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회의 역사와 사역을 통해 본 여성 리더십

[ 여전도회 ]

임성빈 교수
2013년 12월 04일(수) 10:28
기독교문화적 관점에서

Ⅰ.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설립 - 설립 목적과 의의
 
마포삼열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널다리골 교회 여신도 신반석, 김정신, 이신행 등을 중심으로 63명의 조직회원으로 여전도회 역사는 공식적으로 출발하였다. 그 날이 1898년 2월 20일이었다고 한다. 그 후 1915년부터 1928년까지 각 지방연합회가 창립되면서 노회 단위 연합회가 조직되었고 1928년 전국연합회 창립 시까지 11곳에서 지방연합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1928년 제17회 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승인을 받아 총회 기관으로서 발족하게 되었다. 당시의 정식명칭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연합대회'로 결정하고, "그리스도 복음을 선전하기 위하여 총회 내외지 전도부 사업을 찬조하기로 한다"는 목적을 명시하였다.
 
'그리스도 복음을 선전함'과 '총회 내지 전도부 사업을 찬조'한다는 명시적 목적을 구현하고 실천하는 과정은 여성리더십의 계발과 애국애족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대한 충실한 응답을 동반 하였다. 사실 여전도회 운동은 시작부터 교회와 기독교 학교에서 기독교 교육과 신문화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참여하였고, 따라서 여성 평신도 리더십에 주목하였다.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섬김의 지도력을 실천한 여성 지도자들은 특별히 전통 문화 속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한국 여성을 위해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전도회 운동은 어두운 그늘 밑에 있던 한국 여성에게 복음의 빛을 주어 새 생명을 얻게 하는 선교 여성의 사명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애국 운동이라 할 수 있다."
 
Ⅱ. 1930~1940년대 '독립의 시대'
 
1. 민족과 함께하는 신앙적 윤리 형성: 국민계몽운동에 앞장선 여전도회
 
여전도회는 절제운동을 통하여 국민계몽운동을 일으켰고 물산장려운동, 폐창운동, 금주금연운동, 축첩반대운동을 펴 사회정화에 앞장섰다. 여전도회 사경회 시 금주 강연을 하기도 하고, 전도 시에 금주에 대한 전도지를 뿌리기도 하면서 실제 생활의 개선을 호소하고 나섰다. 그리고 1922년 평양 예수교 장대현교회 청년회에서 조선물산장려회가 발족한 이래 기독교 여성은 직접적으로 전국에 봉화를 들어 이러한 운동들을 파급시키는 데 힘썼다. 이와 같이 초기 여전도회 구성원들은 전도에만 열심을 낸 것이 아니라 민족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운명을 같이한다는 철저한 의식이 있었다. 당시 여전도회 운동에는 전도운동, 금주운동, 여성교육운동, 생활개선운동 등이 밀접하게 연계 되어 있었다. 이러한 여전도회의 실천적 리더십은 여성들의 뜨거운 '하나님 사랑'을 민족을 품는 '이웃 사랑'과 균형 있게 조화시킨 리더십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2. 개인윤리와 공동체적 윤리의 조화
 
(1) 신앙과 정치

a. 교회 밖 정치

① 3ㆍ1 운동
 
3ㆍ1 운동을 거족적 항일 민족운동으로 추진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한 사람 중에는 각계각층의 수많은 여성이 있었다. 그 중 기독교계 여성 리더십의 활약은 단연 발군이었다. 김마리아, 김순애, 황에스더, 황애덕, 임영신 등이 그들이었다. 또한 만세운동에 참여한 여학생들도 거의 대부분 기독교 여학생들이었으며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부인들도 뜨거운 민족의식과 인간적인 자각을 갖고 조국의 독립회복 열망을 표출하였다. 일제 헌병대가 조사한 1919년 말까지 3ㆍ1운동 관계 피검자 종교별 상황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비종교인까지 포함한 총 검거자 중에서 17.6%를 차지하고 있으며, 종교인 가운데에서는 가장 많은 3천 4백 26명이었다. 특히 여성 피검자의 수는 총 4백 71명 중 3백 9명이 기독교인으로 65.6%나 차지하며, 그 중 장로교 여성은 2백 32명으로 여성 검거자의 반을 차지하고, 장로교 남성의 10분의 1이나 되었다. 한편 1919년 10월에 열린 장로회 총회 자체에서 발표된 바에 따르면, 장로교회가 당한 참화 가운데 감금된 남자신도가 2천 1백 25명, 여자신도 5백 31명으로 남녀가 4대 1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당시 여자의 사회 활동이 일반 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목숨을건 국가적 운동에 4대 1의 비율로 참여했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다.
 
②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활동
 
기독교 여성 리더십의 활약은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종전의 혈성애국부인회, 대조선애국부인회, 경성애국부인회, 송죽회 등 모든 여성 애국단체를 총괄한 것으로, 전국적으로 대표들이 모여 김마리아 선생 (전국연합회 제7~10대 회장 역임)을 회장으로 모시고 각 도마다 지부를 두고 맹활약하였다. 애국부인회는 나라의 독립을 되찾는 그날까지 다 같이 생명을 걸고 일제에 맞서 싸울 것을 결사적으로 다짐하였다. 그리고 막대한 금액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안 되어 애국부인회의 활동이 발각되었고, 임원진은 물론이고 각 지방 지도급 인물 모두가 체포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투옥 후에도 여성 리더십은 감옥에서도 성경 가르치는 일에 열심을 내어 죄수들의 생활에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리더십은 개인적 신앙고백과 민족사랑의 조화,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의 조화를 복음의 우선으로 모색하고 실천한 모범적 전형이라 할 수 있다.
 
③ 신사참배 반대
 
일본은 한국교회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박해했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사건은 1911년의 '백오인 사건'과 1919년 3ㆍ1 운동에 대한 보복과 1935년에서 1945년 사이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가해진 박해였다. 이 시기는 한국 교회의 위기와 대 환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학교에는 폐교령이 내려지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위협을 견디지 못하여 1938년 9월 총회에서 신사 참배를 강제로 가결함으로써 교회가 굴복한 셈이 되었다. 이때 여전도회 전국연합회는 회의 시작 때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례를 강요하는 것 때문에 1937년 대회는 모이지 않고 실행위원만 모여서 선교 사업을 추진하였다.
 
b. 교회 안 정치: 여장로 제도 청원을 중심으로
 
남연합회는 당시 회장 최영혜가 평범한 가정주부였지만 교회 발전과 선교 사업 확장을 위하여 지도자적 위치에 있어야 함을 인식하고, 여장로 제도 허락 청원을 소속 노회인 함남노회에 제출하였다. 노회는 이 청원을 수락하였고 결국 평북 선천읍 남교회에서 열린 제22회(193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여장로 청원을 헌의하였다. 이것은 여전도회 전국연합회가 설립된 지 5년째 되는 해이며 초대 지회인 평양 널다리골교회 여전도회가 조직된 지 35년이 지난 해였다. 그러나 이 청원에 대하여 총회는 정치 제5장 제3조를 개정할 필요가 없으므로 허락할 수 없다고 간단히 일축해 버리고 말았다. 여장로 청원문제는 총회에서 기각되었으나 이 일이 도화선이 되어 1934년 9월 총회를 앞두고 김춘배 목사가 '여권문제'라는 제목으로 여장로 제도에 대한 타당성을 논한 내용의 글을 <기독신보>(1934. 8.22)에 발표한 것을 발단으로 2~3년간 논쟁을 유발하였다. 1933년 제안된 여장로는 61년이 지난 1994년 제79회 교단 총회에서 결의되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필요할 만큼 우리 사회와 교회의 가부장적 문화와 제도는 완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성리더십은 이러한 완고함을 사랑과 인내와 성경적, 신학적 설득과 기도라는 모성적 리더십의 실천을 통하여 결국에는 변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된다.
 
(2) 신앙과 경제
 
a. 교회 밖 경제: 국채보상운동을 중심으로
 
구한말 당시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망국차관은 1천 3백만원에 달하였다. 이러한 현실 문제를 타개해 보고자 남자들은 금연운동을 일으켰다. 여성들도 이 국채보상운동에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부인들을 중심으로 한 여성리더십은 먼저 차관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는 목적을 세웠으며, 이러한 경제ㆍ정치적 해결을 통해 결국에는 남녀평등을 이루고 학교를 설립하자는 뜻을 세웠다. 여성 리더십은 국채보상을 위한 운동 중 하나로 반지를 바치자는 운동, 즉 탈환회 운동도 이끌었다. 그들이 나라를 구하고자 나섰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온다. 사회에서 자신에 대한 뚜렷한 자기의식을 가져보지 못한 이들이 자기의식과 함께 국가의식에 눈을 떠 만천하 여성들에게 반지를 바쳐 나라를 구할 것을 호소한 것이다. 이밖에도 여성들은 용돈을 절약한다든가 작은 규모나마 자기의 수입을 떼어서 바친다든가 하는 일이 수없이 많았다.
 
b. 교회 안의 경제
 
전통적으로 아내들이 집안 살림을 꾸려왔듯이 한국교회의 연합활동과 선교사역에 있어서 여성리더십의 실제적 공헌, 그 중에서도 경제적 역할은 자못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1930년 제3회 여전도회 총회에서 여전도회 연합대회는 중국 산동에 여선교사 한 사람을 파송하기로 결정하고 5백 20원을 선교비로 적립하였다. 여전도회는 지금까지 장로교 총회에 전도비를 보조해 오던 방식을 수정하여 직접 선교지에 여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1931년 여전도연합회 총회에서 결의한 바대로 김순호 전도사를 초빙하여 산동 선교사로 파송하게 되었다. 여전도회가 630원의 선교사 봉급을 단독으로 감당하면서 대국(大國)이라는 중국에 여성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었다. 일찍이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하여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적 참여를 실천하였던 한국교회의 여성리더십은 점차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씀으로써 하나님 나라 운동을 구체적으로 확장하여 갔다. 그 외 대만, 인도네시아, 멕시코, 홍콩 마카오, 필리핀, 케냐, 볼리비아, 브라질-아마존, 인도네시아(자카르타),외항선, 일본, 뉴질랜드, 태국선교 등 구체적인 선교 사항은 하나님 나라 선교를 위한 여전도회의 경제적 지원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1936년 9월 교단 25회 총회는 전국교회가 1월 셋째 주일을 '여전도회 주일'로 지킬 것을 결의해 주었다.
 
(3) 신앙과 교육ㆍ문화: 평신도 교육을 위한 여전도사 교육
 
1930년대는 한국 교회의 성령의 불이 일어나 평신도들의 전도열이 상당히 높은 시기였다. 지역 복음화를 위해 정책에 따라 선교사를 도와 심방하면서 성경 연구를 할 수 있는 여전도사가 필요하여 지방마다 성경학교가 세워졌다. 평양에 여자 신학원과 원산 마르다 신학원이 설립되어 많은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Ⅲ. 1950~1970년대: '재건과 연합의 시대'
 
1. 신앙과 정치
 
(1) 6ㆍ25 전쟁과 세계 교회여성과의 연대 (1950년대)
 
6ㆍ25 전쟁 발발은 구미 각국의 여러 교회들과 한국 교회 사이의 자매의식과 연대를 더욱 긴밀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 미국에서 열리는 70개 교파 3천여 회원이 참석하는 여성대회에 김필례 회장은 한국교회와 여전도회 연합회의 눈부신 발전상을 세계에 알리려는 부푼 꿈을 안고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전쟁으로 김 회장의 방미 여행의 성격은 완전히 변하였다. 약 1년간 계속된 순회 강연은 한국전쟁을 바로 인식시키고 도움을 요청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게 되었다. 또한 이 기회는 신앙과 선교적 사명 나눔을 통하여 세계 여성들과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연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전 후 여전도회는 더욱 활발하게 세계교회와의 연대를 강화하여 나갔다. 세계 각국 교회 대표들이 한국을 더욱 빈번히 방문하였으며, 동시에 한국 교회여성들도 다양한 세계 대회에 참석하면서 세계 교회안의 여전도회로서의 위상을 세워가는 토대를 착실히 쌓아갔다.
 
(2) 교단 분열과 여전도회의 화해 운동(1960년대)
 
1959년 제44회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신학교 문제를 둘러싸고 에큐메니칼과 NAE로 갈라져 논쟁은 확대되어 갔고 경기 노회는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총회가 시작되자 경기 노회 명단 문제로 격한 논쟁이 벌어졌다. 개회 벽두부터 회의를 진행하지 못하자 총회장이 정회 선언을 하였다. 이후 양측 지도자들이 통합 운동을 했으나 결국은 신학교 문제와 WCC 가입 건으로 회의는 결렬되고 NAE는 '합동', 에큐메니칼은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분립하게 되었다. 당시 회장 주선애 씨와 총무 이필숙 씨는 화해 운동에 나서서 여전도회는 싸우지 말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전국 각지의 회원들에게 성명서를 보내어 조용히 기도로 어려운 때를 이겨나갈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결국 총회가 완전히 통합, 합동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오래 중립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여전도회 전국연합회도 총회 산하 단체로서 합동, 통합 양측으로 나뉘어 모이게 되었다.
 
(3) 교회 내 여성안수 청원
 
1946년 해방 후 첫 총회에 여전도회 연합회의 지도적 인물인 김필례, 유각경, 신의경, 김말봉 제씨가 '여장로'제도를 청원한 바 있으나 총회에서 이 문제는 38선이 없어지고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보류하기로 했다. 이후에도 계속 김성무 씨가 주동이 되어 여장로 제도를 추진해왔다. 그러나 번번이 논의도 않고 기각해 버렸다고 한다. 1956년 총회에서 서울노회장 한경직 목사가 권사직을 평생직으로 해달라는 것은 허락하기로 하였다. 1961년 제46회 총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장 최이권 씨의 '여장로' 청원건을 토의한 바, 1년 연구하자는 동의와 기각하자는 개의가 있으면서 투표 결과, 가 84표, 부 42표로 기각을 당하였다. 1969년 제34회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주선애 회장은 '여장로'를 청원하는 전략에 변화를 가져왔다. 청원은 계속하되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산하 27연합회가 각기 서명 날인하여 소속 노회에 청원하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후 1970년부터는 각 연합회에서 소속 노회에 청원서를 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꾸준한 노력은 1978년 제63회 총회에서 여러 노회에서 헌의안건으로 채택하여 상정된 안건이 총 투표수 405표 중 가 197표, 부 208표, 즉 겨우 11표차로 부결됨으로 그 통과가 시간문제임을 예감토록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 신앙과 경제
 
(1) 여전도회 회관 건립 추진
 
1960년대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발전을 위해 창의적 사업을 전개하였던 이필숙 총무(1958.6~1961.8)는 김필례 회장 당시 취임하여 주선애 회장과 같이 일하였는데 특별히 선교 재정 조달을 위한 선교 달력(1959)을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그 사업은 지속적으로 선교 재정의 기반이 되었다. 1963년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총회는 회관 건립을 건의하고 기금 모금의 일환으로 1963년 10월 3일 선교회관 건립을 위하여 선교 브로치 2만 개를 제작(개당 200원)하여 기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제30대 대회(1964)때 여전도회관 건립을 선교관 건립으로 변경하도록 결의하고 모금한 결과(1964~1988) 기금 총액 7,820,478원이 모금되었다. 건축을 위한 대지를 구입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서 현재 종로구 연지동 136번지 기독교회관 안에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선교관으로 47평 건물을 매입하였다.
 
(2) 선교활동 지원 위의 책
 
연합회는 1962년부터 군 선교를 위하여 선교회원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군선교회원은 60만 대군을 복음화하기 위해 1억 5천만원의 기금을 마련할 때까지 전국 여전도회원들이 연 1회 1,000원씩 담당하였다. 또한 영아 선교 회원도 모집하였다. 1963년 12월에 선교부 내에 영아부를 설치하여, 가정과 교회가 영아 때부터 선교 정신을 고취함이 중요하다는 점을 실제로 실천하였다. 0세부터 5세까지의 어린이를 '보내는 선교사'로 양육하기 위해 부모가 아이의 이름으로 5,000원을 평생 1회 헌금하였다.
 
다양한 선교활동을 위해 필요한 재정 개발 목적으로 1959년 15,200부의 선교 월력을 제작하였다. 성서적인 뜻이 담긴 소재로 매년 4월부터 작업하여 현재 전국 회원에게 10만 부 이상 판매하여 선교비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1978년 제작된 회원 수첩은 여전도회의 기구도, 당해년도 과제, 월별 기도 제목, 임원단과 연합회 회장의 주소록, 연합회의 행사 일정, 인용 성구, 유관기관 연락처 등을 담음으로 여전도회의 실태 파악과 유기적 관계 형성을 위하여 매우 건설적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첫 해에는 200원에 판매하여 70만원의 이익금을 냈고, 현재는 3만 부를 발행하고 있다.
 
3. 신앙과 사회복지
 
6ㆍ25 동란과 월남 전쟁 이후 많은 전쟁고아와 상이군인을 비롯하여 병원, 양로원, 윤락여성, 소년원, 교도소에 특별히 여전도회원들의 손길이 요청되었고 지역마다 특수 사정에 따라 요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점차 지역 봉사 차원에서 해당 지역 연합회가 감당해 나가도록 권장했다.
 
(1) 군 선교를 통한 봉사 활동
 
여전도회는 군인들이 국방의 의무를 담당하는 데 있어 육체적 훈련 못지않게 정신적 훈련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복음을 받아 보람 있는 군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노력을 펼쳤다. 여전도회는 장병들의 수고에 대한 고마움과 위로의 표현을 단순히 기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1960년에 1만 켤레의 덧버선을 손수 만들어 보냈고 토시를 짜서 전달했으며 1977년에는 한겨울 보초병들의 마음을 녹여줄 따뜻한 사랑이 담긴 보온병 600여 개를 보내기도 했다.
 
(2) 산업 선교를 통한 봉사 활동
 
한국은 1960년대와 1970년대 20년 동안에 놀랄 만한 경제 성장을 가져왔다. 산업 발달로 도시화 현상이 일어나 농촌의 인력을 흡수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도시 공장으로 모여든 청소년들의 외롭고 고된 생활에서 연유된 갖가지 문제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윤락 여성, 교도소 등 방황하는 젊은이 집단들은 따뜻한 손길을 필요로 했다. 여전도회는 이러한 시대적인 요청 앞에 제일 먼저 산업 선교를 시작했다. 1957년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한 강경구 전도사를 영등포 공장 지대로 파송하고 그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미국 교회의 여전도회가 재정적인 뒷받침을 크게 담당하고 본회는, 영등포 지역만 해도 60여 공장에 3,000여 명의 공장 직원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어머니 같은 사랑으로 보살피며 위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기를 주었다. 그 후 영등포 산업 선교는 크게 확장되어 각계의 관심이 모아지게 되었다. 본회도 전도부에 산업 전도회를 따로 두었다. 정부의 정책으로 구미공업단지에 90여 개 공장을 세우게 되자 1976년 고애신 전도사의 선교 활동비를 담당하고 상담 장소가 우선 필요하여 110만원에 전세를 얻어 주며 선교 사역을 이모저모로 지원해 주었다. 고애신 전도사는 3만 여 명의 여자 공장 직원들을 대상으로 상담, 교양 지도, 성경 공부를 통해 벅찬 일을 감당함으로 영과 육이 함께 병들기 쉬운 어두운 곳에 희망과 소망을 안겨 주는 작업에 정열을 쏟았다.
 
(3) 윤락 여성 선교를 통한 봉사 활동
 
1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이 점차 증가하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윤락여성의 수도 증가하였다. 그때 윤락여성을 위해 정부에서 경영하는 시립 동부여자기술원이 생겼다. 이곳에서는 윤락여성을 수용하여 1년 또는 3개월간 기술을 가르쳐 사회인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 기술원을 금호교회 백명숙 권사가 책임지게 되었다.
 
4. 신앙과 교육ㆍ문화
 
(1) 문서를 통한 교육: 정기간행물

매월 지교회에서 모이는 여전도회 월례회의 예배와 기도를 통일시키고 여전도회원들의 관심을 같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자료로 월례회 인도책이 일찍부터 출간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압제 밑에서 출간을 정지당하였다. 그 후 1956년에 김필례 회장 당시 다시 속간되어 지금까지 지회에서 애용되고 있다. 예배 순서와 설교 말씀, 기도 제목을 넣어 전국의 지교회까지 함께 같은 말씀과 기도로 힘을 합할 수 있는 점, 손쉽게 인도자가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자료가 되고 부록으로 실은 '회의 진행법'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2) 문서 선교
 
1972년 8월부터 장로교 교단지인 기독공부를 군부대에서 무료로 받아볼 수 있도록 4,000부 이상을 전국연합회와 지연합회가 협조하여 보급하고 있다. 그 대금은 기독공보사에 전달하기로 결의하여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으며 또한 '새가정'잡지를 유일한 기독여성 가정 잡지로 키워왔다. 새가정 위원회에 위원을 파송하여 일곱 교단이 협력해오고 있으면서 특별히 군부대에 '새가정'을 보내는 일에 전국의 지연합회들이 협조하고 있다. 매월 '새가정' 1500부 보급에 힘쓰고 있으며 기독교 문서를 군대에 보내어 선교와 영혼의 양식이 되도록 하고 있다.
 
(3) 연예인교회
 
여전도회는 하나님 나라 선교를 위한 대중문화의 영향력에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였다. 연예인교회에 대한 관심과 협조가 대표적 예중 하나이다. 당시 장로회신학대학 재학생이던 하용조 전도사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의 최고 스타급인 연예인들이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모임이 교회로 발전되어 1978년 120여 명이 연예인교회의 주축이 되었다. 여전도회는 그들의 선교를 위한 공연을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힘껏 보조함으로 뒷받침했다. 1976년 '새롭게 하소서'를 주제로 첫 공연을 가지게 되었을 때 연예인교회 건립기금에 성원했다. 총회나 제1회 선교대회시 연예인교회 연예인들의 간증과 찬양은 큰 감명을 주었다.
 
Ⅳ. 1980년대 이후: '21세기를 준비하는 시대'
 
1. 신앙과 정치
 
(1) 통일에 대한 관심
 
1987년 9월 1~4일 열린 여전도회 제52회 총회는 1988년 창립 60년(희갑) 기념사업 준비와 특별히 세계 평화, 조국의 평화통일 무제에 역점을 두었다. 국내외적으로 세계 평화와 남북한의 통일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분단된 국가의 비운을 생각하여 통일 문제에 대한 협의 기구와 정책이 정부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절실하게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전도회는 1987년 6월 24일 임진각에서 제1회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회를 사회부 주최로 100여 명이 모여 가졌고 1987년 총회에서 매년 6월을 평화의 달로 선포하기로 결의하였다.
 
(2) 3·1절 기념예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교회와 교회여성이 해야 하는 사업 추진과 특히 기독교방송국이 복음 방송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도록 후원하고자 하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특히 여전도회 7~10대 회장인 김마리아 여사의 조국과 민족을 위한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애국애족의 뜻을 기리자는 취지를 가지고 1982년부터 시행했다. 본회는 3.1절 기념예배 순서지를 전국 교회에 보내어 같은 말씀으로 예배를 드리고 그때의 헌금은 본회로 모아져 국내 선교 사업에 쓰여지고 있다.
 
2. 신앙과 경제
 
(1) 선교활동지원
 
1988년 9월 본회 창립 60주년 기념사업으로 10년 동안 20명의 선교사를 파송키고 결의하고 해외선교회원 모집을 위한 3차년도의 계획을 세웠다. 제1차년도(1989~1991)에 5명, 제2차년도(1992~1994)에 5명, 제3차년도(1995~1998)에 10명의 파송계획을 위하여 '300달러, 200달러, 100달러 회원'을 모집하였다. 또한 창립 60주년 기념사업으로 서울여대 대학교회를 건립하기로 결의하고 1인당 5만원 회원 2만 명을 교원선교회원으로 모집하여 10억 예산을 충당하였다. 1990년 9월는 자녀 선교 회원제도를 시작하여 영아 선교 회원의 때를 놓친 6세부터 결혼 전까지의 자녀들에게 '보내는 선교사'의 의식을 주지시키며 평생 1회 회비 5,000원을 내며 참여하도록 하였다. 60세 이상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수연 선교 회원제도도 주목된다. 60세 이상 된 회원들이 60 평생을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여생을 선교 사업 확장에 뜻을 두고, 특히 국내 농어촌 선교를 지원하기 위하여 평생 1회 6만원을 헌금하기로 하였다.
 
(2) 통일선교 기금 마련
 
여전도회의 민족통일선교정책연구소는 모든 집회의 예배 시 모아진 헌금을 통일선교기금으로 마련해 두기로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민족의 평화통일을 준비하는 교회여성'으로서 다각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1992년에는 53연합회가 사랑의 쌀을 모아 북한 동포에게 전해지기를 소망하며 600만원을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본부'에 보냈다. 1993년부터는 전국의 여전도회원들이 통일을 염원하며 성미를 모으는 심정으로 '통일 성미 한 말 모으기 운동'을 펼쳐 기존의 통일선교기금 1억원과 함께 차근차근히 준비해 가고 있다.
 
3. 신앙과 사회복지
 
(1) 농어촌 교회 지원
 
여전도회는 농어촌 교회 지원을 열 곳으로 확장하고 여전도회관 수익금 중 3천만 원을 농어촌 선교를 위한 후원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효율적 지원을 위하여 벽지, 어촌의 어려운 교회들을 인근 연합회와 연계하여 보살필 수 있도록 체계적인 조사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가속화되는 세계화의 현실은 조사 연구 후의 실천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인식하여 여전도회는 구체적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2) 장애인 보조
 
하나님 나라 선교를 지향하는 여전도회 리더십은 작은 자를 향한 섬김을 항상 선도적으로 실천하여 왔다. 이러한 섬김은 1982년부터는 온양 농아학교의 채은하 전도사의 사역 후원으로 지속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농아학교 건립을 위한 대지구입비 1,000만원을 보조하여 농아학교가 이전하고 창립 6주년 예배를 드릴 때 기념품을 전달하였다. 장애인과의 구체적 만남을 통하여 작은 자의 이웃이 되는 체험은 여전도회 리더십과 문화에 작은 자를 섬김이 핵심 주제와 내용으로 자리하는 토대가 되었다.
 
(3) 미혼모 보호
 
작은 자와 함께 하는 여전도회의 리더십과 문화는 1984년부터 애란원과 함께 하기 시작했다. 애란원은 반피득 선교사의 부인 애란씨가 설립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운영해 오다가 그가 귀국하면서 총회의 사회복지법인의 위탁한, 미혼모와 아기를 위한 시설이다. 복음적 관점에서 교회는 사회에서 버림을 당하고 소외된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호하고 인도하여 새 삶을 찾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선교적 사역을 가능케 하였던 것이다.
 
4. 신앙과 교육ㆍ문화
 
(1) 서울여자대학교 설립
 
1950년부터 약 8년간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김필례 회장은 한국 교회 발전과 여전도회 육성을 위해서는 교회여성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장로교 여성 대학 설립의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김필례 회장은 1956년 장로교 여자 대학 설립을 교단에 건의하여 설립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그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서울 근교에 대학 부지를 선정하는 데 많은 수고를 하여 태릉(현 서울여자대학교 대지)에 7만여 평을 마련하였고 1961년에 서울여자대학이 개교하였다.
 
(2) 교회여성문제연구소 개소
 
여전도회는 선교에 가장 열의를 쏟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교는 건강한 교육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을 여전도회는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교회 교회 교육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여성의 힘으로 새로운 활력과 창조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새삼 고조되었다. 교육을 통하여 회원 스스로가 성장하면서 선교와 봉사에 참여함으로 보다 바람직한 신앙생활이 가능하며 또한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다는 구체적 비전을 실천하기 위하여 1990년 9월 '교회여성문제연구소'를 개소하였다.
 
(3) 계속교육원을 통한 교육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42회 총회에서 희년(1978년) 사업의 과제로 선교회관 건립을 앞두고 5대 목표를 세웠다. 그 중의 하나는 평신도 훈련원을 개설하여 여전도회원들의 지도력을 개발할 수 있는 재교육장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83년 미국 장로교로부터 여성의 지도력 개발을 위한 평생교육원을 세울 수 있도록 건물 부지를 기증받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1987년 여전도회관이 완공되었다. 이에 따라 1983년 3월 계속교육원이 개설되어 9회에 걸쳐 6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근래에는 매 학기마다 400여 명의 학생들이 선교여성의 사명을 다지며 성서 연구를 중심으로 다양한 훈련을 받고 있다. 1986년에는 목회자 사모반을 신설했고 1987년 8월에는 지방 회원이나 단기 과정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계절 단기 교육반을 신설하여 1월과 8월에 실시하고 있다.
 
(4) 가정 문화 변혁
 
날로 험악해지는 사회 환경 속에서 기독교 가정을 먼저 바로 세우기 위해 '교회여성문제 연구자료' 1998년 5월 제5집을 '기독교 가정 지침서'로 출간하였다. 성서가 말하는 가정관, 가정예배 지침, 경제관리, 가족치료를 통한 가족관계 개선, 가정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 간(間) 세대와 교육 등으로 엮었으며 특별히 여성과 아동 폭력에 관한 자료를 부록으로 실었다. 이는 기독교 가정의 모델을 이루는 데 효율적인 자료와 가정 지침서가 되고 있다.
 
Ⅴ. 21세기 사회문화 변동과 여전도회의 과제
 
한국교회 여성 리더십의 자랑스러운 전통 중 하나는 지역사회와 민족, 즉 이웃들로부터 신뢰받는 조직과 집단이자 개인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신뢰는 교회로 하여금 교회로서 감당하여야 할 다양한 섬김 사역과 선교를 가능케 하는 매우 귀중한 동력이었다. 우리는 여전도회의 역사를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성 리더십은 그 내용과 방향성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것이다. 여성 리더십의 토대를 이루는 하나님 중심적인 복음적 신앙은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충성으로서의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신앙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여야 한다. 그러나 불변하는 성경적 진리를 변화하는 시대적 정황 속에서 증거하고 실천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을 증가시켜야 하는 여성 리더십의 사명과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시대적 상황(context) 변화도 매우 민감하게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21세기 들어 급변하는 변화에 대한 예측과 분석을 근거로 여전도회가 지향하여야 할 여성 리더십의 과제와 문화를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1. 교육
 
21세기는 유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는 시대를 의미한다. 학교 교육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활용한 지식정보 사회가 확산됨으로써 이제는 사회 구성원 다수가 상당한 정도의 지식과 정보를 갖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피교육 수준이 높아지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참여를 열망한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소수의 지도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던 종래의 의존적이며 수동적인 역할에 더 이상 머물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공동체의 의사결정에도 어떤 형식으로든지 참여하기를 원하며,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도 단순한 수행자와 보조자로서 보다는 동역자(collaborators)로서 인정받기를 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경험과 지혜와 통찰을 모으고 다듬는 데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전문성과 헌신과 열정을 갖춘 평신도들을 각종 사역의 책임자와 동역자로 세움은 매우 시의적절한 결정이며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동역 사역에 여성 리더십은 모성적 리더십 특유의 연계성과 포용성으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할은 하나님의 형상을 제한없이 구현한 여성 리더십의 전문성을 토대로 발휘되어야 한다. 
 
2. 정보
 
지식정보화 시대의 성숙과 함께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교회는 자칫 소외되거나 혹은 세상적인 이야기들 속에 그 정체성을 잃어가게 될 수도 있다. 예컨대 장년 층 이상의 기성세대는 지식정보화 시대의 총아인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인터넷 문화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많다. 반면 젊은이들은 성경은 잃지 않고 인터넷에 넘쳐나는 세상 이야기에 몰두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이때는 복음적 정체성 상실이라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여성 리더십은 이른바 SNS를 중심으로 한 온라인과 기존의 소통 양식인 오프 라인을 활용할 수 있는 미디어의 수용력을 높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21세기 사회는 더욱 다양한 관계망과 소통기술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너무도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성경적 관점에서 적절하게 취사선택하고 또한 가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더욱 미디어 교육과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 문화에 대한 교회교육을 강화하고, 실천함에 힘써야 할 것이다.
 
3. 민주화
 
21세기 문화의 특징은 모두가 집단의 미래에 영향을 주는 결정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교육의 강화와 정보의 풍부한 공급과 함께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위계적 질서에 익숙하여 있는 교회는 사회로부터 게토(ghetto)화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예컨대 지금까지 대부분 교회에 있어서의 의사결정은 50대 중반 이상의 남성들에 의하여 이루어져 왔다. 이제부터는 여성과 청ㆍ장년들도 어떤 형태로든 교회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여 그들의 뜻을 반영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 만인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또한 당회를 대의정치의 핵심적 기관으로 위임한다는 의미에서 교회는 민주적인 기관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중과 위임은 모두 복음에 토대를 둔 것이며, 모두 복음적 정신에 따라 실천되어야 한다는 면에서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선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복음의 정체성과 진리의 불변성을 타협하는 선동정치(demagogue)의 풍조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4. 조직의 복합화
 
21세기의 특징은 지식정보화에 기반한 세계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식정보화와 세계화의 가속화는 경쟁력이 부족한 군소 조직들을 도태시키고 있으며, 경쟁력 강화와 생존을 위하여 많은 조직들이 더욱 대형화, 복잡화되어가고 있다. 또한 작은 조직들과 기업들도 나름대로의 생존을 위하여 더욱 심화되는 경쟁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무학교회도 이제는 특정한 소수의 인재들이, 지역사회를 섬기는 지역교회로 존재하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특정한 몇몇 개인들이 이렇게 복잡해진 상황에서 여전도회가 감당하여야 할 사역을 감당할 수는 없게 되었다.
 
5. 파편화되는 충성심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날이 가속화하는 지식정보화와 세계화로 인하여 유래 없이 다양한 종교적 만남과 여가생활을 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각종 미디어의 발달과 모바일(mobile)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여러 교회들의 예배와 목회자들의 설교를 접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다니던 한 교회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와 종교 단체들과 각종 시민단체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과제는 여전도회의 여성 리더십 함양의 비전과 내용과도 밀접하게 관계된다. 전국조직이 중심이 되었던 상황과 지역 연합회를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기능하였던 조직활동과 문화에 변화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욱 개인과 작은 단위의 모임에 중요성을 부여하면서도, 작은 단위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공동의 사역을 위한 협력과 연계사역(netwoking)을 위한 지도력과 문화형성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지도력과 문화는 오로지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라는 우리 모두의 사명 앞에서 합의되고 실천될 수 있을 것이기에 복음적 선교토대는 여성 리더십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
 
21세기의 특징 중 가장 주목하여야 현상 중 하나는 여성 리더십의 놀라운 부상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과 전문직 여성들이 놀랄만한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 인력의 전문화와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의 증가는 가정의 변화와 함께 교회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만약 이러한 여성들의 변화에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대응한다면 교회에는 상당한 손실이 초래될 것이다. 사회에서는 여러 분야에서 전문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여성들이 교회에서는 전통적인 역할에 묶여 있어야 한다면 점차로 여성들이 교회 사역에로의 참여는 감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구미 여러 나라의 교회들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경험하였음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가정교육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고, 교회봉사의 핵심적 역할을 감당하였던 여성들의 변화는 그만큼 교회가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여서 적절한 대응을 모색해야 할 부분이다. 교회는 특별히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있는 여성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21세기 교회는 여성 리더십 특유의 부드럽고 온유한 형태의 리더십에 주목하여야 한다. 남성적인 리더십이 결과 중심적인 경향성을 보이는 데에 비하여 여성적인 리더십은 과정 중심적이다. 이제 교회는 전통적인 남성 중심의 리더십과 함께 여성 리더십을 보완하여 더욱 온전한 리더십을 갖추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임성빈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