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1월11~16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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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08일(금) 11:21

월-가을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
본문 : 시 19:1, 갈 6:7
찬송 : 406장
 
예수님은 여러 번 "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변하는 계절을 통해 말씀하시고, 해와 달과 별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새와 꽃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가을에도 말씀하신다.
 
1.하나님은 가을에 하늘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시 19:1에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일을 나타낸다"고 했다. 우리도 이 시인처럼 하늘을 통하여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다. 똑 같은 하늘이지만 가을에 보는 하늘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2. 하나님은 가을에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갈 6:7에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둔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흙은 진실하다. 가을도 진실하다. 봄에 심은 종류대로 틀림없이 가을에 열매를 거두게 된다. 그러므로 무엇을 심느냐가 중요하다. 무엇을 심을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고 결정해서 심어야 한다.
 
3. 하나님은 가을에 쭉정이를 통해 말씀하신다. 마 3:12에 세례요한이 말씀하시기를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아니하는 불에 태운다"고 했다. 가을은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하는 때다. 쭉정이는 키질을 할 때 날아간다. 바람이 불 때 날아간다. 그리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버린다. 쭉정이는 비참하다. 그러므로 알곡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입으로만 예수님을 믿어서는 안된다. 열매를 맺어야 한다.
 
4. 하나님은 가을에 단풍과 낙엽을 통해 말씀하신다. 가을은 아름답다. 하늘은 높고 푸르고 들에는 익은 벼가 황금물결을 이루고 산들은 고운 단풍으로 아름답게 단장이 된다. 단풍은 희생의 표현이다. 단풍은 나뭇잎에 있는 영양소를 다 뿌리로 보내어 긴 겨울을 살아남도록 해주고 잎은 말라 떨어져 거름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기에 아름답게 보이는 저 단풍은 사실은 눈물겨운 희생을 감수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을 단풍을 보면서 희생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단풍은 끝을 더욱 아름답게 보내야 할 것을 가르쳐 준다. 시작도 아름답고 과정도 아름다워야 하겠지만 끝이 더욱 아름다워야 한다. 단풍을 볼 때마다 계 2:19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너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너의 나중 행위가 처음 것 보다 많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생애의 끝이 단풍처럼 아름다워야 한다. 우리 모두 떨어지는 단풍처럼 아름다운 최후를 맞이하도록 하자. 사람이 나이가 많아지면 머리가 하얗게 된다. 나무에 단풍이 드는 것과 같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다. 백발이 되면 더욱 거룩하고 경건하고 선하고 깨끗하게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욕심을 버리고 베푸는 삶을 살고 세상 줄을 끊고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하나님 나라에 갈 준비를 해야 한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가을은 조용히 생각하고 우주와 인생의 문제 그리고 진리를 깊이 깨달을 때다. 우리 모두 이 가을에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더욱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겠다.
 
<오늘의 기도>
주님 가을을 통해서 하늘을 바라보게 하시고, 심는대로 거두는 법칙을 배우고, 알곡이 되게 하시고, 낙엽을 통해서 남은 인생을 더욱 희생하며 알게 아름답게 살게 아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종준 목사/동암교회


화-잃어버린 양
본문 : 눅 15:1~10
찬송가 : 516장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그랬더니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투덜댄다. "죄인들과 어울리다니" 이 말을 들은 예수께서 비유로 들려주신 이야기가 잃은 양의 비유이다.
 
본문을 가만히 보니 양의 주인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 양 한 마리가 집을 나갔다고 하지 않았다. 양의 잘못이 아니라 주인이 잃어버린 것이라는 점에서 이 비유를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체에서 떨어져 나간 것은 떨어져 나간 이의 잘못이라는 관점이 우리에게는 많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으로 사람을 보게 되면 노숙자, 장애인, 노인, 환자, 가난한 사람, 아이, 저학력자 등등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쉬워진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도 모두 우리라는 말에 포함되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한 마리 양을 볼 때 그런 의미에서 보셨고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신다.
 
오늘 이 비유에서 양주인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닌다. 그리고는 기어이 찾아서 집으로 돌아와 이웃 사람들까지 불러서 기뻐한다. 이런 양 주인의 모습을 보면 백 마리 양 모두 정말 가족처럼 여기고 있구나하고 감동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양 주인의 모습을 들려주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곧 그런 마음이라고 알려주신다.
 
우리 사회에서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은 자꾸만 변두리로 밀려난다. 세상의 가치는 크고 강하고 빛나는 것만 목표로 한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지는 못하는데도 자꾸만 몰아가다보니 힘들어 하는 이가 자꾸만 생겨난다.
 
한 마리 잃은 양을 두고 그의 잘못이라고 하지 않고 끝까지 찾는 예수의 마음을 배운다면 우리가 이런 힘든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도 달라질 것이다. 잘못은 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몰아내고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이들은 우리 사회가 잘못된 기준을 세운 바람에 밀려나 떨어져버린 사람이니 되찾아야 할 사람이다. 한 마리를 찾기 전까진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 양들도 편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이어야 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과 힘들어 하는 사람을 되찾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며 함께 사는 길을 만들어 가자.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이 사회가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함께 하겠습니다. 다같이 사는 길을 찾고 실천하겠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금교 목사/누가교회


수-눈물이 흘러도 씨를 뿌려라
본문 : 시편 127:5~6
찬송가 : 338장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 귀환'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내용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전반부 1~3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때를 회상하면서 벅차오르는 감격과 기쁨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다음에 후반부 4~6절은, 아직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바벨론에 남아 있는 나머지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저들을 해방시켜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이다.

'제1차 바벨론 포로 귀환'이 B.C.537년에 이루어졌고, 그러고 나서 무려 79년이 지난 후인, B.C.458년에 '제2차 바벨론 포로귀환'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이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79년 후에 일어날 일을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포로 귀환'이 어떻게 극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앞으로 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저 사람은 가는데, 왜 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못하는가?" 더 큰 '절망감', 더 큰 '두려움', '더 큰 외로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 절대로 버리지 않으셔.' '우리도 언젠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거야.' '그 날이 반드시 올거야.'
 
'눈'에서는 포로민으로서의 고통의 눈물이 흘렀지만, '믿음의 씨앗'을 뿌렸다. '소망의 씨앗'을 뿌렸다. '기도의 씨앗'을 뿌렸다. 그것이 오늘 본문 말씀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우리 인생이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이 세상에는 여전히 악의 세력이 있다. 그러므로 '이미'구원받았지만, '아직'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포로 귀환'이 이루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바벨론 포로로 남아 고통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있듯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도 '포로민이 겪는 고통과 같은 아픔들'이 있다.
 
그러나 다른 것 하나가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은, 절대로 버리지 않으셔.' '우리도 언젠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거야.' '이 고통과 아픔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그 날이 반드시 올거야.' 라는 믿음을 가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만, '믿음의 씨앗'을 뿌린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만, '소망의 씨앗'을 뿌린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만, '기도의 씨앗'을 뿌린다. 이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눈물이 흘러도 씨를 뿌리는 사람'이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쁨으로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게 하신다.
 
<오늘의 기도>
눈물을 흘리며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 가운데 살았던 것 용서하옵소서. 눈물이 흘러도 믿음의 씨앗을 뿌리겠습니다. 소망의 씨앗을 뿌리겠습니다. 기도의 씨앗을 뿌리겠습니다. 반드시 기쁨으로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게 하실 것을 믿고 뿌리겠습니다. 주님 은혜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언구 목사/용문교회


목-어떠한 감사로 보답할까(11월 11~16일 원고)
본문: 살전 3:7~13
찬송가: 591장
 
고기에 등급이 있듯이 신앙인에게도 등급이 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성숙한 신앙인인가 하는 것은 그가 어디에서 기쁨을 얻는 가, 어떤 때 감사하는가 하는 것으로 가늠해 볼 수 있다. 먹는 것으로 기쁨을 얻는 사람보다는 듣는 것으로 기쁨을 얻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이다.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행동하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이다. 받고 기뻐하는 사람보다는 주면서 기뻐하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이다. 성숙한 신앙인은 말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다. 행동하는 사람이다. 주는 사람이다.
 
11월은 감사의 달이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 바울이 마케도니아에 위치한 데살로니가라는 항구도시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써 보낸 편지다. 바울을 시기하던 유대인들이 괴악한 사람들을 일으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대항하였다.
 
바울은 헤어졌던 실라와 디모데를 고린도에서 재회하여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이 위협 가운데서 믿음을 잃지 않고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위로를 받았다. 큰 기쁨을 맛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현대인들은 불평불만이라는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다. 불만은 상대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여 만족할 줄 모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소유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남보다 더 잘살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 불만이고 불평이다. 불평불만은 무서운 질병이다.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행복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알고 자족할 줄 아는 바울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 바울처럼 환경과 조건을 뛰어넘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란다.
 
원망이란 남에게 책임을 전가적하는 심리 작용이다. 무슨 일이든 잘못되면 자신이 책임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사람이 있다. 내가 못사는 것도 다른 사람이 잘살기 때문이요, 내가 실패한 것도 다른 사람이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타인에게 돌리는 질병이 바로 원망이다.
 
원망을 극복하려면 첫째,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야 한다. 둘째, 미래 지향적인 소망을 가져야 한다. 불만과 원망을 해결함이 없이는 어떤 여건에도 행복할 수 없고 평화를 누릴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불평과 원망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사회를 파괴하여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한다. 원망죄는 불신앙이다.
 
신앙인은 감사로 보답해야 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로 인하여 큰 기쁨을 맛 보았다. 그래서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을 굳게 세워주신 하나님께 무엇으로든지 보답하고 싶었다. 감사하는 태도에 따라 사람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감사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감사할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이다. 세 번째는 감사할 만한 일이 없는데도 감사하는 사람이다.
 
감사의 햇살이 환하게 내리 비치면 그 생활은 맑음이다. 감사의 햇살이 불평의 구름에 가리우면 그 생활은 흐림이다. 그리고 그 불평이 연속되면 그 생활은 장마가 되는 것이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평의 문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불행한 사람이라도 감사하면 행복한 사람이 된다. 행복한 사람이라도 불평하면 불행한 사람이 된다.
 
감사하라. 마음으로 감사하라. 입으로 감사하라. 예물을 바치고 감사하라. 좋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 감사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더 큰 축복으로 내려 주실 것이다. 우찌무라 간조는 "감사는 은혜를 받는 그릇"이라고 했다. 이 감사의 그릇이 클수록 은혜가 크게 임하고, 많이 임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헤아려 감사하는 성도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지한 목사/호산나교회


금-세상에 줄 마음이 없습니까
본문: 마 15:8~10
찬송가: 314장
 
이 세상에 사는 70억 명의 사람들은 종교인이거나 무종교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중심 마음은 "좋은데 가고 싶다"라는 마음일 것이다. 곧 신앙심인 것이다. 하늘나라에 가서 편히 쉬고 싶다는 마음일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중심 마음도 예수천당이라 하겠다. 이 땅의 19억 명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 믿고 천당갈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산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 3:11)
 
그러면 하나님을 믿어야만 구원받고 좋은데 갈 수 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 눈으로 보는 것 같은 그 무엇이 있을까?
 
로마서 1:20절을 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보여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 지니라"라고 했다. 참 마음으로 만물을 들여다 보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창조와 다스리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천지만물이 하나님을 보여준다.
 
만물이 돈이나 부귀영화를 보여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다. 천지와 만물을 지으셨으니 만물보다 휠씬 크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다른 일들은 제쳐놓고 하나님을 잘 믿고 의지하고 사랑해야만 한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섬김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영생에 들어가야만 한다.
 
그러면 나는 정말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지 나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고 하셨다. 이 말씀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정말 믿고 섬기는 일이다.
 
그런데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정말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까? 나는 어떨까? 나는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되게 믿느냐? 하나님은 나를 기쁘게 받아 주실까?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을까? 본문을 보면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말뿐이고 마음은 저 멀리 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진정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음을 모두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하나인데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으니 세상에 줄 마음은 없다. 세상, 육신, 돈과 성공. 이런 것에 줄 마음이 없어야만 한다. 오늘날 성도들이 세상에 마음을 너무나도 많이 주고 있지 않느냐? 주의 종들, 성도들이 세상에 마음을 갖다 바치는 것은 곧 쭉정이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 같은 분은 세상을 살지 않는 것 같이 살았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 온 마음을 드리게 해 주소서.

김정한 목사/주사랑교회


토-다 선지자가 되기를 원하노라
본문 : 민 11장 24~29절
찬송가 : 331장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출발하여 가나안 땅을 행해 행진을 하다가 멈추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먹던 고기, 생선, 부추, 파, 마늘이 그리워서 장막에서 통곡을 하며 행진을 멈춘 것이다. 모세는 이런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여 더 이상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고 갈 기력을 잃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낙심한 모세를 위로하시고, 모세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칠십인의 장로를 세워주시며, 모세가 하는 역할을 나누어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칠십인 장로를 세워주시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할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바란다.
 
첫째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종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칠십인 장로들에게 모세에게 주셨던 것과 동일한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똑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이들에게 서열이나 계급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며 우리는 동일한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동일한 하나님의 동역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동일한 하나님의 종임을 기억하며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기 원한다.
 
둘째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자에게는 믿음의 증거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칠십인의 장로들은 모두 예언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증거가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한 증거는 무엇인가? 방언이나 예언 같은 신비한 능력이 임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하던 자가 사랑하게 되고, 기쁨이 없었던 자가 기쁨이 넘치는 자가 되며 감사하지 못하던 자가 감사하게 된 것이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한 증거이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영이 임한 믿음의 증거들이 우리의 삶속에서 많이 보여질 수 있기 원한다.
 
셋째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된다. 칠십인의 장로가 하나님의 영을 받을 때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던 엘닷과 메닷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된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 여호수아는 모세의 말에 복종하지 않고, 회막에 모이지도 않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것을 금하게 해 줄 것을 말한다. 하지만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와 뜻이 맞지 않아도, 나와 생각이 달라도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를 함께 가는 믿음의 동역자이다. 모세의 고백처럼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모두가 선지자가 되기를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모습도 다르고, 신앙의 색깔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지만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함으로 함께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이 되어주며 하나님의 일에 동역하는 믿음의 일꾼이 되도록 하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때에 저희를 하나님의 종으로 불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가 저희에게 있음을 기억하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감당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영이 임함으로 사랑하지 못한 자가 사랑하는 자가 되며, 용서하지 못한 자가 용서하는 자가 되며, 감사하지 못한 자가 감사하는 자가 되는 믿음의 증거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보여지게 하옵소서. 서로 모습도 다르고, 신앙의 색깔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지만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함으로 함께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이 되어주는 믿음의 동역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곽철희 목사/청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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