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자리서 모든 것을 들어라

[ 교계 ]

안규순
2013년 11월 25일(월) 11:36

대림절 기획 1.

농아인의 가장 큰 장애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유로운 소통이 어렵다. 그러나 농아인들은 소통이 어렵다고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나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있다. 물론 요즘은 사회 환경이 많이 변해서 삶의 곳곳에서 수화통역 등 다양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만,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사회 인식과 제한적인 통역서비스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특히 수화를 언어로 사용하고 있는 농아인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수화를 사용하지 못하는 청인들과의 관계도 잘 유지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상대의 음성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두 눈을 반짝이며 집중해서 상대의 입술을 보고 최대한 입모양으로 상대의 말을 읽어야 하고, 음성 외에도 눈빛, 표정, 몸동작에 최대한 집중해서 상대가 전달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농아인들 사이의 대화에서도 그렇다. 수화는 수화와 표정, 그 외의 손으로 표시되지 않는 비수지기호가 많다. 음성언어의 형용사, 부사 역할을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모든 내용을 오해하지 않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집중해서 눈을 마주봐야 한다. 시선을 외면하거나 등을 돌리거나 하면 절대로 대화를 이어갈 수 없다. 그래서 싫든 좋든, 상대의 눈을 보고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미세한 표정의 움직임도 놓쳐서는 않된다.
 
아마도 농아인들의 눈치가 비교적 빠른 이유가 이것 때문일 것이다. 눈을 보고 대화해야 하는 농아인은 겉과 속이 다르기가 쉽지 않다. 속으로는 상대를 비난하면서 겉으로 다른 표현을 하지 못한다. 만약 그러면 금새 눈빛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많은 세상, 그래서 본인에게 혹은 자신의 집단에 유익하면 정의이고, 불리하면 불의고 부정이라고 외치는 세상,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표현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살아가는 요즘 세상 속에서 어쩌면 농인들은 듣지 못해서 살기 힘든 것이 아니라 그런 위선을 배워야 해서 살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들을 수 없는 장애인은 외모에는 이상한 점이 없지만 비농아인에 비해 정보 수집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사고방식이 단순할 때가 많다. 그래서 대화를 할 때 비유를 쓰거나 간접적으로 돌려서 얘기하지 않고 명쾌하게 표현한다. 또한 농아인들은 비농아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너무 커다란 핸디캡을 가지고 있기에 그들과 자리경쟁을 하거나 욕심을 내지 않는다.
 
우리가 상대의 얘기에 귀기울이지 않고 경청하지 않는 것도 마음의 욕심 때문이 아닐까. 이것은 농아인들만 모이는 농아인 사회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비농아인들과의 관계에서는 잘 들을려고 힘쓰는 농아인들이지만 농아인들만 모이는 경우엔 그 안에 욕심이 개입되어 소통을 망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농아인들은 아무리 욕심이라는 것이 개입되더라도 그들이 남을 비방하는 수위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수화로 상대를 깎아내리거나 욕하는 단어의 수는 음성언어의 어휘에 비하면 지극히 적다.
 
농아인들은 듣지 못해서인지 몰라도 비농아인에 비해 마음이 순수하고 여린 편이다. 늘 사회에서 소외되고 제외되었던 그 상처를 알기에 다른 사람을 함부로 상처주지 않는다. 낮은 자의 위치에 있는 농아인들은 어쩔 수 없이 경청해야 될 때가 많이 있지만 낮은 자가 상대의 얘기에 귀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누구든지 낮은 자리로 나아가면 바로 그곳에 낮아진 자의 행복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의 자리를 버리시고 우리를 위하여 낮아지셨다. 낮은 자의 자리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의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셨고 경청하셨고 소통하셨고 친구가 되어 주셨다. 이번 성탄이 유난히 기다려지는 것은 우리 주변이 경청과 소통보다는 자기 주장과 외면으로 가득찼기 때문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다시 이 땅에 참 평화가 이루어지길 소망해 본다.

안규순/수화통역사ㆍ명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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