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2월16~21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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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2일(목) 15:44

월-충성의 상급
본문 : 삼상 16:12~13, 계 3:7~13
찬송 : 333장
 
본문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한 내용이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는 말씀이 서문이다. 여기서 다윗의 뜻은 '여호와께 사랑 받은 자'이다. 한국 교회는 그 동안 선교 100년의 역사상 세계 최고의 축복을 받았다. 빌라델비아란 뜻은 '형제를 사랑하다'란 의미이다.
 
그러면 다윗의 열쇠가 왜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어졌을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형제에게 나누고 베풀어 줄 때이다. 지난 5~6년간 기독교 인구가 500만 명이나 줄었으며, 지난 한 해 3000여 개의 교회가 십자가를 내리게 되었다. 지금 이 시대는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 게으른 종과 충성된 종을 분리하는 시대이다. 이제 우리는 다윗의 열쇠를 민족의 제단 제단마다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이 막중한 시대적 사명을 하나님은 새 해, 새로운 청지기들을 통하여 회복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윗의 역사와 빌라델비아 역사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을까?
 
첫째,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은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되어 별 볼일 없는 말째가 별 중에 별인 가장 위대한 왕이 된 것이다.
 
둘째, 작은 일에 충성하여야 한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배반하지 아니하였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첫 사랑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는 것을 주님의 지상명령으로 다시금 받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할 때 부흥의 역사가 수 년 내에 이 땅에 다시 이루어질 것이다.
 
셋째, 인내하며 말씀을 지켜야 한다. 영국의 석학 아놀드 토인비는 27년간 세계 역사를 연구한 끝에 '도전과 응전'이란 베스트셀러를 출간하였다.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교회도 앞길을 가로막는 도전의 세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주저앉으면 침몰이다. 교회 부흥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면 해결자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단호하게 응전해야 한다.
 
그러면 충성한 사람에게 예비된 상급은 무엇인가?
 
다윗에게는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으매 그의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고 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면류관의 상급, 성전의 기둥, 세 예루살렘의 이름을 주셨다. 새해에는 새 결단, 새 충성으로 멋진 상급의 주인공이 되자.
 
<오늘의 기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이 민족의 제단 제단마다 충성의 사역자들이 기둥처럼 세워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중관 목사/샘물교회


화-십자가의 관점으로
본문 : 롬 6:23, 고전 1:18
찬송가 : 91장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관점을 가지고 자신을 보게 되어 있다.
 
첫째, 율법의 관점으로 나를 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필연적으로 율법의 관점으로 나를 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율법의 관점으로 나를 보는 순간 두렵고 떨리는 가슴을 어쩔 수 없다. 율법의 관점으로 나를 보면 나는 죄인이다. 아니 죄인 중에 괴수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롬6:23)고 했는데 영락없이 사망에 속한 자다. 죄의 삯은 저주와 형벌과 진노가 따르고 마지막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진다. 율법의 관점으로 나를 보면 나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두려움과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내 자신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기대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축복은커녕 저주가 두려워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싶을 뿐이다. 율법의 관점으로 보면 나의 운명은 불행하며 안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둘째, 십자가의 관점으로 나를 본다. 십자가의 관점으로 나를 보는 순간 놀랍고 경이로운 내가 보인다. 모든 죄에서 사함 받은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보인다. 의롭고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인다. 십자가의 관점으로 나를 보는 순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요, 은혜와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오늘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천국갈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천 번을 생각하고 만 번을 생각해도 잘 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관점으로 나를 보아야 한다. 십자가의 관점으로 보여진 나를 절대적으로 믿고 확신해야 한다. 율법의 관점으로 나를 보면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자성하고 회개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율법에 얽매이고 사로잡히면 안 된다. 날마다 순간마다 십자가의 관점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나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기대하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잘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아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 위대한 꿈을 꾸며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이 때 마귀는 율법의 관점으로 나를 보게하며 절망하도록 끝없이 미혹할 것이다. "너는 네가 지은 죄 때문에 저주 받을 것이야, 복 받기는 틀렸어, 네가 그래 갖고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 너는 안 돼, 네가 힘들고 어려운 것은 다 너의 죄 값이야"라고 속삭인다.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한다. 끝까지 십자가를 붙들고 부활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마귀는 물러가고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복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율법의 관점이 아닌 십자가의 관점으로 보여진 나를 믿고 긍정적인 미래를 꿈꾸며 당당하게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두만 목사/대명교회


수-새 힘이 필요합니다!
본문 : 사 40 : 30~31
찬송가 : 354장
 
예전에 차두리 선수가 나와서 선전하는 내용이 있었다. "간 때문이야! 간 때문이야! 피곤은 간 때문이야!"라면서 피로회복을 위한 약을 선전하는 광고였다.
 
현대인들은 피곤하다. 피곤하면 쉬어야 하는데, 피로회복제를 먹으면서까지 계속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주님 오시기 이미 수백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 시대의 특징도 오늘 우리 시대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 준다.
 
결국 인간의 피곤과 곤고함의 문제는 시대적, 상황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문제임을 보여 준다. 성경은 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다.
 
"소년이라고 피곤하고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지되…" 이 모습은 이사야 시대에는 바벨론에 의해 공격당하고 포로된 이스라엘의 모습이지만, 오늘날에는 세상의 포로된 이 시대의 모습이다. 얼마나 힘든지 소년은 피곤하고 곤비하다. 장정은 비틀비틀 넘어지다가 결국 자빠진다. "못 살겠다, 죽겠다"고 한다. 어린아이도, 학생도, 대기업의 사장도, 젊은이도, 어르신도 피곤하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러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새 힘이 필요하며 그 힘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센 힘'이 아니라 '새 힘'이다. 강한 힘이 아니다. 이전보다 좀더 나은 힘이 아니다. 없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힘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 세상을 이길 수 없다. 죄된 본성을 이길 수 없다. 우리는 넘어지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새 힘을 얻을까? 그것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다. 여호와께 소망을 두는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음을 알고 전적으로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분의 계획을 믿는 것이다. 영원하신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여호와, 명철이 한이 없으신 주님을 믿는 것이다.
 
비행기가 뜨는 것은 양력 때문이다. 비행기가 날기 위해서는 이 양력이 중력을 이겨야 한다. 비행기가 중력보다 큰 양력을 내기 위해서는 시속 300km 이상으로 달려가야 한다. 비행기가 가장 많은 연료를 소비할 때가 이 때라고 한다. 최선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뜰 수 없다. 그러나 비행기가 일단 날면 바람을 타고 순행을 하게 된다. 그처럼 커 보였던 빌딩도 아파트도, 다 작아 보인다. 그 큰 산들도 한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여호와를 앙망할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이겨낼 것이다. 나의 죄된 본성도 나를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만 보였던 모든 문제들이 아주 작게 보일 것이다.
 
<오늘의 기도>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새 힘을 주옵소서. 우리의 맘과 시선이 여호와께만 소망을 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을 기도합니다. 아멘.

박인창 목사/분당남부교회


목-행복하게 사는 비결
본문 : 시 92:12~15
찬송가 : 411장
 
엔트리 컨설팅의 김미성 대표는 100세를 겨냥한 우리의 삶이 길어지면서 인간관계에 있어 소통이 경쟁력이 되는 사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냉소적인 사람, 화를 잘 내는 사람, 대인관계가 닫혀 있는 사람들이 질병에 잘 걸리고, 단명하고, 노화도 빨리 온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된 적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긍정적이고, 경건한 생활 속에서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성경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행복한 마음을 가지기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성장한다고 한다. 종려나무는 열매가 많고 오래 살고 번성하는 나무이다. 주님의 은혜 아래서 성도는 여러가지 선행을 행하고 장수하여 영화를 누리게 되는 축복이 따르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라고 했다. 백향목은 향기가 있고, 썩지 않는 상록수로 크게 잘 자란다. 13절에 보면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라고 나온다. 여호와의 집에 심긴 나무는 하나님의 전에 거하는 성도를 뜻하며 주님과 연합하여 사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 수밖에 없으므로 성전에서 흘러나와 공급하시는 생수(힘)를 통해 날마다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지칠줄 모르고 산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는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정하니"라고 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일하니 청년의 때나 노년의 때나 강건함이 여전하여 85세가 된 나이에도 전쟁터에 나가 승리할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은퇴라는 말은 영어로 'retire'이다. '타이어를 갈아 끼운다'는 의미이다. 끝이 아닌 자동차에 타이어를 갈아 끼우듯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몸은 비록 연수의 흔적이 있으나, 속사람은 여전할 수 있다. 신앙은 우리의 나이와 상관없이 더욱 희망과 용기를 공급하고, 청정한 삶으로 이끌어 준다. 우리 사회에 '하하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적이 있다. 영어로는 'happy aging healthy & attractive'인 하하족은 소통의 관계를 통하여 문화생활을 즐기고, 건강관리를 하면서, 나이 드는 것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삶을 지향하는 중장년층을 일컫는다. 또한 그들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종교생활을 하길 원했다. 왜냐하면 종교인들은 긍정적이며 소통관계를 통해 행복감을 느끼며 살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 행복하고 건강한 한 주간을 이끌어 가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행복한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 급변하는 시대에 오직 하나님을 붙잡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류정숙 목사/수계교회


금-주의 날개 그늘 아래 (12월 3일)
본문: 시 36:7~10
찬송가: 419장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얻기 위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전부 투자하기도 한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보다 그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보배가 있는 곳에 우리 마음도 있다.
 
본문에서 다윗은 무엇이 그토록 보배롭고 소중하다고 고백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토록 보배롭다고 말한다(7절). 하나님의 인자하심, 곧 헷세드(히)라고 말한다.
 
헷세드는 '사건'이다. 인간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사건이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건이다. 성경은 이러한 사건을 헷세드라 했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헷세드이다. 광야 40년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일도 하나님의 헷세드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헷세드에 감격했다(호 11:8~9).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아무리 이해해보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건화된 것이 헷세드이다. 다윗은 이 하나님의 헷세드가 '어찌 그리 보배로운가' 감탄하며 고백한다.
 
여러분의 삶에서 무엇이 참으로 보배롭다고 감탄하는가? 여러분의 가치관은 무엇인가?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도리어 우리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우리 삶을 파괴하고 불행하게 만들어서 결국 후회스럽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가치관이 잘못됐다는 것을 반증한다.
 
주님의 헷세드, 그 사랑, 인자하심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그 날개 아래 피하는 사람에게는 광명, 만족, 생명, 희열, 안전함이 있다(8~9). 주님의 헷세드를 진정 보배롭게 여기는 사람은, 어려울 때 다른 곳이 아닌 주님께 피할 줄 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나아간다. 그렇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암탉이 날개 아래 그 새끼를 모음같이 내 백성을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고 탄식하셨다.
 
하나님의 헷세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났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헷세드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사건이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헷세드(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그 사랑을 최고로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에게는 자유와 안전이 있다. 그 사랑을 알고 경험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게 된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지금 이대로가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최고의 가치는 무엇인지 돌아보기 원한다. 그리고 '주의 인자하심이, 헷세드가,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라며 고백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란다.
 
<오늘의 기도>
주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셨사오니, 거듭난 가치관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며, 누리며, 전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명형 목사/속초만천교회


토-부모들이여!
본문 : 창 18:18~19
찬송가 : 199장
 
오늘날 교육학의 발달은 있지만 참된 교육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면 교회교육은 어떨까?
 
서서히 무너져가는 교회학교를 바라보면서 교사들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현실은 마치 쓰나미에 쓸려가듯 아이들과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가고 있다. 교회교육도 많은 발전을 이루어 왔지만 교회학교는 점점 침체되어 가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결국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학교가 없었던 시절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자손 대대로 자녀들에게 전수하며 지켜 나왔을까? 오늘 본문 말씀 19절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명하여'라 함은 무슨 뜻인가? 다시 말하면 가르치고 교훈하여 지키게 하라는 뜻이다. 그 대상은 분명히 자식과 권속 즉 가족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 자신이 책임지고 이렇게 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다. 이것을 좀 더 분명하게 이스라엘 부모들에게 확대해서 명령한 것이 바로 신명기 6장 4~9절 말씀이다. 먼저 이스라엘 공동체의 부모된 이들에게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고 했다.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적극적이어야 한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이유는 분명하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고 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는 교사가 되라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는다. 교회학교 교사들은 책임지는 자들이 아니다. 돕는 자에 불과하다. 내 자녀는 분명히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내 자녀가 교회를 떠나는 것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 대신 져줄 수 없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신앙을 지켜온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하심대로 부모들이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대한 책임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의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내 자녀를 위하여 부모 자신이 믿음의 교사가 되라! 이것이 곧 교회를 위하는 것이고, 민족을 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것이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우리는 자녀들과 함께 진심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가족인지를 깊이 묵상하자.
 
<오늘의 기도>
자비하신 주님!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육의 양식으로 자녀들을 배불리려는 일에는 혼신의 힘을 다하면서도 정작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영혼의 양식은 공급하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어리석음을 돌이켜 이제부터라도 자녀들의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는 부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무일 목사/삼천포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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