 것은 지혜와 지식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타고 있던 배가 태풍을 만나 침몰하고 말았다. 그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모두 벌거벗은 채 구조를 받았다. 그 부자는 가지고 있던 보석을 몽땅 잃어 버렸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 배가 만난 태풍은 유대인이 오랜 세월에 걸쳐 기독교인으로부터 받은 박해를 상징한다. 또 하나의 다른 의미는 교육이 황금보다 더 중요함을 말한다. 가진 것이 없더라도 교육만 있으면 새로운 거리에서 새롭게 출발하면 된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자녀들을 인도하실 때 하나님이 자녀들을 향한 기대하심이 이뤄질 것이다.
 
호세아 4장 6절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 하지 않았나?"고 했다. 이제 우리 크리스천 가정에서 성경 교육을 부모님들이, 교회에서 교회학교 교사들이 사명감을 갖고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키워야만이 이 민족과 교회에 소망이 있다.
 
가장 위대한 교사인 부모님이여, 교회학교 교사여, 그대의 열정적인 성경 가르침에 이 민족의 장래가 달려 있음을 깨닫고 말씀 전수에 진력하자.

<오늘의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가정마다 무너진 가정 예배의 단이 쌓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중관 목사/샘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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