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의 정치참여

[ 논단 ] 주간논단

전재호 회장
2013년 12월 18일(수) 10:35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는 나라를 위한 기도로 막을 올렸다. 당시 임시의장에 선출된 이승만 박사는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평안북도 영변 출신으로 목사이기도 한 이 의원은 "원컨데 우리 조선 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이라고 기도했다.(국회속기록 제1호)
 
제헌헌법은 제12조에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규정했다. 그렇지만 당시 이 의원의 기도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왜 종교가 정치에 끼어드느냐'는 항의도 없었다. 모든 의원들이 나라의 안녕을 비는 그의 기도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제헌국회의 문을 연 감사기도는 바람직한 정교 관계의 전형을 보여준다. 정교분리 규정은 현행 헌법(제20조)에도 살아있다.
 
사실 정교분리란 게 마치 두부모 자르듯 정확히 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전 국민이 정치 평론가가 된 한국 사회만 봐도 인간이 정치적 동물임을 부인할 수 없다.
 
종교인도 인간인 이상 예외일 수 없다. 과거 권위주의 군부독재 시절 종교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 현안에 목소리를 냈다. 모두가 침묵할 때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용기 있는 발언은 종종 시대의 나침반 구실을 했다.
 
지난달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소속 신부와 신도들이 '불법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시국미사'를 가졌다. 그러나 미사 강론에서 한 신부가 북한의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폭침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해 사회가 큰 충격에 빠졌다. 피해자 가족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한때 박수를 받던 종교인의 외침이 왜 지금은 국민적 분노의 대상이 됐을까. 그것은 울림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 귀에 거북하게 들리면 공감하기 어렵다. 종교가 국민통합, 낙태 반대, 인권보호, 생명수호, 사형제 폐지 등을 말할 때 사람들은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해군기지 공사 현장이나 송전탑 건설 현장에 보이는 종교인의 모습은 호불호가 갈린다. 해군기지나 송전탑은 종교적 열정을 앞세워 기필코 타도해야 할 악(惡)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안보나 전력의 안정적 공급은 전문가의 영역에 속한다.
 
서민의 수호자를 자처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는 지구촌에 잔잔한 감동을 던졌다. 그는 지난달 성베드로 광장에서 신경섬유종증을 앓아 흉측하게 변한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아프리카 난민들을 배척하는 유럽 지도자들을 향해선 "유럽이 제 안위만 생각하느라 타인의 울음 소리는 듣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보기에 따라선 교황의 정치적 간섭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교황의 '간섭'에 분노하지 않았다. 그의 말과 행동엔 그리스도의 사랑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원로 기독교 지도자들이 지난달 말 '나라의 안정을 위한 조찬 기도회'를 갖고 "정치권은 정쟁을 멈추고, 종교계는 정쟁에 휘말리지 말고 나라를 위해 기도할 것"을 당부했다. "민감한 정치 사안에 대한 편향적 발언을 삼가고 종교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상생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서 한국교회가 지켜야 할 가이드라인을 적절히 제시한 것 같다.
 
종교인도 신앙과 양심에 따라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울림이 없는 간섭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자칫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불행한 사태가 빚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 지도자의 정치적 발언은 돌다리를 두들기듯 신중할 필요가 있다.

전재호 회장/파이낸셜뉴스ㆍ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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