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여성 리더십

[ 여전도회 ]

하경택 교수
2013년 10월 25일(금) 15:58

1. 들어가는 말
 
여성신학은 여성 리더십이 제대로 정립되고 작동하기 위해서 여성만의 노력과 이해로는 불가능하다. 남성의 이해와 협력이 불가피하다. 참다운 여성의 리더십을 위해서는 남성과 여성의 파트너십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홀로 설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보여주는 모습은 남성만 있는 가부장적인 사회도, 여성의 독자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여성편향적인 사회의 모습도 아니다. 따라서 필자는 우선 '남성과 여성의 파트너십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찾고자 한다. 두 번에 걸쳐 기록된 창조이야기를 통해 남성과 여성의 파트너십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고, 여성차별적인 본문으로 이해되곤 했던 남자와 여자에 대한 바울의 진술들을 통해 여성과 남성에 대한 바른 이해가 무엇인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어서 잠언서에 나타난 지혜에 대한 탐구를 통해 성경에서 보여주는 여성리더십의 모델이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한다.
 
1. 남성과 여성의 파트너십에 대한 신학적 근거

1) 창세기 1장에서의 인간창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남자와 여자
 
남성과 여성의 파트너십에 대한 첫 번째 근거는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에서 인간은 우주적인 피라미드의 정점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는 목표지향적이며 단계적으로 인간의 창조를 향하여 움직인다. 이렇듯 인간창조는 하나님께 특별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라는 주어가 등장한다. 심사숙고의 결단을 동반하는 행동이다. 인간창조는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 특별하면서도 장엄하게 이루어진 하나님의 결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그들을 축복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좀 더 깊이 고찰해 보아야 할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먼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 의미에 대하여 다음 세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로, 인간은 왕처럼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창세기에는 왕에게만 사용하던 '하나님의 형상'이란 칭호를 인류 전체를 뜻하는 아담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사실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모두가 왕처럼 존귀한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둘째로, 인간은 하나님의 상대자로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은 하나님께 응답하며 나아갈 수 있다. 셋째로,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임을 말한다. 인간 모두가 하나님의 왕적 모상이며 대리자이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하셨다. 바다와 하늘과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
 
두 번째는 인간창조의 목적에 관한 문제다. '사람을 만들어 바다와 하늘과 육지의 동물을 다스리게 하자'는 의도였다. 인간창조는 신들의 고역을 대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해서 인간이 이 땅을 통치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다스림'의 내용과 성격이다. 왕은 무엇보다 판관으로서 형평, 샬롬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다스림은 폭력이나 전멸이 아니다. 여러 요구와 승낙의 평화롭고 만족을 주는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특별한 목적을 위해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그 근거가 있다. 다시 한 번 27절을 주목해 보자. 한글번역 성경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히브리어 본문과 영어번역본에서는 인간이 전반절에서는 단수로, 하반절에서는 복수로 취급된다. 복수로 취급될 때 그것이 지칭하는 바는 '남자'와 '여자'이다. 구약성서에서 아담은 다음 세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첫째, 인류전체 혹은 인간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단수형으로 사용되지만, 집합적 의미를 갖는 경우, 둘째, 최초의 인간 개인을 가리키는 경우, 셋째, 여자의 대응개념으로서 남자를 지칭하는 경우이다.
 
2) 창세기 2-3장에서의 인간창조: 한 몸을 이루어야 하는 남자와 여자
 
두 번째 창조이야기에서 첫 번째 창조이야기와는 달리 땅이 강조되고 있다. '땅에 사는 인간'과 '땅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초점이다. 창조이전의 상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지 않아 초목과 채소가 없었고, 땅을 경작할 사람도 없었다고 말한다. 물, 식물, 사람의 결핍이 하나님의 창조활동의 동인이다. 하나님은 창조활동을 통해 이러한 결핍을 채우신다.
 
2장 7절에는 인간창조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하나님이 인간을 무엇으로 그리고 어떻게 창조했는지 잘 보여준다. 이것을 통해 인간에 대한 구약성서의 이해를 잘 알 수 있다. 1) 유한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본문은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창조하였다고 보도한다. 히브리어 본문은 인간은 '흙에서 난 먼지'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먼지'는 인간을 창조할 때 사용한 재료이며, '흙'(아다마)은 그 재료의 출처 또는 유래를 말한다. 2) 땅에 의존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흙의 먼지'로 창조된 인간의 이름은 '아담'이다. 언어유희(wordplay)가 엿보이는 '아담'(사람)과 '아다마'(흙)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은 인간은 흙으로부터 왔으며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3) 하나님께 의존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땅의 먼지로 인간을 지으신 후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그런 후에야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드셨다(8-17절). 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함을 느끼셨다. 18절에 하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그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돕는 배필'을 그에게 만들어 주겠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평가와 함께 이러한 부정적인 모습, 즉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돕는 배필'을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은 여자를 창조하시기 전 먼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만드셨다(19절). 아담을 지으실 때 사용하신 것과 같은 재료인 '흙'으로 만드셨다. 그러나 동물들은 부분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도 '돕는 배필'은 될 수 없었다(20절). 그래서 하나님은 여자를 창조하셨다.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남자의 우월성이 아니라 여자의 소중함을 드러낸다. 여자가 창조된 후 남자는 여자를 보고 다음과 같이 외친다(23절). "이제 이것이야말로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다" 여자를 향한 최고의 탄성이다.
 
그리고 24절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성서적 인간론과 부부관을 보여준다. 특별히 여자를 만들 때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돕는 배필'이라는 말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남자와 여자의 존재가치를 알 수 있다.'돕는 배필'은 히브리말로 '에제르 케넥도'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것을 직역하면 '그에게 알맞은 도움'이라고 옮길 수 있다. 이렇게 '돕는 배필'로서 한 몸을 이루어야 할 남자와 여자가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선고를 듣는다(창3:16). 여자에게 부과된 심판선고는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머니로서 받을 고통과 아내로서 받을 고통을 말하고 있다. 먼저 어머니로서 겪을 고통은 임신과 출산의 고통이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은 본래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문제는 그 고통이 커졌다는 데에 있다. 자연스런 고통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증가된 것이다.  다음으로 아내로서 겪을 고통은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다 포함할 수 있다. 아내는 남편을 향한 바람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남편의 다스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남자와 여자의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의 불평등한 관계를 갖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돕는 배필'과 함께 한 몸이 되어 살아야 할 부부의 관계가 지배와 피지배의 주종관계로 바뀌는 심각한 결과가 범죄를 통해 초래되었다. 특별히 두 번째 고통의 내용인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선고가 여성차별의 근거가 되곤 했다.
 
하지만 이 선고는 남자와 여자의 본래적인 관계가 아니라 범죄 후 선고받은 심판의 내용이다. 타락한 인간들에게 징벌로 주어진 결과이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남자와 여자의 이상적인 관계의 모습이 아니다.
 
3) 남자와 여자에 관한 바울의 진술들
 
① 여자의 머리는 남자?(고전11:1-16)
 
고린도전서 1-10장에서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다는 사실을 천명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허락된 자유는 덕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1장 2-12절에서 문제가 되는 상황은 예배에서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 남자와 여자의 적절한 차림새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1)문제가 되는것이 '머리모양'인가 아니면 '머리의 의상'인가? 2)남자와 여자 모두의 문제인가 아니면 여자만의 문제인가? 3)언급되고 있는 대상들이 '남편'과 '아내'인가 '남자'와 '여자'인가? 4)여기에서 '머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5)바울은 왜 이것을 문제라고 여기는가?
 
먼저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머리모양이 아니라 머리의 의상이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얼굴을 가리는 천이 아니라 머리에 쓰는 덮개가 문제인 것이다. 두 번째로 여기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문제는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녀 모두의 문제이다. 남녀를 언급할 때는 항상 남자가 먼저 언급된다. 더 큰 관심이 여자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남자의 문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세 번째로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대상들은 모든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결혼한 남자와 여자, 즉 남편과 아내로서의 남자와 여자들이라는 점이다.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자신의 남편과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나 남자의 경우는 아내와의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네 번째로 여기에서 '머리'가 의미하는 바는 물질적인 의미와 은유적인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남편은 가정의 대표자이다. 그는 가정의 공적인 얼굴이다. 수건을 머리에 쓰지 않는 여자의 행동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공적인 얼굴인 남편에게 불명예를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문제는 바울이 여기에서 머리 의상의 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바울은 두 가지 점을 문제 삼고 있다. 남자가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경우(4절)와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경우(5절)이다. 여자들의 경우엔 정반대의 문제가 발생한다. 당시 머리에 쓰지 않은 여성들은 미혼여성이거나 과부이거나 매춘부였다. 결혼한 여성은 공공장소에서 머리를 가렸다. 기혼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머리를 가리지 않는 행위는 자신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매춘부의 인상을 풍기는 행위였고, 무엇보다 자신의 남편을 욕되게 하는 행위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과 반대로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는 것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은 당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전제할 때 이해되고 수용될 수 있다. 교회의 혼란을 막고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권면했던 요구사항이다. 이 가르침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단락 마지막 부분에서 남성위주의 일방적인 해석과 적용이 되지 않도록 보완적인 진술을 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11:11-12).
 
②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14:34-35)
 
고린도전서 14장 34절도 오해를 많이 받고 있는 구절 중에 하나다.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활동을 제한할 때 자주 인용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이 번역을 보면 마치 여자는 교회에서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율법을 적용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말씀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의 맥락을 고려하면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모든 여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남편을 가진 여인들을 향한 것이며, 남편들에게 복종하라는 의미는 아내들이 교회 안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아내들이 교회 안에서 자기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들에게 물어보면서 예배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은 자신의 남편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부끄러운 것이라"(고전14:35)고 말한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사실은 바울이 교회 안에서 여인들의 모든 활동을 금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③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딤전2:8-15)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낼 때 교회 공동체에 가장 심각한 위협을 주었던 거짓교사들을 '어떤 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다(1:3). 그들이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한다(1:7)는 것으로 보아 유대교 배경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고(1:4), '허탄한 신화'에 대해 열심히 있었다(4:7). 이들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고 주장하고(4:3), 동시에 경제적인 이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6:5, 10). 이들은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고(4:1),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다(4:2).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추방하였다(1:20).
 
하지만 에베소교회 안에는 이런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주장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 사람들은 주로 교회에서 비교적 나이가 젊고 부유한 과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11-13). 영지주의 영향 아래 있는 이들 집단에서는 여자들이 주도적이며 선교적으로 공격적인 역할을 했다(12절, 5:13, 딤후 3:6참조). 그러면서 그들은 여자들이 성적 역할을 극복해야 한다는 당시로는 상당히 급진적인 견해를 대변했다. 또한 성관계와 혼인과 자녀출산을 포기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4:3).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응이 디모데전서 2장 11-15절의 내용인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우선 여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서 마땅히 행할 바인 '선행'을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이 아니라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신을 단장하라고 말한다(2:9). 이것은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요구되는 사항이다.
 
④남자와 여자는 하나(갈3:23-29)
 
남자와 여자에 관한 바울의 진술은 그의 구원론에 관한 진술에서 완성된다. 대표적인 본문이 갈라디아서 3장 23-29절이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믿음의 길을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는 사실이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하지만, 믿음은 우리에게 의롭다함을 얻게 한다. 따라서 믿음을 통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차이가 없다. 모두가 그리스도로 새로운 옷을 입었기 때문에 새로운 존재가 된다(27절; 참조. 고후5:17).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차별은 해소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8절). 혈통이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사라지는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며(16절) 하나님 유업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29절).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게 되는 새로운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토대와 원칙을 천명한다. 모든 상황윤리는 이러한 토대와 원칙 아래에서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3. 잠언서의 '지혜'를 통해서 본 여성 리더십
 
잠언은 지혜의 책이다. 여기에는 광범위한 영역에 이르는 지혜의 전통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장구한 시대에 걸친 지혜를 포함하고 있다. 잠언서에는 또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은 어리석은 여인의 목소리다. 하지만 잠언서는 마지막장에서 다시금 두 여인을 소개함으로써 지혜의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한 사람은 르무엘 왕의 어머니이고(31:1-9), 다른 한 사람은 '현숙한 여인'이다(31:10-31). 지혜자의 모델과 지혜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두 여인은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리더십을 보여준다. 이것은 여성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리더십의 사례들이다.
 
지혜의 두 여인: 르무엘 왕의 어머니와 현숙한 여인
 
지혜의 삶을 보여주는 잠언서의 마지막 장은 두 여인의 등장으로 마무리된다. 이 두 여인은 지혜의 모델로서 나타나는데 사랑하는 아들 왕을 훈계하는 어머니와 남편의 면류관이 되는 현숙한 여인이다. 이 두 여인에게서 여성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지혜의 리더십을 보게 된다. 어머니와 아내로서 보여주는 지혜의 리더십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구약성경 어느 곳에서보다 주도적인 여성 리더십이 돋보인다.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아들을 깊은 사랑을 담았지만 권위 있는 모습으로 아들을 훈계한다. 이 훈계의 말은 하나님의 음성과도 같다(잠1:20-33 참조). 따르지 않으면 파멸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여인인 현숙한 여인은 남편을 주도하고 가정을 책임진다. 손기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영능력도 뛰어나다. 하지만 그것은 파트너십에 근거한 주도적인 행동이다. 남편이 그를 신뢰한다는 언급을 통해 알 수 있다(11절).
 
둘째, 두 여인이 보여주는 지혜의 리더십은 사회적이며 공동체적이다. 르므엘 왕의 어머니나 현숙한 여인이 보여주는 삶은 개인적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다. 리더십의 범위가 사회적이며 공동체적이다. 어머니가 아들 왕에게 요구하는 가르침의 핵심은 '말 못하는 자'와 '힘없는 자들'을 변호하는 것과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위해 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것에 있다(8-9절). 그렇기 때문에 왕이 개인적인 만족과 즐거움을 얻고자 여자와 술에 빠지는 것을 강력하게 경고한다. 현숙한 여인도 개인의 이익을 넘어서는 공동체적인 지혜와 인애의 삶을 보여준다. 그녀의 활동영역은 자기 집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의 손길은 집 밖에 있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에게까지 미친다(20절).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훈계한 바가 그대로 실천되는 모습이다. 이러한 현숙한 여인의 삶을 통해 남편도 성문에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며(23절), 결국 자신도 성문에서 칭찬을 받게 된다(31절).
 
셋째, 두 여인의 리더십의 원천은 야훼 경외이다. 르무엘 왕의 어머니의 교훈은 잠언 1장 7-9절과 상응을 이룬다. 잠언의 교훈은 아비의 훈계와 어미의 법으로 대치될 수 있다(1:8). 그러나 아비의 훈계와 어미의 법은 바로 앞 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야훼 경외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1:7).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야 말로 모든 지혜의 삶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야훼 경외를 통해서 참된 지혜와 지도력 있는 삶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 현숙한 여인으로 번역된 히브리말 '에쉐트 하일'의 문자적 의미는 '힘 있는' 혹은 '생명력 있는'여인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숙한 여인의 행동도 야훼의 경외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하고 있다(30절). 야훼 경외가 개인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공동체적인 선과 의를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잠언 마지막 장의 두 여인의 모습은 잠언의 결론과도 같다. 의인화된 지혜가 구체적인 인물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두 사람은 지혜자로서 남녀를 초월한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된다.

나가는 말
 
리더십의 관건은 '선한 영향력'을 얼마나 끼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선한 영향력은 일방적인 강요나 독주에 의해서 나타나지 않는다. 타인과 올바른 관계에서 리더십은 정상화되고 극대화된다. 이러한 점에서 여성 리더십도 남성과의 파트너십을 통해서 온전히 발현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여성의 리더십의 출발은 남성과 여성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동등한 존재요, 돕는 배필로서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존재임을 인식할 때 가능하다. 여성차별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바울의 진술들도 남성과 여성이 이루어야 할 파트너십의 재발견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특별히 잠언서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지혜의 두 여인은 여성 리더십의 모델로 삼기에 손색이 없다. 그들은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만의 특별한 역할인 어머니와 아내로서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와 공동체를 향한 지혜의 참된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살아있는 이야기로 교훈한다.

하경택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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