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갱도의 막다른 곳)에서 만난 예수님

[ NGO칼럼 ] NGO칼럼

방은근 목사
2013년 12월 13일(금) 17:38

몇 일 후가 되면 정선 골짜기에 들어 온 지도 19년째가 된다. 참 세월이 빠르게 흘러간다.
 
하늘에선 함박눈이 쏟아지고 아내는 혼자 석탄 묻은 시커먼 구석에서 눈물을 닦고 있었다. 해발 700m 탄광촌인 정선 고한으로 목회하러 간다고 하면 "당신 혼자 가시오"라고 할까봐 목적지도 알리지 못한 채 무작정 이사짐차를 타고 이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필자는 너무 기뻤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이 산 너머 탄광촌 태백이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장년 10명 안팎의 작은 교회. 모두가 광부 가족이고 막장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학생들도 서너 명 있었다.
 
첫 심방 요청이 왔다. 여전도회장 집사님 댁이다. 방안에 들어가니 밥상이 차려져 있는데 수저 옆에 맥주가 한 잔씩 놓여 있었다. 첫 심방부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탄광에는 세가지 문화가 있다. '술'과 '춤'과 '화투도박'이다. 여성 집사님들끼리 술마시고 싸우는 모습을 필자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님! 단독 목회 초년생인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기도하는 가운데 '네가 먼저 막장 속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제직회를 통해 만장일치로 필자의 광부 취업이 통과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막장 속에 들어가서 식겁해 봐라"하는 조롱도 있었다고 한다. 운동으로 한 달 동안 체력을 단련한 후에 석탄채굴 구역인 동원탄좌에서 정식으로 일하게 됐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주님! 목회도 못해보고 막장 속에서 죽을 수는 없잖아요! 막장 속으로 들어가라는 소리는 예수님의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요?' 필자는 스스로를 원망하면서 후회도 많이 했다.
 
그러나 지금 누군가가 목회의 전성기가 언제였는지를 묻는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막장 목회가 저의 최고의 절정기였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 시기는 필자의 목회 좌표를 설정해 주었다.
 
처음으로 새벽마다 매일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엉엉 소리내어 울면서 드리는 통곡의 기도가 쏟아져 나왔다. 아내와 함께 매일 새벽마다 기도를 드렸고, 부산에 계신 어머니도 매일 울면서 제발 막장에 들어가지 말라며 간청했다. 어머니는 막장 사고로 매일 울리는 구급차 소리를 들으시면서 태백에서 수 십 년을 사신분이다.
 
지하로 550m를 내려와 수평으로 4200m를 파들어간 막장에서 점심을 먹는데 한 쪽 구석에서 작은 빛이 반짝였다. 쥐가 우리와 함께 나누어 먹자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시락의 밥을 퍼서 쥐에게 던져 주고 쥐와 함께 점심을 나눠 먹으면서 나눔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식사 후 동료 광부들은 금연 규칙에도 불구하고 몰래 숨어 담배를 피우고 본인은 조용히 막장 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주님! 오늘도 무사하게 지켜 주세요! 주님! 죽을 때까지 빈민들과 함께하는 목회하겠습니다. 주님과의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이후 막장 속에서 3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지만 주님은 지켜 주셨다. 위에서 수 십톤의 바위가 떨어졌으나 목숨을 건져주신 은혜! 석탄과 함께 흘러내려 온 폭약이 바로 옆에서 터졌는데 지켜주신 은혜! '쥐약 놓았다(폭약을 발파한다)'는 고함의 뜻을 몰라 피하지 못했을 때 지켜 주신 은혜!
 
한 후원 교회에서 사준 악기로 부친을 사고로 잃은 두 학생을 포함해 몇 명의 탄광촌 아이들과 찬양단을 조직했다. 그리고 눈물의 감사 찬양을 드렸다. 먼저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가 입으셨던 석탄묻은 광부 옷을 입고 말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왜, 슬퍼하느냐? 왜, 걱정하느냐? 무엇을 두려워 하느냐? 아무 염려 말아라. 큰 어려움에도, 큰 아픔이 있어도 이젠 아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를 붙들어 주리라.'

방은근 목사/도박중독 상담자ㆍ태백중앙병원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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